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일본 정독
 
지은이 : 이창민
출판사 : 더숲
출판일 : 2022년 06월




  • 일본학 3세대 대표학자 이창민 교수가 바라본 일본의 실체에 관한 객관적이고 치우침 없는 통찰을 전합니다. 경제학이라는 큰 줄기에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명료한 팩트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 새로운 한일관계에 대한 해법을 전합니다.


    지금 다시, 일본 정독


    과거의 일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일본인은 진짜 근면한가?

    일본인은 근면하다. 잔업과 장시간 노동에도 묵묵히 버티는 샐러리맨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 회사원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칭찬 중에 ‘마지메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뜻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봐도 그렇다. OECD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의 노동 시간은 연간 1,598시간으로 세계 24위 전후이다. 그러나 이는 최근에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가 대거 포함되면서 순위가 내려간 탓이다. 정규직 남자 노동자만을 따로 떼어 조사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본 남성의 휴일을 포함한 하루 평균 근무 시간, 즉 1년간 일한 시간을 전부 더해서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375분씩 일한 것으로 나온다. 압도적인 세계1위이며, OECD국가 평균보다 2시간이나 많다.


    그런데 ‘일본인은 근면하다.’와 ‘일본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근면하다.’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자는 증명할 방법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지만 후자는 이야기가 다르다. 일본인이 근면하다는 것이 인종적으로 구별되는 서양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아니면 같은 동아시아 내에서도 한국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근면하다는 것인지 객관적인 증명이 필요한 질문이다.


    전 세계에서 노동 시간이 가장 긴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인의 근면성을 말해 주는 증거는 아니다. 근면해서 오래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도적, 문화적 이유로 근무 시간이 긴 것뿐이라면, 결과적으로 ‘그래서 일본인이 근면한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인과 관계를 잘못 생각한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고 반드시 성적이 좋은 학생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장인과 같은 일본 노동자’의 모습은 과연 언제부터 정착된 것일까? 도쿄대학 명예교수 다케다 하루히토는 그의 저서 <일본인의 경제관념>에서 공업화 사회에서 보이는 일본인의 근면함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에 획득한 노동의 에토스(ethos)라고 설명한다. 즉 ‘시간’이라는 요소가 노동 속에서 큰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 ‘고용 노동’이 일반화된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다케다 교수의 설명대로라면 ‘근면한 일본인 상’이라는 것은 겨우 80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한편, 일본인의 근면함을 전근대 시대의 극적인 변화에서 찾는 연구도 있다. 경제학자이자 세계적인 역사인구학자인 게이오대학 명예교수 하야미 아키라는 에도 시대 농민의 근면함에 대해 산업 혁명을 본떠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 17세기 일본은 인구가 늘면서 토지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근면 혁명이 일본 고유의 역사적 사건이라면 이는 일본인의 근면함을 뒷받침하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하야미의 영향을 받은 얀 더프리스(Jan de Vries)는 17~18세기 유럽에서도 비슷한 유의 근면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산업 혁명과 같은 극적인 기술 진보 없이도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 생산력이 향상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17~18세기에는 일본을 포함해 동아시아 사회 여기저기에서 소농 경영을 바탕으로 한 노동 집약적인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관찰된다.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근면=일본인의 DNA’라는 등식은 결국 어느 시점부터 확증 편향성을 갖게 된 허구가 아닐까?


    빛나는 하이브리드 정신

    돈가스와 단팥빵은 둘 다 원래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었으나 일본풍으로 개량된 음식이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인들은 이렇듯 서양의 음식을 들여와 일본적인 음식으로 재탄생시키는 하이브리드 능력이 뛰어났다. 돈가스와 단팥빵만이 아니었다. 인도에서 영국을 거쳐 들어온 커리가 일본풍의 카레가 되었고, 프랑스의 크로켓이 고로케가 되었다.


    개량 능력은 음식 이외의 분야에서 발휘되었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society를 사회로, copyright를 판권으로 baseball을 야구로 번역한 것은 메이지 시기의 지식인들이었다. 근대화 시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개념들을 당시에 일본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개량의 흔적이다.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과정은 화혼양재, 즉 서양의 문물을 재로 삼아 일본의 혼을 담아내는 정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화혼양재의 개량능력은 산업 혁명기에 접어든 일본 경제를 견인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토요타 생산 시스템 또한 일본인의 하이브리드 정신이 빛난 성과였다. 토요타 생산 시스템은 제조 공정의 낭비를 없애는 두 가지 아이디어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고객이 주문한 자동차를, 필요로 하는 때에 필요로 하는 만큼만 만든다.”라는 ‘Just in Time(JIT)’이고, 두 번째는 “이상이 발생하면 누구라도 라인을 즉시 멈춰 세워 불량품을 찾아낸다.”라는 ‘자동화’, 즉 사람이 붙어서 일한다는 뜻이다. 조립 공정이 물 흐르듯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공정 간에 부품의 공급을 일치시키고 작업 시간을 조정해야 하는데, 토요타 시스템은 마치 각각의 공정이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이


    러한 토요타 생산 방식은 1980년대 이후 lean생산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되어 전 세계의 자동차 기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토요타 시스템은 미국의 포드 시스템을 일본에 도입하고 이식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된 금전적,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포드 시스템과 토요타 시스템이 전혀 다른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포드 시스템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토요타 시스템이 탄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일본은 중일 전쟁 시기부터 항공기와 선박 생산에 포드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포드 시스템은 다양한 전용 공장 기계들로 가공한 매우 정밀도가 높은 부품을 전제로 가동된다. 당시 일본에는 포드 시스템을 도입할 만한 자본도 기술력도 없었다. 결국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을 포기한 대신에, 일본은 다기능 작업자를 배치하고 부품을 공급하는 외부의 하청업체까지도 포함해 전체 생산 프로세스를 하나의 조립 라인처럼 편성했다. 말하자면 수공업 생산과 결합한 가상의 컨베이어 벨트가 탄생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100년 넘게 다양한 분야에서 관찰되던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은 1990년대 이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최근 10년간 삼성전자와 애플이 경쟁하듯이 혁신적인 차세대 스마트폰을 선보이자, 처음에는 두 기업을 모방만 하던 중국 기업들도 최근에는 꽤 가성비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 중에는 세계 시장에서 팔릴 만한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발명보다 혁신이 장점인 일본인들에게 최근의 제품 개발 속도가 너무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이 외국 기업에서 뭔가 배우려는 노력을 예전보다 덜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은 1980년대부터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되자 일본인 누구나가 “이제 서양을 캐치 업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다들 알다시피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이 잃어버린 10년, 20년을 넘어 30년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이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관건은 깊은 잠에 빠진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을 다시 깨울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현대의 일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답정너’ 정책이 위험한 이

    1989년 12월 29일, 3만 8,915엔이라는 역대 최고 주가를 기록한 도쿄 주식 시장은 흥분과 열기로 가득했다. 1990년 신년도 주식 시장이 열렸을 때 일본의 모든 이코노미스트와 애널리스트 중 그 누구도 주가의 하락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의 관심사는 과연 언제 주가가 4만 엔을 돌파할까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주가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과열된 시장에 숨고르기가 필요하다는 일명 조정장에 들어갔다는 설명이 훨씬 설득적이었다. 하지만 1월이 지나 2월이 되어도 주가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자 시장에서는 조금씩 불안과 걱정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 9월 30일 주가는 연중 최저치인 2만 222엔까지 하락했다. 이후 등락을 거듭하면서도 주가는 추세적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가 결국 2002년 종가는 1982년 종가 수준인 8,579엔까지 떨어졌다.


    20년간 주가가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었다. 이제 지가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주가 하락으로 시작된 버블 붕괴는 1년여의 시차를 두고 지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1991년을 기점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지가 하락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상업지에서 주택지로, 대도시에서 지방으로 번져 나갔다.


    버블기에는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 상업지의 가격 상승이 지방과 주택지의 가격 상승을 견인했는데, 버블이 붕괴될 때에도 대도시 상업지의 낙폭이 가장 컸다. 주가가 9개월 만에 절반 수준으로 하락한 것과는 달리 지가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1994년의 일이었다. 주가와 지가의 움직임의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베노믹스 실시 이후 주가가 명백한 상승 기조에 접어든 것과 달리, 지가는 도쿄 지역만 상승세를 보였다. 사실 도쿄와 일부 대도시권을 제외한다면 전국 상업지 및 주택지는 버블 이전인 1985년의 지가 수준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장기적인 집값 하락의 원인은 무엇일까? 버블 붕괴를 겪은 일본인들의 집단 트라우마는 집값 하락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도쿄대학 니시무라 기요히코 명예 교수는 부동산 버블 붕괴와 장기적인 집값 하락의 원인을 인구요인으로 설명했다. 니시무라 교수는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가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이어졌고, 앞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같은 동아시아 국가는 물론 미국도 고령화가 진전됨에 따라 주택 시장이 장기 침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집값 상승률만 생각해 봐도 니시무라 교수가 주장하는 인구 결정론이 예상에서 크게 빗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주택 가격 또한 인구 변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본의 생산 가능 인구는 1995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고, 총인구는 2008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부동산 버블 붕괴가 시작된 것은 1991년부터였다. 인구 감소가 시작되기도 전에 부동산 버블은 붕괴되기 시작한 셈이다.


    니시무라 교수의 예측이 빗나간 첫 번째 원인은 인구 변화보다 가구 수 변화에 주택 수요가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1993년 일본의 가구 수보다 2018년 가구 수는 30%나 증가했다. 1인 가구나 핵가족 세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구 수가 늘어났다면 주택 수요가 증가했을 테니 수요공급의 원리를 생각하면 당연히 주택 가격은 장기적으로 상승해야 하는데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원인인 부동산 정책이다.


    부동산만큼 정부 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는 재화는 없다. 1980년대 후반 주가와 지가가 천정부지로 뛰자, 일본 사회는 자산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당시 여론도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부는 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 금융권의 부동산 융자에 대한 상향선을 정한 이른바 총량 규제를 실시하면서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의 장기적인 하락 추세를 가져온 것은 총량 규제라는 수요 억제책이 아닌 신축 주택의 공급 폭탄이었다.


    공급의 규모는 이후에도 크게 줄지 않았다. 2000년대에는 매년 100~120만 호의 신축 주택이 공급되었고, 2010년대에는 약간 줄어들기는 했지만 매년 80~90만 호가 공급되면서 신축 주택의 증가 속도가 가구 수의 증가 속도를 웃돌았다. 물론 장기적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인구 감소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빈집이 늘어나고 있는 일본의 현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빈집이 문제가 되는 지역은 대도시의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 지방의 오래된 목조 가옥이다. 집이 남아도는 일본이지만, 도쿄나 오사카의 역세권 신축 아파트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는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탓에 우리나라에 없는 내진 설계가 잘된 집을 찾는 신축 수요도 존재한다. 결국 부동산 가격 안정화를 위해서는 시장이 깜짝 놀랄 수준의 공급 폭탄을 장기에 걸쳐 투하하는 방법밖에 없다. 재개발과 재건축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유력한 방법이다. 투기꾼 잡으려다 집 없는 서민을 울리는 정책이 반복되어서는 안되겠다.


    아베노믹스, 성공인가 실패인가?

    건강 문제로 총리직을 내려놓은 지 5년 만에 아베는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강력한 경제 정책을 표방하며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이른바 아베노믹스(Avenomics)의 탄생이다. 2012년 12월부터 제2차 아베 내각이 시작되었고, 아베노믹스라 불리는 장기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다양한 경제 정책들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견디지 못한 제4차 아베 내각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8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당초 아베노믹스의 정책 목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 2%, 명목성장률 3%, 실질 성장률 2%였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 2%에 관해서는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하면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목표를 확인하였고 2013년 6월 발표된 ‘일본재흥전략’에서는 명목 성장률 3%, 실질 성장률2%의 목표가 명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담한 금융 정책, 기동적인 재정 정책,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성장 전략이라고 하는 세 개의 화살이 제시되었다.


    결과적으로 아베노믹스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베노믹스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 2%, 명목 성장률 3%, 실질 성장률 2%와 2020년까지 명목 GDP600조 엔 달성을 당초 정책 목표로 삼았다. 결과부터 말해 이 모든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2012년 명목 GDP495조 엔은 2019년에는 554조 엔으로 늘어나 7년간 경제 규모는 12% 성장했지만 연간 평균 성장률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2013~2019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0.89%, 명목성장률은 1.61%, 실질 성장률은 0.85%로 각각 목표치의 50% 정도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명목 GDP600조 엔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치도 코로나19로 인해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면서 달성 시점인 2020년에는 오히려 526조 엔으로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아베노믹스는 단지 실패한 정책적 실험이었다고 평가해야 할까? 사실 아베노믹스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버블 붕괴 이후 한 세 개에 걸쳐 일본 경제의 체질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IT투자 붐 속에 일본만이 선진국 중 홀로 뒤쳐졌고, 생산성 저하와 자본 수익률 저하를 피해 기업들은 너도나도 해외로 진출했다. 환율과 수출의 관련성은 사라지고, 기업들은 환차익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해외에 재투자했다. 그 결과, 무역수지는 적자지만 소득 수지 흑자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30년 넘게 일본은 해외 순자산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아베노믹스라는 정책 실험을 통해 그동안 눈치 채지 못했던 일본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미래 일본 경제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미래의 일본을 어떻게 전망할 것인가?

    추격당하는 국가

    일본의 가계 저축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피추기의 일본의 문제가 과잉 저축이라면서, 왜 가계저축률은 감소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고령화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령층의 경우 저축률이 감소하고 있는 반면, 젊은 층에서는 저축률의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약간 상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령층 인구가 워낙 많고, 고령층에 편인하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다 보니 전체적인 가계 저축률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고령층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태어나 청장년기에 고도성장과 버블 경기를 경험한 세대이다. 이들은 젊은 시절에 여유로운 소비를 경험했고, 경쟁적인 소비지출을 통해 만족감을 느꼈으며, 충분한 저축을 할 수 있었다. 반면 현재 젊은 층은 과거 세대와는 달리 비관적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가성비를 따져 가며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더 늘리고 싶지만, 임금이 상승하지 않으니 뜻대로 저축이 늘지도 않는다. 장기 불황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끊임없이 가성비를 추구해 온 혐소비 세대이다. 이들은 막상 경기가 좋아져도 돈을 쓰기보다 불안한 노후를 위해 저축을 하려는 성향이 더 크다.


    디지털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 일본의 문제는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지적해 왔고 일본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2021년 9월에는 디지털청이라는 정부 기관을 신설하고 장관도 임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없던 디지털청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디지털화에 뒤쳐져 있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한 셈이다.


    언제부터 일본은 디지털 경쟁에서 낙오하기 시작한 것일까? 제1차와 제2차 산업 혁명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주요 국가 반열에 들어섰고, 80년 뒤인 1980년대 말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쓴 IT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일본만이 홀로 뒤처지기 시작했고, 결국 제3차 산업 혁명의 거대한 파도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하면서 디지털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90년대 이후 미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IT분야 투자에 따른 생산성 상승이었다. 반면 일본은 1990년대에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범용 기술의 도입이 늦어졌고, 이것이 결국 생산성 하락으로 연결되면서 장기 침체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될 제4차 산업 혁명에서 일본은 다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지금의 아프리카까지도 건너뛰기식 IT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 뭔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기존의 시스템을 교체하는 비용이 몇 배는 더 발생한다. 일본이 디지털 혁명에 성공하려면 아프리카보다 몇 배의 투자가 더 필요한 이유이다. 일본 기업들은 최근 30년 동안 국내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뒤처진 IT분야의 투자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일본 기업에게 돌아왔다. 디지털 혁명에 뒤처진 일본에서 토종 기업들의 설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일본 국민 10명 중 6명이 애플이 개발한 아이폰을 사용하고 , 토종 모바일 메신저 하나 없이 전 국민이 네이버가 개발한 LINE을 쓰고 있다.


    갈라파고스섬에는 최근 육지에서 들어온 쥐 때문에 다른 종들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갈라파고스의 고유종처럼 위기에 처한 일본 기업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1980년대 말에 구축된 팩스, 도장, 종이로 이루어진 레거시 시스템은 사실 1990년대의 IT투자로 소멸되었어야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한 세대가 지나도 처리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을 하루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제4차 산업 혁명의 파도에 올라타는 것은 꿈같은 얘기로 끝날 수 있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한일 관계 바라보기

    추락하는 일본 경제에 날개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경제의 성장 엔진이 멈추기 전에도 일본의 연평균 GDP성장률은 이미 미국과 유럽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는 휘청하던 일본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2020년 일본의 GDP는 12년 전 글로벌 금융 위기 이전 수준으로 주저앉았고, 정부의 부채 규모는 이제 더 이상의 재정 건전화 계획이 무의미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코로나19는 세계 각국의 디지털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각종 디지털 기술의 각축장이 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일본 국민들은 종이로 된 백신 접종권을 받기 위해 구청에 줄을 서서 도장을 찍어야 했다. 반면 한국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2021년 7월에 국제 연합 무역 개발 협의회(UNCTAD)에서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일이 있었다. UNCTAD가 특정 회원국의 위치를 변경한 것은 1964년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로 한국이 국제 기구를 통해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한일 간 역전된 지표도 등장했다. S&P, 무디스,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 평가 기관은 일본보다 한국의 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한 나머지 극단적 내셔널리즘으로 흐르거나 반대로 겸손이 너무 지나쳐 패배주의적 결론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어느 쪽이 되었던 ‘바람직한’ 한일 관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과연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목표를 어디에 두면 좋을까?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이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진국으로서 지금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은 더 이상 장기판의 말이 아닌 장기를 두는 입장에서 주변 강대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외교의 중심이었던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동남아는 물론이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대한 세계 전략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야 할 것이다.


    한일 양국의 경제협력의 가능성에서도 기업들의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 경제 협력의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럽과 유럽에 뿌리를 둔 지역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꼽히는 강대국이 바로 한국과 일본이라는 사실에 웅장함마저 느끼게 된다. 일본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같다. 반면 한국은 어른의 체격을 갖추었지만 아직은 덜 여문, 즉 경제력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그에 합당한 국제적 역할이나 위상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현재 기성세대의 머릿속에는 한일 두 선진국의 새로운 관계 설정의 해법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새 시대의 주역들이 엉킨 한일 관계를 풀어 갈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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