2022년 12월 3주차 |
BOOK SUMMARY | ||
사라진 동물들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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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이클 블렌코우(역:이진선) 출판 미래의창 출간 20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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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생명들, 그 흔적을 따라 걷다 | ||
도서요약 보기사라진 동물들을 찾아서 큰바다쇠오리 큰바다쇠오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펭귄을 닮았다’는 표현이 새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털은 흑백이고 꼿꼿하게 서서 뒤뚱뒤뚱 걸으며 날지 못한다는 조건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큰바다쇠오리가 펭귄을 닮았다기보다 펭귄이 큰바다쇠오리를 닮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큰바다쇠오리는 원래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펭귄’이었다. 아마도 새의 눈과 부리 사이에 두드러지는 하얀 부분을 참고해 웨일스어 혹은 콘월어나 브르타뉴어의 ‘머리’를 뜻하는 pen과 ‘희다’는 의미의 gwyn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혹은 단순히 펭귄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으로 ‘살찌고 어리석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pinguis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 마침내 북대서양의 선원들이 남반구에 도착해 펭귄과 비슷한 흑백의 새를 발견했을 때 그 새들은 모두 펭귄이라고 불렸고 그대로 이름이 정해지게 되었다. 사실 이 남쪽의 펭귄들은 바다쇠오리와는 관련이 없다. 바다쇠오리는 지구의 추운 북극해에 사는 24종의 새를 대표한다. 모든 바다쇠오리종이 한데 모여 가족사진을 찍는다면 큰바다쇠오리는 소인국 릴리퍼트인들 사이에 서 있는 걸리버처럼 머리가 다른 새들보다 한참 위에 있을 것이다. 키 75센티미터에 최대 5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큰바다쇠오리는 방사선에 피폭되어 정상 크기보다 7배로 커진 돌연변이 레이저빌을 닮았다. 큰바다쇠오리의 엄청난 크기는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크기가 큰 물체는 쉽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큰바다쇠오리는 우람한 몸뚱이로 더 깊이 잠수하여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물고기만 먹는 동물에게 하늘을 나는 능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라서 큰바다쇠오리는 비행능력을 포기하고 물속에서 유선형의 몸을 강력하게 밀어낼 수 있는 작은 근육질의 날개를 얻었다. 두툼하고 홈이 나 있는 멋진 부리도 빼놓을 수 없다. 물고기를 움켜잡아 잘라내기에 적합했던 이 강력한 무기를 칭송하기 위해 큰바다쇠오리의 옛 이름을 ‘작살부리’라는 뜻의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geirfugl’의 여러 파생어 중 하나인 ‘게어파울’이라고 지었을 정도다. 큰바다쇠오리는 바다의 지배자로 진화했지만 바다 속에서는 알을 낳을 수 없다는 작은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매해 여름 두 달 간 큰바다쇠오리는 단단한 땅 위에 알을 낳기 위해 위험천만한 육지로 향해야 했다. 이 새들은 경사진 해안선이 있어 비교적 안전하고 접근이 쉬운 외딴 섬을 선호했다. 하지만 큰바다쇠오리를 완벽한 수중 사냥꾼으로 만들어주었던 적응특성은 물가로 올라와 마주하게 된 포악한 천적 앞에서는 매우 취약했다. 1497년 4월, 이탈리아의 항해사 존 캐벗(John Cabot)은 브리스틀 해협을 항해하던 도중 런디 섬을 지나갔다. 캐벗은 영국 왕 헨리 7세의 명령으로 아시아의 황금을 향한 지름길인 북서항로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헨리 왕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인지 캐벗의 탐사대는 황금 대신 대구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왕은 그리 반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뉴펀들랜드’ 근해에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배 속도가 느려질 정도라는 캐벗의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기뻐했다. 곧 프랑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어선 수백 척이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에서 대구 어업으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부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대서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1501년경 선원들의 그랜드뱅크 해로도에 새로운 섬이 등장했다. 1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길이에 500미터 미만의 폭을 가진 이 작고 황량한 섬에는 북양가마우지와 바다쇠오리가 가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섬을 ‘새의 섬’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어마어마한 수의 큰바다쇠오리 집단이 발견된 후로는 ‘펭귄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에 고약한 냄새라는 훨씬 기억에 남기 쉬운 특징에서 유래된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백만 마리의 바다새들이 싼 새똥이 쌓이며, 진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배설물 층에 뒤덮인 이 섬의 이름은 악취라는 뜻의 펑크(Funk) 섬이었다. 고원모아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모아 새가 갈라지는 질란디아 대륙에 무임승차했던 분리주의자이며 비행능력이 없는 곤드와나 새의 후손으로 뉴질랜드에서만 줄곧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최근 유전학과 형태학 연구를 통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모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남아메리카 대륙 출신의 도요타조라는 닭 크기의 새이며 이 새는 날 수 있었다고 한다. 수백만 년 전 도요타조와 모아의 고대 조상들은 뉴질랜드로 날아가 풍부한 먹이를 발견했고 포유류가 없는 임상층, 즉 숲의 층상구조에서 가장 아래층에서 자유를 얻었다. 포식자의 압박이 없었기에 더 이상 숨거나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비행을 멈추고 날개를 잃었으며 몸집을 어마어마하게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케인 플뢰리는 모아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을 가졌다. 자연과학 보조 전시책임자인 케인은 나에게 세계적으로 큰 수집품 중 하나인 관절 연결식 모아 뼈대를 자랑하는 더니든의 오타고 박물관을 안내해주기로 했다. 우리가 박물관의 빅토리아식 전시실 중 한 곳에 매달린 긴수염고래 뼈대 아래를 지나고 있을 때 케인은 말했다. “우리 박물관은 모아 뼈의 도움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죠. 오타고 지역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아종의 고향이라 모아의 유해가 풍부했거든요. 전 세계의 모든 박물관에서 모아의 뼈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넘치는 뼈를 화폐처럼 사용했고, 이따금 다른 전시물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의 배열된 모아 전시물 가운데 서면 마치 내가 여러 모아 뼈대 중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뉴질랜드의 모아는 9종으로 크기가 아주 다양하다. 무리의 막내는 칠면조 크기의 작은 덤불모아로, 등 길이 90센티미터에 무게는 25킬로그램이다. 특별히 고리 모양의 호흡기관에 적응한 동쪽모아와 큰부리모아는 울음소리가 가장 시끄러운 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아가 어떤 소리를 냈을지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케인은 이렇게 말했지만 붐비는 박물관 안에서 그 소리를 재현할 용의는 없는 듯했다. 무거운발모아와 볏모아, 멘텔모아는 생김새가 기이하다. 땅딸막한 이 모아 새들은 육중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짧고 통통한 다리를 가졌다. 짐작하건대 몸속에는 목질의 식물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거대한 장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유명인사 북섬자이언트모아와 남섬자이언트모아를 만났다. 나는 박물관의 남섬자이언트모아 뼈대의 그림자 속에서 서보았다. 두 종의 암컷은 최대 몸무게가 250킬로그램까지 나갔고 등 길이는 2미터로 문틀 높이와 같았다. 믿기 힘들지만 자이언트모아가 목을 뻗을 수 있는 높이는 최대 3.5미터였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새 중에 가장 크다고 한다.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전시물은 온도와 습도가 엄격하게 조절되는 협실 그늘에 누워 있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모아의 유해인 고원모아의 다리 미라다. 고원모아의 다리는 센트럴 오타고 산맥 동굴의 건조한 공기로 인해 수세기 동안 보존 상태를 유지했는데 케인이 지난달에 죽은 모아의 다리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생생해 보였다. 빽빽하고 얇은 깃털이 아직도 허벅지를 덮고 있고 근육과 조직도 뼈에 붙어 있었다. 탈색된 갈고리 발톱이 달려 있는 거칠거칠한 발은 영락없이 벨로키랍토르를 닮았다. 나는 아와모아의 개울 위 다리를 건너 남섬자이언트모아의 실제 크기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새가 나보다 1.25미터나 클 수 있다는 개념은 아직도 나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모아의 멸종 역시 믿기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벌이고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마오리족은 모아를 사냥했다. 그리고 모아는 마오리족의 배를 불려주며 뉴질랜드의 식민지화를 위한 연료가 되었다. 이 과정은 기습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모아 새끼와 성체를 무차별적으로 죽였고 알을 갈취했다. 사냥개 역시 어린 새를 무참히 공격했다. 모아는 번식을 할 수 있는 나이로 성장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매년 알을 1~2개만 낳았기 때문에 이 맹습에서 살아남을 만큼 빠르게 번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인간이 이 섬에 들어온 지 불과 1세기만인 1445년경에 9종의 모아는 모두 멸종했다. 주된 먹이원을 빼앗긴 하스트독수리 역시 모아와 함께 사라졌다. 불혹주머니찌르레기 불혹주머니찌르레기, 이하 후이아는 책에 등장한 모든 멸종동물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동물이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에롤 풀러의 책 ‘익스팅트 버드’의 표지에서 후이아 두 마리가 그려진 고전적인 삽화를 본 순간부터 나는 후이아라는 특별한 새와 사랑에 빠졌다. 독특하고 이국적이며 특별한 후이아는 내가 새에게 기대하는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모아처럼 후이아도 뉴질랜드에서 살았기에 나는 종종 침대에 누워 후이아가 날아다녔을 뉴질랜드의 외딴 숲을 상상하곤 했다. 후이아는 아랫볏찌르레기과의 일종인 뉴질랜드의 귓불꿀빨기새에 속한다. 귓불꿀빨기새 다섯 종의 이름은 귓불, 또는 육수라고도 하는 턱 양쪽에 늘어진 밝은 색의 살집에서 유래했다. 윤기 나는 푸른 빛의 반질반질한 검고 매끈한 몸과 대조적으로 후이아의 육수는 밝은 오렌지색이다. 12개의 긴 꼬리 깃털은 끝이 순백색이며 부채꼴로 펼쳐서 이성에게 과시할 때 특히 두드러지는 형태다. 다리는 상대적으로 길었지만 날개는 눈에 띄게 짧고 둥근 모양이다. 후이아는 날 수 있는 거리가 짧았고 땅을 깡충깡충 뛰거나 곡예를 하듯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도약해 숲속을 돌아다니곤 했다. 후이아에게는 놀라울 만큼 특이한 점이 있다. 나는 새의 부리를 묘사할 때 ‘주둥이(Bill)’나 ‘부리(Beak)’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두 단어를 각각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 되기 때문에 보통은 모양이나 새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사용했다. Bill은 주로 오리처럼 끝이 납작하거나 둥근 부리를 뜻하고 Beak은 맹금류처럼 뾰족한 부리를 뜻한다. 그러나 후이아는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해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새다. 수컷 후이아는 굵은 곡괭이처럼 튼튼하고 끝이 뾰족한 부리를 가지고 있어 ‘부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반면 암컷 후이아는 길고 가늘며 아래로 굽은 부리를 가지고 있어 ‘주둥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몇몇 다른 새 종들도 성별에 따라 부리 구조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후이아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없다. 이렇게 극도로 다른 부리로 무장한 암수 후이아들은 같은 서식지 안에서 서로 다른 생태 지위를 개척했기에 먹이를 두고 직접적으로 경쟁하지 않았다. 수컷이 곡괭이 같은 부리로 마른나무를 힘차게 내려쳐 딱정벌레 유충을 파내는 동안 암컷은 길고 섬세한 주둥이를 집게처럼 이용해 깊은 구멍 속을 파고들어 유충이나 곤충을 간단하게 끄집어냈다. 일부 목격자들은 후이아들이 함께 사냥을 하고 전리품을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후이아는 뉴질랜드 북섬에서만 발견되었는데 북섬의 선사시대 발굴지를 보면 한때는 널리 분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이아들은 높이 솟은 토타라 나무와 뉴질랜드의 토종 상록수인 리무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함께 이동하며 고대 숲의 어두운 중심부에 살았다. 후이아는 서로가 없이는 견딜 수 없다는 듯 항상 쌍으로 다녔다. 뉴질랜드 토착민들에게 후이아는 ‘나뭇잎과 하늘의 왕’이나 마찬가지였고, 마오리족 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지위가 높은 마오리 부족민만이 끝이 하얀 후이아의 꽁지깃을 머리에 착용할 수 있었으며 후이아에게도 지배계층의 지위가 주어졌다. 후아이는 신성한 새였으므로 특정 계절에만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사냥꾼들은 휘파람으로 울음소리를 흉내내 호기심 많은 후이아를 올가미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 뒤에 장대에 매단 올가미를 새의 머리에 씌웠다. 마오리족은 후이아 가죽을 정성들여 손질한 후 건조시켰고 머리는 펜던트처럼 한데 엮었으며 신성한 꽁지깃은 뽑아서 복잡한 모양으로 조각한 와카 후이아라는 나무 장식함에 보관했다. 마오리족장은 의식을 진행할 때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 깃털을 꽂았다. 후이아 깃털 장식 12개를 모두 착용하면 전쟁을 위한 머리장식인 마레레코(marereko)가 완성된다. 1840년에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는 북섬의 남쪽 숲에서만 후이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신성한 후이아를 보호하는 마오리족의 규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지위에 상관없이 후이아 깃털을 착용할 수 있었고 후이아 사냥은 점점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한 유럽 정착민들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새 장식품을 사용하는 마오리족의 별난 풍습을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가지 부리 형태를 가진 후이아에 대해 알게 된 유럽의 수집가들은 과시용으로 멋진 꽁지깃을 가진 한 쌍의 새를 응접실에 두고 싶어 했다. 부유한 유럽 수집가들과 박물관, 동물원이라는 새로운 수요로 인해 사냥이 가속화되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상태로 유럽으로 운송된 수천 마리의 후이아는 빅토리아 시대 유럽사회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세스블루 스텔러와 성베드로 호의 선원들이 표류하다가 베링 섬에 상륙한 지 45년이 지난 후에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최초의 동물학자들이 몬터레이 만에 위엄 넘치는 완벽한 모습으로 입항했다. 몬터레이에 도착한 탐험대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1785년 배에 올랐고,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이들은 1년 후인 9월 15일에 캘리포니아에 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주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과학 조사 장비를 배에서 내렸다. 그렇게 최초의 나비 그물망이 캘리포니아에 등장했다. 프랑스의 방문에 뒤이어 1837년에는 HMS 설퍼 호에 오른 벨처 선장을 포함한 동물학자들의 행렬이 꾸준히 캘리포니아를 방문했다. 벨처는 예르바부에나 주변의 습지와 강을 탐험했고 그곳의 풍경과 야생동물, 부족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며 한 달을 보냈다. 그가 나비 그물망을 휘둘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설퍼 호에 다시 승선하면서 180년 후에 트링에서 내가 조심스럽게 만져보게 될 안경가마우지의 가죽을 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나비 그물망이다. 그 그물망의 주인인 피에르 로르퀸은 골드러시 시대인 1849년에서 1850년 사이의 어느 날 도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르퀸은 자신이 발견한 캘리포니아의 나비를 그물로 잡아 표본으로 만든 뒤 파리에 있는 스승에게 발송했다. 로르퀸의 스승은 프랑스에서 가장 칭송받는 나비연구가로 알려진 장 바티스트 보이스듀발(Jean Baptiste Boisduval)이었다. 로르퀸의 캘리포니아 모험은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보이스듀발의 말에 따르면 그는 금 채취용 냄비를 흔드는 시간보다 “회색곰의 이빨과 방울뱀의 송곳니”처럼 날카롭고 용맹하게 나비 그물망을 휘두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황금에 미친 사람들이 온 산등성이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동안 로르퀸은 나비를 담은 꾸러미들을 정성스레 파리로 발송했고 보이스듀발은 그가 보내온 섬세한 나비 표본들을 연구하고 기록해나갔다. 그중에는 과학계에 새롭게 등장한 종들도 일부 있었는데 로르퀸의 이름표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발견된 작은 메탈릭 블루 색상의 나비도 그중 하나였다. 큰바다쇠오리와 안경가마우지가 영원히 파도 아래로 사라진 1852년에 보이스듀발은 ‘프랑스 곤충학 학술지’에 새로운 생명체를 세상에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프랑스에서는 크세르크세스(Xerxes)를 서세스(Xerces)로 쓰는데, 그는 이 새로운 나비에게 5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였던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나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비 종류인 부전나비과(Lycaenidae)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부전나비과는 푸른부전나비와 주홍부전나비, 녹색부전나비, 뾰족부전나비, 바둑돌부전나비아과를 포함한다. 전 세계에 6천 종 이상이 있는 부전나비과는 1만 8,500종으로 추정되는 지구상에 알려진 나비종 가운데 3분의 1을 형성한다.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일생을 보내는 서세스블루는 태평양 위에 쏟아지는 햇빛처럼 반짝이는 짙은 청색 날개를 가졌다. 서세스블루 수컷은 검은색과 흰색 윤곽선으로 강조된 푸른색 윗날개를 가졌다. ‘푸른부전나비’과에 속한 여러 종의 암컷들과 마찬가지로 암컷 서세스블루도 윗날개가 완전한 갈색이었지만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표현하려는 듯 특정 각도에서는 날개 사이로 푸른색이 춤을 추듯 반짝였다. 보이스듀발은 암수 서세스블루의 날개 아랫면은 “암회색이며 중앙에 반점이 있고 큰 흰색 점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성 물결무늬 띠를 가졌다”라고 표현했다. 일부 개체들은 이 점 안에 검은 ‘동공’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이 변이형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눈이 하나인 잔혹한 거인의 이름을 따 폴리페모스(polyphemus)라고 부른다. 나비는 번데기를 찢고 나와 3월과 4월에 하늘을 날았다. 수컷과 암컷은 모래언덕에서 만났고 교미를 통해 알을 낳았다. 다른 모든 나비들처럼 서세스블루의 애벌레도 식성이 까다로워서 특정한 식물의 잎만을 소화할 수 있었다. 서세스블루의 애벌레는 주로 디어우드와 층층이부채꽃처럼 배수가 잘 되는 모래언덕 지역의 토양에서 잘 자라는 토종 식물을 먹었다. 서세스블루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처럼 캘리포니아의 모래 왕국을 통치했다. 나는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안개 속에서 골든게이트 해협의 그렛 고속도로를 따라 곳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한 시간 후에 벤치를 발견한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샌드위치를 꺼냈다. 안개가 심해 골든게이트 다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안개 속에 숨어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1937년 3월, 기대에 찬 수천 명의 인파가 골든게이트 다리 개교식에 참가하여 도보로, 차로, 혹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도시에서만 살아가고 있던 생명체가 샌프란시스코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무지함을 탓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서세스블루를 연구했던 곤충학자들도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과학자들과 수집가들은 서세스블루의 표본을 쉼 없이 채집했고 개체 수가 줄어들어도 다른 모래언덕 어딘가에 나비들이 더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다른 어딘가’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확장하면서 서세스블루를 위한 모래언덕도 없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핀타섬땅거북 핀타 섬은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900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 최북단에 있는 섬이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매우 활발한 화산지 중 하나인 적도를 가로지르며 극적인 분출과 융기를 통해 계속해서 섬이 다시 탄생하고 재편성되고 있다. 1535년 3월 10일에 길을 잃고 표류하다가 핀타 섬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은 파나마의 4번째 주교는 핀타 섬에 대한 최초의 후기를 남겼다. “바다표범과 사람 한 명을 실어 나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땅거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570년대 지도에 “땅거북의 섬”이 등장했을 만큼 그 섬에서 땅거북은 눈에 띄는 특징이 었다. 거대 땅거북은 한때 꽤 많은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등껍질로 중무장한 이 파충류는 호주와 남극 대륙을 제외하고 모든 대륙을 정복했다. 땅거북은 이따금 대륙에서 떨어져 나오더라도 담수나 먹이 없이도 몇 달 동안 살 수 있는 능력과 부력을 가진 몸체 덕분에 해류를 타고 외딴 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대한 대륙에서 멸종한 이후 최근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땅거북 개체들은 세이셸과 모리셔스, 로드리게스, 레위니옹을 포함한 마스카렌 제도, 갈라파고스 세 지역의 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중 1835년 9월 17일에 갈라파고스 제도의 방문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찰스 다윈이 작은 배를 해안가로 밀어 올린 뒤 검은 현무암 위로 걸어올라갔다. 섬에 대한 찰스 다윈의 첫 감상은 갈라파고스를 찾아온 관광객을 위한 선전문구로는 적합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보다 더 험하고 지독할 수 없다. 이곳은 마치 영국의 공업도시 울버햄프턴을 떠오르게 한다.” 김을 내뿜는 분화구와 화산 원뿔구는 다윈에게 영국 산업 불모지의 폐석과 잡돌더미 같은 광경이었던 것 같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그는 이곳에서 “작은 잡초처럼 보잘것없는” 식물과 동물 표본을 수집하며 5주를 보냈다. 다윈은 해변에서 햇빛을 흡수하고 있는 바다이구아나를 “흉물스러운 머리”를 가진 “역겹고 꼴사나운 도마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특히나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바다이구아나 한 마리의 꼬리를 잡고 바다에 내던졌다. 바다이구아나는 꿋꿋하게 바다에서 나와 원래 일광욕을 하던 장소로 돌아가려 애썼지만 다윈은 그 이구아나를 몇 번이고 바다로 던졌다고 한다. 이구아나 부메랑을 던지거나 거북이 로데오를 타고 놀지 않는 시간에 다윈은 플로레아나섬의 노르웨이 출신 부총독인 니콜라스 로슨과 저녁 식사를 했다. 로슨은 땅거북이 너무 커서 들어 올리려면 남성 6~8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로슨은 다윈에게 등껍질 모양으로 그 거북이 어떤 섬에서 왔는지 알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다윈은 후에 이 발언에 조금 더 관심을 두었어야 했다고 인정했지만 그때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갈라파고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윈의 뇌 한 구석에서는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위대한 발상이었다. 그러니 다윈이 거대 땅거북 위에 걸터앉아 노을 속으로 걸어갔더라도 지금은 문제 삼지 말도록 하자. 다윈은 등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주 거대한 이 생명체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를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니콜라스 로슨의 말이 맞았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서로 다른 섬에서 발견된 땅거북들은 확실히 모습이 달랐다. 진화의 활약으로 땅거북은 각 섬의 서로 다른 서식지에 적응하기 위해 각각 15개의 종으로 분화했다. 각각의 종은 등딱지의 특징에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로 구분할 수 있었다. 대체로 건조한 섬에 사는 땅거북은 앞쪽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가 솟아오른 ‘안장 모양’ 등딱지를 가졌고 크기가 더 작았다. 이 테두리는 땅거북이 목을 위로 뻗어 키가 큰 식물을 먹거나 머리를 높게 올려 우성을 과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식물들이 무성하고 낮게 자라는 습한 섬에서는 땅거북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었다. 이런 땅거북종들은 등껍질에 테가 솟아 있을 필요가 없어 반구형이었다. 니콜라스 로슨은 땅 거북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었지만 땅거북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1835년 다윈과의 저녁식사 중에 그는 플로레아나 섬의 거대 땅거북이 20년 안에 멸종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땅거북의 멸종은 그보다 더 빠른 10년 안에 일어났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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