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지은이 : 김정규 (지은이)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4년 01월




  •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상처, 사랑과 관계, 편견과 자책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와 중요한 의미에 대해 찾고자 합니다. 불안과 상처를 넘어 실제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안내합니다.


    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

    미국의 저명한 게슈탈트 치료자인 고든 휠러(Gordon Wheeler)에 따르면 지난 세기 동안 인간 의식에 네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진화론, 정신분석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게슈탈트 혁명이 그것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은 인간 이해에 대한 그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이전의 신학, 철학, 과학에서는 모두 인간은 신의 창조로 탄생한, 이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서 다른 동물들과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고 간주했는데, 진화론은 이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다른 동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오직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 이는 당시까지 믿었던 종교적/철학적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인류 정신사에 큰 충격을 가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도 인간 존재에 대한 이전의 믿음을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았다. 이전의 철학과 신학 그리고 과학이 인간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 보았다면, 정신분석학은 인간 의식은 아주 조그만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무의식의 영역이 있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지배한다는 입장으로 인간 존재를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와 존 왓슨(John Watson), 벌허스 스키너(Burrhus Skinner) 등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자극과 반응이라는 두 개념으로 단순화시켜 기계론적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인간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 정신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자극과 반응의 ‘우연적 연계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주어진 조건과 상황 변인만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며, 보상과 처벌로 얼마든지 사람들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화론과 정신분석 그리고 행동주의 심리학을 거치면서 인간은 마침내 자율적 의지를 지닌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기계로 전락하게 됐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외부 자극을 입력받아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출력이 가능한 기계가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대상(object)이 돼버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흐름에 맞서 독일의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와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칼 슈툼프(Carl Stumpf),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막스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 볼프강 쾰러(Wolfgang Kohler), 쿠르트 코프카(Kurt Koffka) 등의 현상학자와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주축이 됐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의 구조주의 심리학에 반대하며 이들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를 하는 정신을 가진 존재임을 밝혀냈다. 즉, 인간은 카메라처럼 외부 자극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조직화하고 해석하며 관계적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심리 치료 분야에 응용해 게슈탈트 치료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감각, 생각, 감정, 행동의 통합성을 강조했다. 현대 뇌 과학, 신경생물학, 생물사회학의 새로운 연구 결과에서는 게슈탈트 치료의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이 분야의 새로운 연구는 인간의 뇌는 컴퓨터가 아니며, 정서를 중심으로 방향성을 갖고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직화해 이해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불완전한 것들을 연결해 완전한 형태로 본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 방식은 기계와는 다르다. 인간은 사물이나 사태를 능동적으로 조직화해 구성함으로써 매우 창조적으로 인식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간은 기계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다. 즉,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도 과거 경험이나 현재 욕구 혹은 감정 상태에 따라 상황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복잡한 차도 위에서 폐지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할머니 한 분을 세 명의 행인이 보았다면 다음과 같이 각각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행인 1. “어쩌다가 노인네가 저 고생을 하시나? 안타깝다.”

    행인 2. “저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도 있구나. 참 대단하시다.”

    행인 3. “치매로 입원하신 엄마와 비슷한 연세인 것 같은데, 부럽다.”


    이처럼 할머니에 대한 세 명의 인식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맞고 틀린 것은 없다.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상황을 주관적으로 조직화하고 구성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세계 즉, 나의 세상을 창조해 낸 것이다.


    세 명의 행인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그 순간 서로 다른 나의 세상을 창조해 그 세상을 사는 것이다. 행인1이 다른 행인의 생각이 맞다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나머지 행인들도 다른 행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맞다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각자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했을 뿐이다.



    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느껴보는 실험

    니체가 “이해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라고 말한 진의는 “아예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함부로 이해했다고 속단하지 말고, 더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심리상담이 됐던 일상의 대화가 됐던,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이해하는 과정은 단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세상을 어떻게 몇 마디 말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참된 이해는 몇 줄의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과정이다.


    경외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너의 세상에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답하며 천천히 너를 알아가는 함께 걸어가는 여행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함께 놀라고,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또 어떤 때는 함께 기뻐하며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여정이다.


    이 여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 존재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다. 이해는 상대방의 행동이 맞다, 틀렸다, 잘했다, 못했다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의 세상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며 이끌림이다. 어린 시절 옆집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머리로 하기보다는 가슴으로 하는 것에 더 가깝다.


    이해는 다른 사람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해 그 사람의 세상을 그 사람의 배경에서, 그 사람의 눈으로 보고 경험하며 그 사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만나려는 무한한 열정(passion)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이며 사랑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렇게 이해받고 싶은 꿈이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신성함과 온전성을 믿기에 가능하다.



    당신은 인정받기 위해 태어났나?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서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나를 타인의 기준에 맞춤으로써 비로소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지금의 나를 변형시켜야만 가능해지는데, 내가 나를 깎거나 갈아서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일까?


    나의 존재를 바꾼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를 바꾼다는 것은 이분법적인 발상이다. 즉, 이는 나를 개조하는 행위자로서의 나와 개조 대상인 나를 둘로 나눠서 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거니와, 만일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바뀐 내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과 더불어 그 행위를 수행한 주체로서의 나는 그만 사라지는지, 아니면 여전히 살아남는지,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등의 의문이 생긴다.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없는 인정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아보자. 모두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직장에서, 모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노력하며 산다. 우리의 마음에는 현재의 나로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더 노력해서 지금보다 나은 그리고 남들보다 나은 내가 돼야만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은 이처럼 매일매일 끝없는 자기 부정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성취 중심으로 살다 보면 현재는 부정당하고, 미래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래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세계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절대로 올 수가 없다.


    삶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내사

    개체는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소화하고 동화시킴으로써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이때 개체는 그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공격성을 사용해서 그 구조를 파괴해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사용하는데, 게슈탈트 치료의 창시자 프리츠 펄스(Fritz Perls)는 이를 치아 공격성이라고 불렀다.


    이는 음식물 섭취 행동에서 전형적으로 관찰할 수 있지만, 개체와 환경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컨대, 건강한 개체는 부모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주장이나 가치관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지 따져보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치아 공격성을 사용해 그것들을 파괴해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변형시켜 동화하거나 해로운 것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고 뱉어버린다.


    그런데 환경으로부터 이러한 공격성 사용이 제지당하면 권위자의 주장이나 가치관이 걸러지지 않고 내부로 들어와 개체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내사(introjection)라고 부른다. 내사에는 ‘착해야 해’ ‘순종해야 해’ ‘모범이 돼야 해’ ‘성공해야 해’ ‘성실해야 해’ ‘튀면 안 돼’ ‘얕보이지 마’ ‘남을 믿지 마’ ‘약한 모습 보이지 마’ ‘남한테 지면 안 돼’ 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개체는 내사로 말미암아 고정된 부적응적 행동 패턴을 개발하고,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행동을 한다. 그렇게 되면 매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다양한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내사된 규칙과 도덕적 명령에 따라 그것이 자기 삶인 줄 착각하고 살아간다. 또 이물질을 파괴하고 동화하는 데 사용해야 할 공격성이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자신을 파괴하거나, 혹은 외부로 투사돼 편집증적 공포심을 갖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내사가 심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 채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사는 데 익숙해 있다. 그들은 대개 모범생으로 윗사람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삶의 목표를 정해 창의적인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들의 행동은 피상적이고 깊은 대인관계를 맺지 못하며, 타인의 기대에 따른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지 생각해 거기에 맞는 연극을 하며 산다.


    이들의 행동은 조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하다. 천천히 씹으며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보다 타인의 것을 그냥 받아 삼키는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 판단해 선택하고 책임지기보다는 권위 있는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 대신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더 의식하면서 행동한다.


    그들은 대체로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은 받지만, 내면세계는 미해결 과제로 인해 분열돼 있다. 즉, 내사된 도덕적 명령과 이에 반발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서로 싸우는 이른바 자기 고문 게임에 빠지거나 혹은 내사된 것을 타인에게 투사하고서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내사는 자신과 타인 간의 경계가 불명확해지면서 내면의 분열과 함께 부적응을 초래한다.


    나와 타인의 진실을 왜곡하는 투사

    내사가 개인의 내면에 형성된 행동규범이나 가치관 같은 것이라면, 투사(projection)는 생각이나 욕구 또는 감정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것으로 잘못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자기가 타인에 대해 분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상대방이 자기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거나, 자기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타인이 자기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이다.


    개체가 투사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는 것보다 고통을 덜 받기 때문이다. 즉, 개체가 자신 속의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을 부정해 버리고, 그것을 타인의 것으로 돌려버림으로써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사는 내사의 영향에 의해 생긴다. 즉, 개체에 내사된 가치관이나 도덕적 규범이 특정한 욕구나 감정 혹은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이를 타인의 것으로 지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타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는 것이 내사의 영향으로 도덕적 차원에서 용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인관계 갈등은 흔히 자신의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나타난다. 말하자면, 우리는 악을 자신의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편하므로 타인을 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과 대립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에 대해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심리에도 투사가 개입돼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이지만 내사된 가치관 때문에 억압하고 있는데, 이 행동을 타인이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억압된 충동이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것으로 느껴져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사 자체가 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투사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심리를 근거로 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투사를 모르고 있을 때 발생한다. 즉, 자신의 악을 타인에게 투사해 싸우거나, 자신의 잠재력과 창조적인 힘을 타인에게 투사해서 스스로 소외될 때 생긴다.


    투사는 정치, 종교, 도덕,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인간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종교 현상에서 나타나는 투사의 문제는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관심 대상이었는데, 니체가 대표적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을 억압하고, 이를 외부의 대상에 투사해 악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싸운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된 부분을 우리의 내면에 있는 야수(das innere Vieh) 혹은 그림자(Schatten)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야수’ 혹은 ‘그림자’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서 야성을 뜻하는데, 이는 바로 인간 삶의 원동력이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원이라고 했다.



    감정의 두 얼굴

    감정은 마치 전자제품에 장착된 센서에 비유할 수 있다.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전자기기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듯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예컨대, 타인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인관계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안 될 뿐 아니라,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또는 정신/신체 증상을 겪을 수도 있다.


    표면 감정과 심층 감정

    우리의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 감정과 그 아래에 있는 심층 감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우리가 비교적 쉽게 인식할 수 있으나 후자는 억압되거나 차단돼 자각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으로 알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표면 감정인데, 심층 감정은 그 아래에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 감정은 대체로 우리가 어느 정도 허용하는 감정이지만, 심층 감정은 용납하기 힘든 감정이 많다. 어떤 감정이 표면 감정이 되고, 어떤 감정이 심층 감정이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두려운 감정의 표현은 괜찮지만 분노 감정은 위험하다고 느끼며,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분노 감정은 괜찮지만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표면 감정과 심층 감정은 서로 일치할 때도 있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둘이 일치할 때는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불일치할 경우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갈등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감정을 물으면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린다거나 표정이 굳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층 감정인 두려움이나 분노, 수치심 등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우라 하겠다.


    이처럼 표면 감정과 심층 감정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부정적인 심층 감정을 소외시켜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과는 물론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이 일어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므로 심리상담 등 특별한 계기가 없이 저절로 변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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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