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말리는 마케팅 전쟁 이야기

Marketing Mistakes and Successes

   
로버트 F. 하틀리(역자: 김민주·송희령)
ǻ
아인앤컴퍼니
   
245000
2004�� 06��



■ 책 소개
마케팅 분야의 대가인 로버트 F. 하틀리클리블랜드 주립대학 교수의 저서로, 1976년 초판이 나온 이래 2004년 신판(9판)이 나오기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사례를 분석·발표해 온마케팅 분야의 대표적인 역작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메트라이프 등 세계 30여 일류 기업들의 마케팅 성공과 실패 사례를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분석한 후, 실패나 성공의 원인과 배울 수 있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세계 일류 기업들의 마케팅 실수 및 성공담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발견할 수 있다. 첫째, 가장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기업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둘째, 실수를 하고 난 후, 그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어미래에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갑자기 닥친 재앙과 같은 위기로 기업이 일시 후퇴할 수 있지만, 어떠한 위기도 극복할 수있다. 


각 장의 맨 마지막 부분에 다양한 강의 활용 도구를 제공하고 있어 실무자뿐 아니라 마케팅을공부하는 학생들도 전쟁을 방불케 하는 비즈니스 마케팅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실제 비즈니스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함정을 피하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로버트 F. 하틀리
마케팅 분야의 대가인저자는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수많은 마케팅 및 경영 분야의 책들을 저술했다. 저서로 『Business Ethics:Violations of the Public Trust』『Business Ethics : Mistakes and Successes』 『SalesManagement』『Essentials of Marketing Research』『Retailing, Challenge, andOpportunity』『Marketing : management and social change』『Marketing Successes,Historical to Present Day: What We Can Learn』『Bull"s eyes and Blunders: Storiesof Business Success and Failure』 등이 있다.


■ 역자 
김민주
 -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시카고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마케팅 컨설팅회사인 (주)리드앤리더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대기업과 대학교에서 마케팅 강의를 하고 있으며각종 매체에 활발한 기고를 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마케팅 어드벤처』『레드 마케팅』『디마케팅』이 있으며, 역서로는 『공익 마케팅』이있다.


송희령 - 이화여대 불문과와 외대 동시통역대학원 영불과를졸업한 후 10년 동안 많은 경제관련 분야 회의에서 동시통역사 및 번역사로 일했다. (주)리드앤리더의 웹사이트(www.emars.co.krsize=2>)에서 해외 비즈니스 서적 서평과 사례분석 칼럼니스트로 활동중이다. 


■ 차례
머리말
1. 서언 


PART I 마케팅 전쟁 
2. PC 전쟁_ 델 컴퓨터vs. 게이트웨이 
3. 콜라 전쟁_ 펩시콜라 vs. 코카콜라 
4. 항공기 전쟁_ 보잉 vs. 에어버스 
5. 운동화 전쟁_리복 vs. 나이키 


PART II 위대한 컴백 
6. 구사일생으로 회생한컨티넨털항공 
7. 도태의 위기에서 살아난 공룡, IBM 
8. 마침내 돌아온 할리 데이비슨 


PART III 실패한 위기관리 
9. 무리한구조조정으로 실패한 선빔 
10. 무심한 위기관리와 책임회피로 야기된 재앙, 파이어스톤/포드 
11. 위기 과잉 대처로 문제에 봉착한페리에 
12. 훼손된 이미지 복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유나이티드 웨이 


PART IV 마케팅 실수 사례 
13. 영국에서벌어진 대 판촉 실수, 메이택 
14. 비틀거리는 거인, 맥도날드 
15. 시장 진입을 과신한 유로 디즈니 
16. 브랜드들을고사시킨 보덴 
17. 잘못된 기업 인수, 스내플 
18. 매장 공간 확보를 위한 일보 후퇴, 뉴웰 러버메이드 


PART V 마케팅 성공 사례 
19. 최소한의마케팅으로 거둔 대성공, 뱅가드 
20. 우리 가격을 한번 따라 잡아봐, 사우스웨스트항공 
21. 누가 그들을 멈추게 하랴!월마트 


PART VI 비윤리적 경영이 몰고 온 위기 
22.고객을 우롱한 사기 판매, 메트라이프 
23. 가격 담합, 정치적 연줄, 그리고 내부 고발자, ADM 


24. 결론


감사의 글
주석




피말리는 마케팅 전쟁 이야기


운동화 전쟁, 리복 vs. 나이키
리복 연혁

리복의 역사는 조셉 윌리엄 포스터가 자신이 신을 목적으로 스파이크 달린 러닝슈즈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1890년대에 시작된다. 1958년, 창업자의 손자들 중 2명이 함께 회사를 설립했는데, 아프리카 영양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리복(Reebok)이라고 지었다. 이 회사는 후에 원조 회사인 J. W. 포스터 앤 선즈를 흡수, 통합한다.


1979년, 야외 스포츠용품 유통업체를 운영하던 폴 파이어맨은 국제무역박람회에서 리복의 운동화들을 보았다. 그는 리복과의 협상 끝에 북미 판매권을 따내어 그해에 미국에 3종류의 러닝슈즈를 소개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깅 붐이 한창인 때였다. 그 러닝슈즈들은 최고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요는 폭증했고, 생산 시설을 추가로 설립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1981년에 리복의 판매액은 150만 달러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은 그 다음해에 왔다. 리복은 여성만을 위한 스포츠화를 처음으로 개발했는데, 그것은 프리스타일이라는 에어로빅용 운동화였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선견지명이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리복은 운동화 산업의 다가올 3대 트렌드를 정확히 예측했다. ① 대대적인 에어로빅 붐, ② 스포츠 및 헬스에 관한 여성들의 관심 증가, ③ 선수용 운동화가 길가로 나와 캐주얼화되는 현상. 판매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87년, 미국 운동화 시장에서 리복의 점유율은 처음으로 최고의 라이벌인 나이키를 앞서게 되었다. 그러나 리복의 판매는 그 후 서서히 감소하여 나이키는 다시 선두자리를 되찾게 된다. 나이키는 광고에 큰돈을 쏟아 부으며 마케팅을 강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금을 들여 마이클 조던과 피트 샘프래스 같은 거물급 운동선수들을 후원하며 이미지를 관리했다. 이와는 반대로 리복은 경영 방침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1992년 8월, 전문 경영인을 내세워 일선에서 물러났던 파이어맨은 회사로 돌아와 즉시 경영진을 개편했고, 동시에 리복의 과거의 영화와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는 공격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처음 공격한 분야는 나이키의 농구화 분야였다. 1994년 NBA 올스타전에 맞추어 리복은 새로 개발한 인스타펌프를 출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며 나이키에게 압력을 가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1994년에는 하이킹과 등산용품 시장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리복은 정상의 자리에 다시 오를 수가 없었다. 리복은 UBU, Physics behind Physique 등의 여러 광고 슬로건을 내세우며 공략을 강화했지만, 어떤 슬로건도 나이키의 Just Do It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 파이어맨은 이제 모든 테마를 통합하여 단 하나의 테마인 Planet Reebok을 간판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선수 후원을 통한 홍보강화 전략을 채택했다. 과거 리복은 특정 선수에게 천문학적인 후원금을 쏟아 붓는 것은 비합리적인 생각이라며 나이키를 따라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던 리복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1992년에 샤킬 오닐과 3백만 달러 후원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리복은 수백 명의 축구, 야구, 미식축구 선수들과 후원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파이어맨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 실패로 끝이 났다. 실패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샤킬 오닐이 모델로 등장한 샤크 어택이라는 운동화는 십대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까만 운동화와 맞지 않았고 가격이 130달러나 되어 십대가 구입하기에는 부담이었다. 1995년 들어 운영비가 32.7%로 상승했다. 리복은 경비 증가 요인이 주로 운동선수들과 대형 스포츠 행사의 후원금 증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고정 유통망 확보를 위한 투자와 멤피스공장 건설로 인한 투자 또한 경비 증가의 요인이었다.


리복이 안고 있던 또 다른 문제는 잦은 경영진의 교체와 사임으로 인한 경영 혼란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미연방거래위원회가 리복이 가격 조작을 했다는 혐의를 조사하고 나선 것이다. 리복에게는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대형 소매점과의 문제, 즉 스포츠화 전문 대형 소매업체인 풋로커(Foot Locker)와의 불화였다.


1995년경, 울워스가 경영하는 풋로커는 2,800개의 매장을 거느리며 미국에서 제일 큰 스포츠화 소매 체인으로 부상했다. 풋로커의 이러한 실력을 인정한 나이키는 이 거대 유통업체와 성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대형 스포츠화 매장에서 리복의 판매가 현격히 떨어진 이유는 리복의 최고 경영진에서 이 소매 체인점과의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이어맨은 풋로커와 거래를 시작할 때부터 이 유통업체의 요구를 무시했다. 나중에 뒤늦게 풋로커의 중요성을 깨달은 파이어맨이 풋로커와의 관계 회복에 나섰으나 1995년 말까지 양측 관계를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풋로커의 주요 고객들이 주로 십대와 X-세대로, 이들이 원하는 가격은 80~90달러 선이었지만 리복의 신발은 상류층을 겨냥한 고가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리복은 풋로커 측에 제때에 샘플을 제공해 주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풋로커는 시즌에 앞서서 구매 결정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샘플이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아예 샘플이 도착하지 않는 경우, 그 제품에 대해서는 대량으로 구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이키 연혁
1964년, 육상선수인 필 나이트와 그의 코치였던 바우어맨은 의기투합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나이트의 장인 집 지하에 신발을 갖다놓고 팔았다. 그러던 중 나이트와 바우어맨은 1972년, 신발을 직접 개발하여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이 만들어낼 신발의 브랜드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나이키’로 지었다.


1975년 바우어맨은 와플을 굽는 틀에 우레탄고무를 부어서 구워보았다. 그리고 당시 시판되던 운동화 바닥보다 훨씬 탄력 있는 울퉁불퉁한 와플 모양의 바닥을 고안해 냈다. 이 획기적인 품질 개선은 나이키가 날 수 있는 결정적인 날개가 되었고, 1976년에 나이키의 판매는 1,400만 달러로 증가했다. 나이키는 그 후 실력을 발휘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연구 개발에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투자한 결과 나이키는 140종류가 넘는 신발 모델을 내놓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가장 혁신적이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신발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1981년이 되자 나이키는 전체 시장의 50% 정도를 점유하며 육상화 시장을 리드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 후반, 나이키는 갑자기 불어 닥친 에어로빅 신발 붐에 편승하지 못해 리복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그 후 리복으로부터 시장주도권을 다시 탈환하기는 했지만 나이키는 1993년까지만 해도 여유 있는 승자로 보이지 않았다. 나이키가 예상보다 큰 성장을 보이지 않자, 월가에서는 “도대체 전 세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운동화는 몇 켤레나 될까?”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필 나이트는 운동화 시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이키의 신화는 샌들에서 하이킹부츠에 이르는 야외용 스포츠화, 대학 축구팀과 야구팀이 입는 각종 유니폼을 비롯한 스포츠 의류, 나아가 골프 의류 및 장비까지, 얼마든 다른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답변했다. 1995년 말에 이르러서는 나이키의 판매는 리복보다 38%나 앞서게 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서는 그 차이가 213%로 벌어졌다. 2000년 즈음 몇 년간 나이키의 이미지 재고에 가장 공헌한 인물은 바로 타이거 우즈였다.


1996년 여름, 나이키는 미국의 다른 제조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생산 환경이 열악한, 소위 ‘스웨트숍(sweatshops)’이라고 불리는 후진국의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후진국에서 생산한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나이키에게 1997년 4월, 이미지를 망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천국의 문(Heavens Gate)’이라는 사이비 종교 신도 37명이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옷을 입고 집단자살을 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들 외에도 사업 환경의 악화가 나이키를 괴롭혔다. 깊은 경기 침체로 인해서 아시아의 수요가 현격히 감소했다. 또한 일반 대중이 운동선수들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서 나이트 회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고민했다. “나이키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은 아닌가? 이제는 소비자들의 관심이 없어질 정도로 나이키의 로고가 너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나이키의 유명한 슬로건 Just Do It이 이제는 비생산적인 문구가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이키는 답변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슬로건 “I Can”이 광고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나이키는 자사의 편지지나 공식 문서, 그리고 광고에서 나이키 특유의 로고를 빼고 그냥 작은 소문자로 “nike”라고 쓰기 시작했다.


최종 결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 한 번의 성공이 영원한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어떤 기업이 시장에서 정상의 자리를 누릴지라도 그 월계관을 영원히 쓰고 있을 수는 없다.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작은 기업들이 맹렬하게 공격을 해오는 경우, 아무리 성공한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그 입지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 아디다스는 맥없이 신예 나이키에게 추격을 당했으며, 많은 외국 브랜드들(맥주, 시계, 자동차 등)이 미국 브랜드가 보여주지 못하던 매력을 보여주며 소비자들을 유혹하자 미국 브랜드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나이키도 한때는 아디다스와 같은 신세였다.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에어로빅과 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을 이해하지 못해 리복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주었던 뼈아픈 경험이 있는 것이다.


?주요 고객과의 관계를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업은 항상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대형 고객들의 경우,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나이키나 리복에게 똑같은 고객이었던 풋로커와의 관계를 보면, 대(對)고객관계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소매 체인을 보유한 고객이 도를 넘는 듯한 요구를 해오는 경우, 기업의 선택은 그 요구를 들어주거나 아니면 사업의 일부 또는 전체를 잃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적대관계에 놓이고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상황을 방치하지 말고 평소에 협력적이고 상호이익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에게 이미지의 힘을 크다
이제는 러닝슈즈 간 기술 격차가 줄어들어 특정 브랜드의 신발을 신는다는 것이 경기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나이키 신발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이키를 다른 브랜드와 차별시키는 나이키의 로고와 그 로고가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유명인을 후원해서 얻는 이익이 한계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유명한 운동선수들은 엄청난 후원금을 요구한다. 그런데 과연 그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이들에게 있는 것일까? 물론 극히 일부에 한해, 특히 최고 중의 최고 선수들에 한해서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 우즈처럼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 할지라도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유명 선수에 대한 지나친 후원은 재정적으로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다가 후원했던 선수가 부상이라도 입거나 이미지가 손상되거나 선수로서 뛸 수 없을 정도로 큰 스캔들에 휘말리는 경우, 기업은 재정적인 손실과 더불어 이미지의 손실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위험을 안아야 한다.


?유능한 리더는 성공의 열쇠일까?
나이키의 회생은 필 나이트의 능력에서, 리복의 쇠퇴는 폴 파이어맨의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렇다면 기업의 성공은 순전히 리더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가? 대부분의 경우 경영진의 능력은 기업마다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들은 비전도 있고, 조직 내에서 지지도 받고 있으며, 합리적인 판단력도 갖추고 있고, 성격도 신중한 편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점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할 줄 알고 경쟁 기업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광고 슬로건을 개발하는 능력?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지만, 기업의 경영자들을 성공한 인물과 실패한 인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이다.


우리는 필 나이트의 성공 사례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어쨌든 그는 장수 브랜드 아디다스를 격파했고, 나이키를 세계 최고의 신발 회사로 만들었다. 그는 한 번 밀렸다가 다시 도전하여 나이키를 마켓 리더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경영자로서 그가 파이어맨보다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만일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나이키는 현재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필 나이트가 확실히 나이키를 차별화시켰다는 것이다. 분명 한 사람 때문에 기업 전체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 지도자들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성공한 지도자의 경우에는 좋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고, 거기에 운이 좀 따라주는 것,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영국에서 벌어진 대 판촉 실수, 메이택
역사적인 대실수

1992년 8월, 메이택의 영국 자회사인 후버(Hoover Limited)는 “영국에서 1993년 1월 말까지 후버의 상품을 100파운드어치 이상 구입한 모든 고객에게 유럽 어느 국가로든 왕복 비행기표 2장씩을 제공하겠다”는 판촉 행사 내용을 발표했다. 또한 후버의 상품을 250파운드 이상 구입하는 고객에 대해서는 뉴욕이나 플로리다주 올랜도행 왕복 비행기표 2장씩을 제공하겠다는 공약도 했다. 이 발표가 있자마자 말 그대로 후버 상품 구입전쟁이 벌어졌다. 후버 가전제품 매장에 있던 진공청소기는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고, 일주일에 3일만 청소기를 생산했던 스코틀랜드 캠퍼스랭 공장은 일주일 내내 근로자들에게 초과근무수당을 지불해 가며 24시간 가동했다. 그야말로 놀라운 판촉 효과였다! 문제는 기쁨에 넘쳐야 할 후버의 간부들이 불행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판촉 행사를 준비하면서 후버측은 이 광고를 보며 후버의 가전제품을 구입할 고객들의 수가 5만 명이 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후버의 가전제품을 구입했으며, 이들이 모두 무료 여행권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에 관한 서류를 정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고, 그 다음해 4월까지 겨우 6천 명의 고객만이 비행기를 제공받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객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후버가 사기를 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돈을 돌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미국 메이택 본사에서는 대고객관리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팀을 영국에 파견했다. 잘못 계산된 이 판촉 행사는 메이택에게 큰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 판촉 행사로 인한 비용은 5,000만 달러가 넘었고, 이는 영국 후버사 총매출의 10%나 되는 거액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메이택이 4년 전에 인수한 영국 자회사 후버는 불행하게도 채 순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판촉 행사가 메이택과 후버의 대고객관계 및 이미지 개선에 있어 획기적인 효과가 있었다면, 회사측으로서는 들어가는 돈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객들의 흥분과 실망이 커지면서 메이택과 후버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지고, 회사의 재정 부담도 커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메이택은 후버 유럽본부 사장을 포함한 영국 후버 중역 3명을 즉시 해고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된 의문은 메이택 본사에 수천만 달러의 부담을 줄 수 있는 행사를 자회사가 어떻게 본사의 허락도 없이 진행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혹시 본사의 경영진에서 그 야심 찬 계획을 사전에 알고 승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사 대변인은 실제로 현지 사업본부가 판촉 행사를 기획하는데 “일차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답변을 했다. 본사가 승인을 하지만, “본사는 기준만 정해 놓을 뿐 세부사항은 모두 현지 자회사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메이택 연혁
메이택은 역사가 100년이 넘는 전통 깊은 회사다. 1893년에 설립된 후 오랫동안 메이택은 최고 품질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판매한다는 명성을 누려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서 메이택은 세탁기 시장의 15%를 계속 점유하고 있었고, 수익에 있어서는 경쟁사들의 몇 배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다니엘 J. 크럼이 재직하던 기간 동안 가전제품 시장은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합병 마니아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달라졌다. 인수합병 사냥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보수적인 기업인들은 기업의 부채를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진공청소기와 기타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인 시카고 퍼시픽(CPC)이 14억 달러에 나오자 사냥꾼들을 피하기 위해 크럼은 그 회사를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그 결과 메이택은 5억 달러의 부채 부담을 새롭게 지게 되었고, 해외 시장 진출은 확대하면서 합병 사냥꾼들로부터 메이택을 보호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CPC는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되는 후버 청소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메이택으로서는 유럽에 진출하고 싶기는 하지만, 후버를 인수한다고 해서 유럽 시장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보장은 사실 없었다. 후버가 영국과 호주에서는 잘 알려진 브랜드이기는 했지만 유럽 전체를 통틀어 볼 때는 별로 잘 알려진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메이택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가전 메이커인 스웨덴의 일렉트로룩스, 독일의 보슈-지맨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메를로니 그룹과도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미국의 GM은 이미 조인트 벤처 형태로 유럽 시장에 진출해 있었다. 이 외에도 유럽 소비자들은 유난히 자국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편이어서 메이택이 후버를 인수한다고 해도 비용이 많이 드는 대대적인 판촉전을 벌이지 않고서는 유럽 시장에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한 실정이었다.


후버의 유럽 매출 중 절반 정도는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메이택이 후버를 인수하려던 당시 후버는 극도로 적은 순익을 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결국 메이택이 후버를 인수하고 난 후, 후버는 손실을 내고 말았다. 특히 당시는 유럽이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시기라 메이택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게다가 1993년의 경우 앞서 언급한 판촉 행사로 인해서 메이택은 큰 손실을 내고 말았다.


메이택이 그 전에 실시한 기업 인수도 실패로 판명이 나고 있었다. 매직쉐프나 애드머럴의 경우 저가 가전 시장으로의 사업 다각화를 노리고 인수를 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메이택의 대차대조표나 현금흐름 상황은 훨씬 불안해지기만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 내 최고 가전 메이커라는 이미지가 저가 시장을 공략함으로써 무너졌다는 것이다. 메이택이 이렇게 저가 시장으로 다각화를 모색하는 동안 GM과 월풀은 고가 시장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결과 메이택은 결국 이들 가전사의 뒤를 이어 3~4위를 차지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최종 결론
?결정은 완벽한 분석 후에 내려야 한다
상품과 해외 시장 확대를 목적으로 메이택은 1989년에 시카고 퍼시픽을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것은 지나치게 큰 비용이었고, 이로 인한 부채 부담은 메이택의 발목을 잡았다. 메이택의 CEO였던 레너드 헤이들리는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다양한 사업에 투자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수의 타이밍과 가격에 문제가 있어 후에 너무 무거운 부채 부담을 안고 가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업을 확장하려는 야심과 기업 대차대조표의 부채 부담을 늘려 기업 인수 사냥꾼의 표적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설명만으로는 경영상의 실수를 합리화할 수 없다. 그런 잘못된 결정의 후유증으로 인해 회사가 두고두고 시달렸다면, 그리하여 결국 막대한 손실만 입고 다시 팔아넘겨야 했다면, 그것은 절대 합리화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는 설령 이로 인해 기업 인수가 무산된다고 해도 완벽하고 상세하게 분석을 해야 하고, 지나치게 장밋빛 예측에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해외 자회사에 지나친 자율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기업 경영에 있어 상명하달식 업무 전달방식보다는 아래에서 위로 의견이 올라오는 방식이 직원들의 동기 유발이나 관리 개발면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수준이면 문제가 된다. 해외 현지 자회사나 사업부 책임자들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결정권을 갖고 현지 회사를 자신들의 왕국처럼 운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본사 경영진의 권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 방임형 경영은 공동의 기준이나 목표에 일관성이 사라져, 본사와 자회사 혹은 해외 사업부 간의 결속을 해치는 사태를 유발한다. 그리고 잘못하면 도덕적 해이 현상도 유발될 수 있다.


사실 해외에 위치한 회사의 경영진에게 얼마나 많은 자율권을 주어야 하는지 그 선을 명확하게 긋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수 이전의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메이택의 경우 영국 소재 회사인 후버를 인수했을 당시, 이 회사는 이미 막대한 손실을 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메이택 본사의 경영진은 현지 회사에 많은 자율권을 주기보다는 다른 기업보다 더 강력한 통제와 관리를 했어야 했다.


?결정을 내릴 때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운동선수에게든 사업가에게든, 아니면 일반 개인에게 있어서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자부심,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기업이든 개인이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으며, 성급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판촉 제안을 소비자들이 그렇게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매력적인 제안에 대해서 소비자들의 귀가 솔깃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태도가 아닐까?


?로스 리더(loss leader) 상품은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로스 리더 상품이란, 저가로 판매로 상품을 많이 판매하면 할수록 기업의 손해가 커지는 상품을 일컫는다. 손해를 무릅쓰고 이런 판매를 단행하는 유일한 목적은 이런 판촉으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어 정상적인 제품의 판매를 늘려 결국 기업의 수익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로스 리더 상품을 미끼로 하여 판촉을 하는 방식은 잘못하면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로스 리더를 미끼로 던질 때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매장에 있는 다른 상품들도 다 팔아치우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한다. 그렇게 되면 일단 전략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후버의 경우 이를 뒷받침해 줄 상품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이 많이 팔릴수록 손해가 커진 것이다. 후버의 경우 판촉 상품을 최초 100명, 또는 최초 1,000명, 아니면 첫 일주일 동안 구입한 고객 등으로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발적인 상품 판매가 엄청난 손실로 이어진 것이다.


?중대한 결정 이전에는 비용/수익 분석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경우, 기업 경영진은 비용과 그 비용의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수익과의 관계를 꼭 분석해 보아야 한다. 특별한 전략 과정별로 투입되는 비용과 얻을 수 있는 효과를 표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수익이 적게 나올 것 같으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비용과 수익 관계를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 혹시 결정상 실수도 있을 수 있고, 이익이 불투명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대안도 찾을 수 있고, 여러 결과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특히 각별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다방면으로 직원들이나 간부들의 의견을 들어보아 더 세밀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누가 그들을 멈추게 하라! 월마트
월마트의 성장

할인매장이 소매점의 새로운 유행으로 부상할 것으로 생각한 샘 월튼과 그의 동생은 1962년 아칸소 주 로저스에 ‘디스카운트시티’라는 할인점을 열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아칸소 주 해리슨에 2호점을 개점했다. 월튼 형제는 1969년에 이 사업을 월마트 스토어(Wal-Mart Stores)란 이름으로 법인으로 전환하고 일 년 후에 주식을 공모했다. 1970년에 월튼은 처음으로 유통센터와 총괄 지휘본부를 아칸소 주 벤톤빌 7만 2,000평방피트 면적에 건설했다. 그리고 1972년에 월마트는 뉴욕 증시에 상장되었다.


1976년, 그의 유통 매장은 이제 아칸소 주뿐만 아니라 미주리 주, 캔사스 주, 그리고 오클라호마 주의 작은 도시들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월튼은 전통적인 경영 정신으로 사업체들을 운영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매장들뿐만 아니라 경쟁업체들의 매장들도 다 돌아보는 한편, 대량 구매를 함에 있어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 항상 찾으려고 노력했다.


백화점, 페니나 시어스 같은 대형 유통 체인들, 그리고 K마트 같은 대형 할인점과의 직접 경쟁을 피하기 위해 월튼은 그런 대형 유통업체들이 잠재성이 없다고 기피하는 작은 도시나 마을에 할인점을 세웠다. 그는 이 작은 시장들을 어떤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달려들려 하지 않는 전략적 기회의 창구로 보았다.


월마트의 발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그리하여 1975년 말 매장 수는 104개로, 직원 수는 6천 명 정도로 늘었으며, 매출도 2억 3,600만 달러로 증가했고, 순익은 6백만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월마트는 드디어 K마트를 제치고 최대 소매 유통업체로 부상했다. 1990년 말 월마트의 매장 수는 35개 주에 걸쳐서 1,573개로 증가했다.


월튼은 새로운 개념의 매장인 월마트 슈퍼센터를 개장했는데, 기존의 월마트 매장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이 매장은 기존의 할인매장과 창고 스타일의 식료품 아울렛 매장을 접목시킨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반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식품들을 판매하는 이 매장은 작은 도시의 경쟁자들이 따라올 수 없게 다양한 종류의 식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일반상품 할인매장과 식품 창고매장이 접목되지 사람들은 정신없이 몰려들었다.


월마트는 이 외에도 또 다른 카테고리 매장인 셈스홀세일(Sams Wholesale, 이하 샘스클럽)을 개점했다. 1984년에 처음 개장한 이 매장은 1991년에는 그 수가 148개로 증가했다. 이 클럽 매장은 일부 지역에서 정상적인 할인매장이 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월튼이 새롭게 시도한 것인데, 이 매장은 도매 개념을 적용하여 기존의 할인매장보다 할인폭이 훨씬 더 컸다. 면적이 13만 5,00평방피트나 되는 대형 매장이었던 샘스클럽은 회원제로 운영되었는데, 회원 자격은 사업자들이나 공무원, 신용조합 회원 등 특정 그룹으로 제한했다. 비록 매장은 기존 매장보다 훨씬 컸지만 판매하는 상품의 아이템은 일반 할인매장에서 파는 다양한 상품 구색의 5%도 채 되지 않았다. 샘스클럽 매장에서는 가정용 제품이나 유명 메이커 의류 등을 판매했는데, 판매 가격은 일반 할인점이나 백화점, 그리고 전문점보다 8~10% 더 저렴했다. 샘스클럽은 월마트가 그동안 진출하기를 꺼려왔던 대도시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샘 월튼 사망 후 55세의 데이비드 글래스가 사장 겸 CEO 자리에 올랐다. 글래스는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경영 스타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월마트는 이제 미국 대도시, 그리고 전 세계로 진출했는데, 세대교체가 되었어도 여전히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고 사업에 성공하고 있다. 1995년에 매출은 820억 달러에 이르렀고, 그해 월마트보다 높은 매출을 보인 회사는 단 세 개, GM, 포드, 그리고 엑슨뿐이었다. 2001년 월마트는 드디어 엑슨모빌을 끌어내고 최고로 큰 기업으로 등극했다. 월마트의 과거 경쟁사들은 2002년에 가서는 한참 뒤에서 헐떡이며 월마트를 쫓아오고 있었다. 1990년 이전 유통업계를 지배하던 기업은 바로 K마트였는데, 이제 파산해서 법정관리 상태에 있고, 생존이 위태롭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비하여 월마트는 국제화를 가속화시키는 의미에서 영국 대형 슈퍼체인의 하나인 아스다 그룹 PLC를 인수했다. 미국에서도 할인식료품 매장인 슈퍼센터를 여기저기 확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월마트가 운영하는 소형 매장인 네이버후드 마켓도 이곳저곳으로 확대하고 있다. 네이버후드 마켓은 편의점과 슈퍼센터의 갭을 메우기 위해서 고안한 매장이다. 월마트는 이 외에도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소형 저축은행을 인수했는데, 이는 수표, 신용카드, 대출 서비스 등에 있어 저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월마트의 해외시장 진출은 파죽지세로 진행되었다. 월마트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의 대형 두 라이벌 유통업체는 160억 달러 규모의 합병을 했는데, 아무리 합병을 했다고 해도 이 프랑스 회사의 규모는 월마트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가장 전쟁이 치열한 곳은 바로 독일인데, 독일에는 벌써 월마트가 95개나 진출해 있다. 독일의 경쟁 유통업체들을 월마트보다 더 늦게까지 문을 열고 고객 서비스를 개선하며 월마트와 싸우고 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월마트는 한 가격으로 대량 구매하여 전 세계 매장에 공급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월마트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구매, 신규 매장 개장, 마케팅에 있어 미국 내 영업, 그리고 해외 시장에서의 영업을 통합 관리하는 제도도 채택하고 있다.


최종 결론
?사람들을 잘 챙겨야 성공할 수 있다
샘 월튼은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직원과 고객에게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직원들에게 항상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어야 고객들에 대한 올바른 서비스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사업체의 규모가 커지다 보면 특히 인간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이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월튼은 사업의 규모가 커져도 본인이 지니고 있던 인간 중시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


직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직원들의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직원들을 격려하고, 직원들과 기업의 이익을 공유하면서 월튼은 다른 대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가족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직원들의 고객에 대한 친절한 태도 외에도 월마트는 저렴하고도 다양한 물건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했으며, 많은 미국 중산층의 관심사인 환경 문제 및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섰다.


?전략적 기회의 창구를 찾아야 한다
전략적 기회의 창구는 보통 사람들은 잘 찾지 못하는 성공으로 가는 비밀의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월마트가 시골 도시 위주로 경영을 할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월마트가 그렇게 넓은 시장을 개척하여 오늘날처럼 대성장을 하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작은 시골 마을이나 소도시들은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인구도 줄고 있었고, 경쟁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런 문제의 큰 원인은 바로 농업 인력의 감소와 규모가 작은 지역 상권 발전의 한계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대형 할인점들은 대도시 지역 시장 개척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도시에도 J. C. 페니나 시어스 매장뿐만 아니라 울워스, 갬블, 그리고 코우스트 투 코우스트 매장들이 있기는 했지만, 한결같이 매장 규모가 작고 시설도 오래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 소형 매장들은 본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품의 종류는 많지 않았고, 가격은 비싸기만 했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월튼은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본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기회를 보았다. 그렇게 시장의 발전가능성에 한계가 있다고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에, 경쟁이 거의 전무할 것이라고 월튼은 생각한 것이다. 그는 매장이 들어가는 도시나 마을의 규모가 비록 작아도 그 주변의 유동 인구는 많다는 사실을 감안했다. 사실 시골 마을에 떨어져 있는 월마트의 매장에는 수마일 떨어진 이웃 마을 주민들도 쇼핑을 온다.


?전통적 사고와 첨단기술을 결합시킨 참신한 경영 방법
월튼은 월마트 조직 전체에 전통적인 사고와 첨단기술을 결합시킨 신구 복합 경영 전략을 도입했고, 기업의 규모가 확대되어도 이 전략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통신 장비나 유통 관리용 컴퓨터는 최첨단 시설을 이용했지만, 월튼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나 고객 서비스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면을 중시하는 전통적 사고를 고집했다. 이런 태도는 사실 대부분의 대형 유통업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다른 기업들은 월마트의 가족적인 분위기와 첨단기술을 병행하는 전략을 부러워하고 이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실, 따라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환경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환경은 보호되어야 하고,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떠들기는 하지만, 실제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기업은 당연히 고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대고객관계가 개선될 수밖에 없다. 획기적으로 개선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매스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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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많은 미국인들은 해외의 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해 옴에 따라 미국 제조업체들이 파산을 하고 많은 실업자가 발생한다는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 자체가 자유무역의 주창자이지만, 미국의 중산층들은 월마트가 미국산 제품을 구입하자는 캠페인을 벌일 때 월마트의 이런 리더십을 극찬했다. 소비자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업들은 무엇보다 일반 대중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살핀 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 서야 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