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너의 심장이 멈출 거라 말했다
 
지은이 : 클로에 윤
출판사 : 팩토리나인
출판일 : 2021년 12월




  • 심장병에 걸려, 살 수 있는 날이 100일밖에 남지 않은 ‘은제이’와 인생의 목표나 꿈 없이 살아가던 백수 ‘전세계’가 우연히 만나 100일의 계약을 맺고 〈버킷리스트〉를 함께 실행하게 된다. 계약금은 3억. ‘을’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게 될 경우 계약금의 3배를 토해내야 한다.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그녀의 버킷리스트는 ‘가진 것의 나눔’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들과 다른 그녀의 행동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 전세계. 살아가느라 바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지만, 죽어가느라 바쁜 그녀는 삶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심장병에 걸린 시한부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연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져만 가는데…



    어느 날, 너의 심장이 멈출 거라 말했다


    프롤로그 - 그녀가 죽기 전날

    우리 두 사람은 창밖을 향해 나란히 서서 그 해괴망측한 춤을 추었다. 내가 “자 봐봐.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시범을 보이자 그녀의 웃음소리가 병실 가득 메아리쳤다. 이 춤은 반한 여자 앞에서 출 만한 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아까 본 피범벅 동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다면, 그녀의 두려움과 공포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골반과 멋짐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다.


    공연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감탄이 터졌다. “와, 너 잘 춘다. 진짜 인버뤄-브뤠이트 같아.”


    일단 웃었다. 마이클 잭슨이나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의 칭찬으로 들었다. 인버뤄브뤠이트가 ‘무척추동물’이라는 영어 단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어쨌든 이 춤은 그런 의미였다. ‘매우 큰 충격’을 ‘더 큰 충격’으로 잊어버리게 만들려는 시도. 결과를 알 수 없기에 더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내일의 공포를 다른 식으로 잊는 방법을 확실히는 모른다. 다만 내일은 우리의 끝이 아니며 우리의 끝은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만 생각할 뿐이다.


    “그럼, 작별 인사를 해볼까?”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내 앞에 섰다. 나는 손을 뻗어 빙긋 웃는 그녀의 턱에 말라붙어 있는 귤껍질을 떼어주었다.


    벌써 일주일째 매일같이 작별 인사를 해왔다. “그동안 즐거웠어. 고마워. 안녕.”


    오늘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작별 인사였지만 인사를 끝내고 나면 언제나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것처럼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듣고 싶지만 듣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하거나 안달 날 것도 없었다. 그녀가 말을 아끼는 이유는 아마 우리에게 내일이 남아 있는 까닭이며 슬픔은 그보다 더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힘내.’라든가 ‘잘 될 거야.’라든가 ‘응원할게.’ 같은 말은 지금 내 기분을 조금도 전달할 수 없었다. 물에 빠진 각설탕처럼 내일이면 단물만 남긴 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매일 그녀의 흔적을 같은 방식으로 잡아두었다. 정수리에 손바닥을 올리는 방식.


    냄새는 음악처럼 순간을 기억한다. 그녀가 나의 시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정수리에 올렸던 손바닥을 코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밀려들어 온 체향(體香)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그녀를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첫 만남

    “제3조 임금. 계약과 동시에 계약금 3억 원을 지불하며, 10일 기준으로 300만 원씩 추가 지급….” 계약서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계약금 3억? 이 여자가 진짜 정신이 나갔나.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살며시 속눈썹을 들어 올리고 “왜? 돈이 적어?” 하고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300만 원을 껌값 취급한다면 이쪽에서도 그렇게 여길 작정이다.


    구겨진 계약서를 들고 마저 읽어 내려갔다. “제4조 근로 범위. 갑의 남자 친구 역할로서 연인 관계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함께한다. 단, 갑이 허락하지 않은 스킨십을 할 경우 계약 위반으로 처리….”


    또다시 읽는 걸 멈추고 앞에 앉은 여자를 빤히 보았다. 이 부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너 뭔가 잘 모르나 본데. 연인 관계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일이란 오직 스킨십밖에 없어. 스킨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은 연인 관계가 아니어도 할 수 있거든? 이거 계약 내용이 엉망진창인 거 알아?”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할 거야, 말 거야?”


    그 후로도 계약서는 온통 진흙탕이었다. 곳곳에 발이 빠져 매끄럽게 읽어나갈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근로 시간이 24시간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부분에서 다섯 번째로 읽는 것을 멈췄을 때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을사조약 이래 가장 불합리한 계약이었다. 휴일도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갑의 재량에 따른다는 부분까지 읽고 없다는 의미로 해석을 마쳤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마음 같아서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찢어버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일단 사인하면 계약금 3억 원, 열흘에 300만 원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본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비위 맞추기 까다로워 보이긴 해도 나는 전문가니까. 눈 딱 감고 100일만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이, 콜!”


    여자는 손때 하나 묻지 않은 명품 백에서 몽블랑 펜을 꺼냈다. 계약에 동의하면 사인하라는 말에 계약서 마지막 장을 마저 훑었다. “계약에 대한 일체 내용은 비밀을 유지한다. 을이 계약 내용을 위반하거나, 일방적 해지를 원할 경우 계약금을 세 배로 반환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제일 마지막에 인쇄된 글자가 아닌 손 글씨로 적힌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을이 갑에게 마음을 뺏기는 경우 계약은 해지되고, 계약금은 100% 반환한다.’


    흠칫 놀랐다. 야무진 글씨체를 보니 직접 쓴 것 같았다. 마지막 조항을 보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망설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계약서에 주저 없이 사인했다. 계약서를 받아 든 여자는 그제야 내 이름을 확인했다.


    녹여 먹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안에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제주도 가는 거 아니지?”

    “가고 있잖아, 지금.”

    “넌 무슨 제주도를 택시 타고 안국역 외치듯이 가냐? 겨우 손바닥만 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편의점에 껌 사러 가듯이 간다고?”

    “방어회만 먹고 올 건데, 뭐. 해외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방어회, 저기 보이지? 저 횟집에도 파는데 굳이 제주도까지 가서 먹을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아까 그 물고기가 바로 저 물고기야.”


    리무진은 횟집 앞을 유유히 지나쳤다. 그녀는 손으로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넌 모르는구나? 음식은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분위기가 더 중요한 거야. 예를 들어 와인을 마신다고 생각해 봐. 지하 주차장에서 종이컵에 마시는 거랑 야경이 끝내주는 스카이라운지에서 크리스털 잔에 마시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니? 난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게 아니야. 굳이 방어회가 아니어도 먹을 거라면 얼마든지 있지만,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건 ‘제주 바다가 보이는 횟집의 방어회’야. 알겠니? 이제 잔소리 말고 따라오도록.”


    ‘지하 주차장에서 어떤 미친놈이 와인을 마셔? 비유가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닌가?’ 체념한 나는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부터 빠르게 내려놓는 연습 중이다. 어차피 ‘갑’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떠들어 봤자 입만 아프다.


    ‘을’은 그녀의 캐시미어 머플러, 펜디 선글라스, 샤넬 코트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에 짐짝처럼 실렸다. 복도 건너, 주디라고 불리는 임은미 실장과 같이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깔깔거리며 떠드는 모습은 영락없이 소녀 같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이륙하는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추락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죽을 수 있겠지만 다가올 죽음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볼 땐 아무도 없었다.


    어딜 가도 개인 비서가 동행하니 단둘이 있을 일은 없겠다 싶은 생각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내가 왜 필요한 건가 싶기도 하고. 돈 받은 만큼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야 100일 뒤에 떳떳하게 3억 원을 쓸 수 있을 테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임 실장님, 잠시 자리 좀 바꿔주세요.” 임 실장은 기꺼이 나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옆자리에 앉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보는 그녀에게 적당히 핑계를 댔다.


    “300만 원짜리 운동화도 이렇게 팽개쳐 놓진 않아. 내 몸값이 얼만데. 3억짜리 남친 제대로 활용 안 할 거면 지금이라도 물리든가. 돈 돌려줄게.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네 말도 맞는 것 같아서. 너나 나나,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비행기가 추락해서 우리 둘이 동시에 죽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좀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드네.”


    역시 아무 말이나 했다. 그녀는 내 말에 야무지게 반박했다. “비행기 추락? 죽는 방법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신은 그런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하지 않아. 일단 오늘은 방어회를 먹을 예정이니까.”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를 단박에 꺾어버리는 그녀의 말에 어쩐지 약이 올랐다.


    “네가 신을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그 양반이 하는 일은 대체로 맥락 없이 전개되는 경우가 더 많아.”

    “신과 친한 척하는 거야?”

    “전혀.”

    “비극이 어째서 비극인 줄 알아? 주인공이 죽어서 비극인 게 아니라 죽는 방법이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인 거야.”

    “아름답게 죽는 방법도 있냐?”

    “원한을 품은 타인의 칼에 찔려 죽는 일은 대체로 비극이지. 아프잖아.”

    “총으로 자살하는 건?”

    “그것도 비극이지. 아프고 끔찍하니까.”

    “그럼 어떻게 죽어야 비극이 아닌 건데?”

    “고통 없는 죽음이 아름다운 죽음이야. 참을 수 있는 고통을 포함해서.”


    연인 사이라 하기에 우리의 대화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죽는 게 가장 ‘아름다운’ 혹은 ‘확실한’ 죽음 방법인가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얘기를 마치 본인의 전 남친 얘기인 양 떠들어 댔고 나는 그걸 구경했다.


    그녀와의 거리, 1미터

    내 휴대폰 화면에는 ‘갑’이라고 저장된 그녀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이후 벌서 이틀째 연락이 없었다. 통화 버튼에 손을 올렸다가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마시지도 않는 술잔을 앞에 놓고 달그락달그락 얼음을 굴렸다.


    여태껏 속이 울렁거릴 만큼 중요한 약속도 없었지만 지금 내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당장이라도 먼저 전화해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걸 참느라 팔다리가 쑤셨다. 그 새침한 얼굴이 왜 보고 싶은 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원인 모를 초조함에 현기증마저 나기 시작했을 때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펜트하우스에 들어선 나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어두운 집 안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불빛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스했다. 손목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수액은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들 사이에 장식품처럼 매달려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수액으로 장식한 그녀의 재치에 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이건 왜 꽂고 있어?”


    그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꺼내기 힘든 말을 꺼내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있지. 하루에 심장이 100만 번 뛰어. 남들보다 10배는 많이 뛰느라 이젠 지치고 힘든가 봐. 가끔은 뛰는 걸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면 죽지 않아?”

    “응, 그래서 곧 죽을 거라고 닥터 오가 어제도 말했어. 나 술 마셨다고 엄청 혼났어.”


    축 처진 그녀의 속눈썹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버렸다.


    예상치 못한 방문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에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는 교회를 보았다. 나는 늘 무심코 지나쳤던 동네 교회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성가대의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몇 시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축복하고 있었다. 빈자리 아무 데나 앉아서 두 손을 모았다. 태어나 처음 하는 기도였다.


    ‘제이 좀 살려주세요.’


    진짜 연인이 될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도 연애나 사랑 따위 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제이 옆에 있는 사람은 나고, 제이와 시간을 함께하는 것도 나였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처럼 서로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 된다. 갖고 싶다는 욕심은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내 것이 될 수 없지만, 나는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는 걸 확신했다.


    별이 떨어지는 순간

    제이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건 지난 새벽 3시 경, 연락이 온 건 아침 9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지난밤 제이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단 하루 만에 보란 듯이 내 기도를 걷어찼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본가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밥을 먹고 너무나 평범한 일상을 보냈는데,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같았다. 내가 간직한 제이의 마지막 이미지는 환하게 웃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던 모습이었다.


    50%의 확률

    엠파이어 호텔 1층 카페에 앉아 에이든을 기다렸다. 느닷없이 만나자고 전화한 에이든은 펜트하우스 게스트 룸에 묵고 있다고 했다. 질투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멈추고 생사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나는 거실의 기둥이나 화분이나 소파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에이든이 그녀의 옆에 있는 게 백번 나았다. 잠시 후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마주 앉아서 수다 떨 사이는 아니라서 대뜸 용건부터 물었다.


    “제이를 ... 설득해 주세요.”


    에이든의 이야기는 간략하게 이랬다. 제이가 열여섯 살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 당시 에이든은 열여덟이었다. 제이의 심장을 고쳐주고 싶어서 의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학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잠시 떠나야 했다. 미국의 유명한 의대에 합격했다. 현재 서울 의대에 편입해서 전공의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다. 미국에서 희귀 심장병을 연구하는 하워드 박사에게 제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워드 박사는 흔쾌히 제이의 수술을 집도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뇌사자 중 제이와 나이, 성별, 혈액 등이 일치하는 공여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제이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이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 상태로는 확률이 제로가 아닌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죽는다.


    “확률이 얼만데요?”

    “50%.”


    빠져 죽을 각오

    거실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하지만 나를 보지는 않았다. 추운 데 오래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왔더니 눈이 뜨겁고 몸에 힘이 없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 나 몹시 바빠.”


    나는 그녀의 옆얼굴에 대고 말했다.


    “수술을 받든지 말든지 네 인생이니까 네가 결정해. 더 이상 설득 안 해. 설득할 방법도, 이제 그럴 이유도 없고.”


    제이는 어떤 말에도 반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착각하지 마. 난 내 몸 걱정하기에도 벅차. 네 걱정 할 여유 따위 없어.”

    “그럼 왜 나를 밀어내는 건데? 버킷리스트 아직 남았잖아. 그것만이라도 같이 하게 해줘. 너 죽을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네 옆에 있을게.”

    “네 말대로 계약은 끝났어. 9억 입금해.”

    “9억 입금하면, 나 너 사랑해도 되냐?”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코끝이 붉었다.


    “끝까지 내 마음 숨기지 못해서 미안해.”


    작별 인사

    병실은 한쪽 벽 전체가 창이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는 시야에 아무것도 들이지 않고 하늘을 지칠 때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창을 향해 웅크린 작은 등과 어깨를 볼 수 있다는 건 나를 기쁘게 하는 동시에 슬프게 했다. 죽음을 앞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평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을 한꺼번에 맞는다는 것.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감정의 과녁이 된 것 같았다.


    “네가 다시 오는 바람에 작별 인사를 또 해야 하잖아.”


    투덜거리는 그녀를 무작정 안았다. 반쯤 누군 채로 나에게 안긴 그녀의 몸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앙상한 몸에서 달콤한 향기와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서 힘껏 안을 수조차 없었지만 공허한 가슴을 채우는 방법은 이것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내 팔 안에 갇혀 가슴을 밀어내는 두 주먹에는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럽고 가녀린 몸이 내 안에 스며드는 듯했다. 볼을 맞대고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볐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러고는 절절하게 그녀를 느꼈다. 그녀를 통해 나를 느꼈다. 겪어보니 그렇다. 사람은 밥만으론 살 수 없었다. 심전도를 측정하는 기계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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