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천재

   
고명섭
ǻ
인물과사상사
   
16000
2007�� 07��



>■ 책 소개
한겨레신문 문화부기자이자,『담론의 발견』의 지은이기도 한 고명섭이 인간의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을 정치적 풍경, 문학적 풍경, 철학적 풍경으로 나누어 탐사한책.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차예프,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등의 인물을 다룬다. 지은이는한계상황에서 자신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려 했던 사람들, 불행한 의식을 견딜 수 없어 끝 모를 모험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의속성인 ‘광기’와 ‘천재’를 실마리로 하여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인간의 열정적 내면 풍경을 들여다본다.


책 제목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명한 저작『천재와 광기』에서 따온 것이지만, 지은이도 밝히고있듯,『천재와 광기』와는 달리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이 "천재와 광기" 그 자체였다고 지은이는 강조하지 않는다. 부러 주장하지 않고,탐색하면서 그 속살을 보이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며, 그 미덕 덕택에 읽는 이들은 각자가 받아들이는 만큼의 인간의 욕망과 절망의 모습을 이 책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고명섭
서울대 경제학과를졸업하였으며, "한겨레" 영화, 연극, 미디어 담당, 출판 담당 기자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읽기』,『담론의 발견 -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 시집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 알을 삼키다』가있다.


■&>차례
머리말
‘불행한 의식’의 모험과 투쟁


1부 정치적 풍경
아돌프 히틀러 - 원한의심리학, 파멸의 정치학
세르게이 네차예프 - 음모와 복수의 교리문답
조제프 푸셰 - 가장 과격한기회주의


2부 문학적 풍경 
장 - 자크 루소 -감수성의 혁명, 상상력의 저주
나쓰메 소세키 - 신경쇠약의 정치학
프란츠 카프카 - 존재의 감옥, 변신의욕망


3부 철학적 풍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 순수의 열정
마르틴 하이데거 - 실존의 검투사, 존재의 파수꾼
미셸 푸코 - 한없이 자유에 가까운광기





광기와 천재


정치적 풍경

아돌프 히틀러 - 원한의 심리학, 파멸의 정치학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에게 삶은 위대한 공포였다.


■ 폭군 아버지와 도전하는 아들

히틀러는 누군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까 봐 두려워했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원을 캐낼까 봐 두려워했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에 맞붙은 오스트리아의 인 강 기슭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끔찍이도 가난하게 자랐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 한 뒤 그는 오스트리아의수도 빈으로 가 구두제조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머리 좋고 야심이 컸던 알로이스는 얼마 뒤 세관공무원이 되었고,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승진을 거듭해 마지막에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 번째 결혼한 클라라 푈츨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돌프를 낳기 전에 이미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어린 아돌프를 몹시 애지중지 키웠다. 그 뒤 아돌프의 남동생 에드문트와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지만, 에드문트는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초등학교 시절 아돌프는 우수한 학생의 완벽한 전형이었다. 성적표는 항상 최고 점수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시절 최우수 학생이었던 히틀러는 실업학교 1학년 때 낙제해 진급을 하지 못했다. 영재가 한순간에 백치가 된 것만 같았다. 히틀러는 뒷날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가 자기를 관리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저항하느라 공부를 팽개쳤다고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처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히틀러의 아버지는 출세의지만큼이나 강한 지배의식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압제적일 경우 자식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오이디푸스 시기를 순조롭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압도적인 두려움 때문에 의식 깊숙이 가라앉고 일종의 죄의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제 시작된 악순환은 아버지의 매질과 자식의 반항으로 더욱 나쁜 방향으로 흘렀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자세가 나타났다. 둘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다다랐던 1903년 알로히스 히틀러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했다. 히틀러의 내면에는 무성한 죄의식의 숲이 펼쳐졌고, 허약한 자신을 경멸하는 자기 부정의 나무들이 들어섰으며, 폭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공포의 안개가 흘렀다. 1905년 히틀러는 폐결핵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실업학교 4학년을 겨우 끝낸 상태에서 그대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폐결핵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 삶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몽상가

열여섯 살 히틀러는 린츠의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환상의 세계를 더듬었다.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화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속한 비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속박 없는 멋진 삶으로 상승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최선의 길이었다. 1907년 가을 그는 아픈 어머니를 뒤로 하고 수도 빈으로 떠났다.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2차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성공해서 돌아가리라는 결심은 한순간 물거품이 됐다. 미술아카데미 교장은 그에게 그림보다는 건축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1908년 2월 히틀러는 다시 한 번 미술아카데미에 도전하려고 빈으로 갔다. 그해 9월 시험에서 그는 또다시 낙방했다. 두 번 낙방이면 재응시할 자격도 없다. 그는 환멸의 쓴 눈물을 삼켰다. 동경은 원한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중에 징집 영장이 나왔다. 그는 어떻게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그 시절 히틀러의 삶에 모범이 있었다면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경우였다. 바그너가 젊은 시절의 좌절과 비참함을 딛고 위대한 명성을 얻었듯이 히틀러도 언젠가는 화가나 건축가로서 높다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거의 환상에 가까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


■ 두려워 혐오스러운 유대인

이 시기에 히틀러의 관심은 압도적으로 예술에 기울어 있었지만, 이 세기말 빈의 정치적 공기에 그의 머리도 서서히 물들어갔다. 반유대주의라는 공기였다. 이 늙은 제국의 수도 빈은 여러 민족 구성원들의 집합처이자 경쟁장이었다. 그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맹렬한 성취욕과 교육열로 독일계가 장악한 경제/사회/문화의 핵심으로 질주했다. 이들은 고학력 직업에서 눈부시게 성공했고, 언론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금융산업과 토착산업에까지 점령할 듯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유대인에게 추월당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 나아가 증오심을 느꼈다. 히틀러가 빈에 머물던 시절 유대인 문제는 커다란 정치적 쟁점이었고 반유대주의는 일종의 유행어였다.


■ 히틀러를 구원한 전장의 한계체험

1913년 5월 스물네 살의 히틀러는 자신에게 환멸과 좌절만 안겨준 빈을 떠나 독일 남부의 뮌헨으로 갔다. "빈은 가장 괴로운 인생의 학교였다. 나는 반쯤 어린아이였을 때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냉정하고 진지한 인간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시기의 자신을 반쯤은 운명의 주인이 된 듯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운명에 쫓기는 우울한 존재였다. 아마도 병역기피가 뮌헨으로 간 일차적 이유였던 것 같다. 히틀러는 독일 정신이 퇴락한 오스트리아제국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 시기에 확고한 게르만 민족주의자, 반오스트리아적 독일 민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 ��선동가 히틀러 탄생��

1919년 9월 히틀러는 생긴지 1년 이 채 안 된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조그만 뮌헨 지역당의 토론 행사에 참여했다. 선전부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지겨운 토론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히틀러는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바이에른을 독일제국에서 분리해 오스트리아와 통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벌떡 일어서 그 주장을 사정없이 반박했다. 토론회가 끝난 뒤 당의 창설자인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1884~1942)가 다가와 그에게 『나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소책자를 주었다. 며칠 후 그는 독일노동자당에 가입되었다는 내용의 엽서와 당원증을 받았다. 반쯤의 당혹감과 반쯤의 호기심을 안고 그는 아주 허름한 음식점에서 열린 당위원회 모임에 참석했다. 그것은 당이라기보다는 비밀결사와 초저녁 맥주모임의 혼합체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 습성 그대로 히틀러는 가입이냐, 거절이냐 문제로 며칠 동안이나 평정을 잃었다.


히틀러는 쉰 다섯 번째로 독일노동자당의 당원이 되었다. 당에 가입하자마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선전 담당 일을 맡았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그는 끊임없이 일을 만들었다. 조용한 토론모임 같았던 당은 갑자기 솟아난 활력으로 술렁거렸다. 1919년 10월 16일 당은 새입당자의 의견을 따라 최초의 공식 집회를 열었다. 111명이 참석한 이날 저녁 집회에서 히틀러는 두 번째 연사로 연설했다. 연설이 끝날 무렵 작은 맥주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전기가 오르는 듯 흥분했다.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일이 현실을 통해 입증되었다.


■ 지도자의 탄생

입당한지 다섯 달 만에 히틀러는 최초의 대중집회를 열었다. 당은 벌써 히틀러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갔다. 뮌헨 맥주홀에서 열린 제 1회 대중집회는 2000여명을 헤아리는 청중을 불러모았다. 홀 안의 상당수는 공산주의자를 비롯해 집회를 방해하려는 세력이었다. 히틀러는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은 청중의 감정을 고양시켰고, 선동가의 자기 상승으로 이어졌다. 연설이 끝났을 때  "내 앞에는 새로운 확신, 새로운 신념, 새로운 의지로 결합된 사람들로 가득찬 홀이 있었다."


이날 독일노동자당은 25개조 강령을 발표했다. 모든 독일인을 대독일로 통합하고,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며, 유대인을 독일 민족에서 배제하고, 모든 부당이익을 몰수하며, 대기업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분배한다는 것을 강령은 포함했다. 비록 히틀러 자신이 직접 만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날 발표된 강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 Arbeiterpartei : NSDAP)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 당은 약칭으로 나치(Nazi)라고 불렸다.


히틀러의 무기는 말이었다. 그의 모든 힘은 말에서 나왔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결코 거위 깃털 펜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종교적/정치적 방법으로 위대한 역사적 격변을 일으킨 힘은 영원한 말의 마력뿐이다." 히틀러에게 이념이란 단지 몇 개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므로, 언제나 그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전의 기술과 대중의 동원이었다.


■ 정치의 미학화, 정치의 연극화

히틀러가 원한 것은 단순한 독재, 단순한 권력이 아니었다. 1934년 8월 마침내 늙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대통령 권한까지 넘겨받았다. 1인 지배 총통국가가 완성됐다. 외교상으로도 그는 치밀하고 과감한 행보로 자신의 보폭을 넓혔다. 그의 명성은 나라 밖으로도 널리 퍼졌다. 히틀러를 만났던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도 그의 논리와 명징성, 정신적 능력에 경탄했다.


■ 지그프리트의 최후

1938년 히틀러는 신중한 평화주의자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열차시간표 맨 앞에 쓴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단행했다. 3월 12일 히틀러는 독일 국경을 넘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들어가 곧바로 린츠에 입성했다. 이어 10월에는 독일계 주민 350만 명이 거주하는 체코 수데텐 지역이 독일에 통합됐다. 이듬해 3월 히틀러는 체코의 본토마저 병합시켰다. 히틀러의 시간표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더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히틀러의 뜻을 완강히 거부했다. 사태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대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초조감에 쫓긴 히틀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 뒤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로 선전포고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듬 해 5월 히틀러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치고 곧바로 프랑스를 향해 진격했다. 모든 것이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진격전이었다. 한 달 만에 파리가 무너졌다. 6월 24일 히틀러는 정복자로서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을 통과했다.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한 달 전 영국의 새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1874~1965)은 취임 연설에서 자신은 이 나라에 "피와 고난과 눈물과 땀밖에는 제공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처칠의 등장은 유럽에 작은 희망의 신호였다. 처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확고한 결심을 의회에서 밝혔다. 히틀러는 다시 한 번 타협책을 찾았으나 완고한 영국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히틀러의 시간표를 따르면 마지막 열차가 떠나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 침공 명령을 내렸다. 더 큰 모험, 더 큰 위험, 더 큰 공포에 뛰어드는 것만이 자기 내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라도 하는 양 그는 마지막 도박에 절망적으로 판돈을 걸었다.


이 전쟁은 히틀러가 망상 속에서 그렸던 거대 생존공간 확보 전쟁이자 공산주의에 대한 세계관의 전쟁이었다. 모든 유대인, 모든 아시아 소수민족, 모든 공산당 간부, 모든 집시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야수의 냉혹함으로, 또 얼마 뒤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기계적 정확성으로 특수부대는 이 인간 살육 작전을 수행했다. 믿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가 계속됐다. 그러나 초기의 진격전은 시간이 갈수록 둔탁해졌다. 예정보다 두 달이나 지체된 10월 2일 마침내 모스크바 공격이 시작됐다. 곧 찬비가 내리고 얼음이 얼더니 매서운 북극의 추위가 닥쳐왔다. 월동 준비가 안 된 독일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소련의 붉은군대가 반격에 나섰다. 그 무렵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는 전쟁의 전환점을 이루는 사상 최악의 격전지가 되었다. 전략적 거점이자 스탈린이라는 이름으로 두 나라에 모두 심리적 거점이기도 했던 이 도시를 두고 독일과 러시아는 총력전을 치렀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던 독일군이 항복함으로써 전세는 일순간에 소련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동부와 서부 모든 전선에서 독일군의 위축이 두드러졌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1907~1944)대령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다. 히틀러는 경미한 상처만 입었을 뿐 무사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사건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다시 한 번 섭리의 개입과 구원의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구원은 오지 않았다.


1945년 4월 16일 소련은 250만 병사로 베를린 공략에 나섰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망가진 폐허의 도시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는 죽음을 결심했다. 그는 최근에 벙커로 온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Eva Braun/1912~1945)과 결혼식을 올렸다. 4월 30일 오후 히틀러는 부인이 된 에바 브라운과 벙커 안에서 자살했다. 유사 이래 가장 광포한 상상력을 정치 현실에서 펼쳤던 인간,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세계를 열광시키고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인간, 아돌프 히틀러의 출현과 몰락으로 인류는 끔찍하고도 아득한 새로운 체험의 지평 위에 놓였다.



문학적 풍경

프란츠 카프카 - 존재의 감옥, 변신의 욕망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는 오스트리아제국의 건실한 시민이었다. 고속 승진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유능한 관리였다. 키 182센티미터의 늘씬한 몸을 깔끔한 복장으로 감싼 멋있는 청년이었다. 친절함과 관대함을 잃지 않는 예의바른 신사였다. 그의 외모 어디에서도 카프카적인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반듯한 남자의 내면에 그토록 어둡고 불길한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나면 산책을 하고 카페를 찾고 벗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그는 항상 가슴속에 벌받을까봐 무서워 훌쩍거리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성년의 숲을 두려움에 떨며 방황하는 미성년이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면 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그 아이를 불러냈다. 그리하여 20세기 문학을 상당 부분 규정지은 유례없는 이미지들이 어둠의 정적 속에서 태어났다.


커다란 유충이 되어 자기 방에서 말라죽는 그레고어 잠자(『변신』), 물에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순순히 집행하는 아들(『선고』),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체포되는 요제프 K(『소송』),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해 제자리걸음만 하는 토지측량사(『성』)……. 그의 모든 작품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는 자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입구를 찾지 못한다. 아무 데도 막힌 곳이 없는데 그 어디에도 뚫린 곳이 없다. 보이지 않는 족쇄, 보이지 않는 창살, 보이지 않는 담장에 그는 갇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악몽이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에게 할당된 삶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이 타고난 작가의 운명이었다.


■ 죄의식, 카프카 문학의 기저음

카프카는 1883년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를 받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옛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는 보헤미안적인 삶의 영원한 고향이었다. 자유와 낭만과 예술과 모험의 동의어였다. 그는 이동이 없었고 변화가 없었고 삶의 행로를 뒤바꾼 결정적인 만남이나 체험도 없었다. 요컨대 보헤미안적인 것과 카프카의 삶은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그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했지만 목숨의 끈이 끊어지기 얼마 전 잠시 베를린에 머문 것, 그리고 병든 몸을 추스르러 몇 차례 시골로 요양을 떠난 것 말고는 평생 프라하의 구시가지 반경 500미터 조그만 원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카프카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체코의 벽촌에서 가난한 푸줏간집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상경해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다. 어머니의 집안은 프라하에서 오래 전 기반을 닦은 여유로운 부르주아계급에 속했다. 당시 프라하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이 상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독일어를 쓰는 이 상층세계로 진입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고, 끝내 그 목표를 이루었다. 카프카가 독일어 학교를 다닌 것은 아버지의 이 상승의지에 따른 자연스런 과정이었지만, 나중에 그 아들이 독일어로 작품을 쓰고 독일 현대문학의 가장 중요한 장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 의지의 예기치 못한 결과였다.


카프카의 죄의식은 유별난 것이었다. 죄의식이야말로 카프카 문학의 기저음이었고, 카프카 정신의 감시자였다. 이 불행한 의식의 기원 가운데 하나가 어린 카프카의 가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야심만만한 젊은 가장 첫째 아들이었던 카프카에게 얼마 안 지나 차례로 남동생 둘이 생겼다. 그러나 둘째가 두 살에, 그리고 셋째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음으로써 카프카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 뒤로 여동생 셋이 몇 살 터울로 태어났지만, 남동생 둘이 잇따라 죽은 사건은 어린 큰아들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아버지를 향한 극단적 애증

카프카의 죄의식을 더욱 깊게 한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모계의 피를 짙게 이어받아 예민하고 섬약했던 카프카의 성격적 특징은 아버지와이 관계를 더욱 힘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심판자였고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지배자였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자였다. 아버지의 압도적인 권위에 짓눌린 자식은 어떻게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아버지의 권좌에 다가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권자가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있을 때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희구할 뿐 그것을 향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카프카는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외부세계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후퇴했다. 그 고립과 유폐의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자기만의 세계 안에 갇힌 소년 카프카는 책읽기와 글쓰기에서 출구를 찾았다.


■ 문학, 영혼의 양식

1901년 가을 열여덟 살의 카프카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 시기 카프카의 관심 영역은 온통 문학이었다. 그것은 그시대 젊은 지식인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도 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유일무이한 존재 이유였고, 아버지라는 힘에 압도당한 삶을 구출하는데 쓰일 단 하나의 수단이었다. 문학청년 카프카는 다른 문청(文靑)들처럼 카페를 드나들었다. 카프카는 관찰자였다. 그는 카페의 열띤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고 그 모든 광경을 거리를 두고 살폈다. 그 심리적 거리에서 카프카 문학의 독특한 문제가 탄생했다. 그는 그 시절 프라하 독일어 문학을 뒤덮고 있던 화려하고 퇴폐적이고 가식적인 표현법을 자신의 글에서 걷어 내버렸다.


프라하의 독일어는 말하자면 언어의 섬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체코어에 둘러싸여 고립되었던 프라하 독일어는 민중의 생활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풍부하지 못했고, 책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문어체 중심이었다. 간결하고 냉정하고 무심한 그의 문체는 세계를 투명하게 묘사했다. 대학생 카프카에게 훨씬 더 중요했던 건 독서였다. 이미 청소년기에 시작된 그의 독서 편력은 대학에 들어간 뒤 더욱 광범해지고 더욱 광포해졌다. 카프카에게 독서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각성제였다.


■ 문학 세계의 지하생활자

카프카 문학의 주제는 아버지였다. 프라하는 아버지의 확대판이었다.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아버지를 떠나지 못했듯이 카프카는 프라하를 혐오하면서도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글쓰기는 오직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에 대항해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서 멀리 벗어나면 그의 문학은 그대로 존재의 근거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문학은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었다. 문학인의 삶과 직장인의 삶을 함께했다는 것은 카프카만이 선택한 예외적 삶은 아니었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그는 문학과 직업을 완벽하게 분리하려 했다. 문학은 현실 세계와 완전히 절연된 곳에서 고독하고도 엄숙하게 존재해야 했다.


■ 자기학대와 자기처벌

카프카는 결혼을 하고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룸으로써 독립적 존재,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혼함으로써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내부에서 끝없이 증오하고 대결하고 투쟁했던 아버지의 삶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이 결벽주의자의 정신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카프카의 무의식에 들어앉은 근친상간 망상은 결혼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발목을 구체적으로 붙들어맸다. 카프카에게 결혼한다는 것은 배우자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이미지로 먼저 다가왔는데, 그런 이미지가 곧바로 근친상간 망상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랑하는 여성은 어머니를 대신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카프카의 무의식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으로 그의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해 여성을 처음부터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최고의, 최상의 자리로 올려 놓았던 것이다.


■ 폐결핵이라는 해방구

문학으로 구현된 이 변신 욕망은 현실의 카프카에게서는 육식 거부 또는 음식 거부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기 자신의 몸을 돌보는 식사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은 그가 자기 삶의 현실로부터 후퇴하고 싶다는, 자신의 살아 있음 자체로부터 퇴각하고 싶다는 욕망의 지배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그의 거식증은 아주 긴 기간에 걸쳐 감행한 자살 행위이기도 했다. 1917년 8월 카프카는 한밤중에 피를 토했다. 폐결핵이었다. 결핵을 앓는 폐는 그에게는 부실한 작은 해방구였다. 그 해방구 안에서 그는 문학을 향한 사그라질 줄 모르는 열정을 최후까지 태웠다.


1920년 카프카는 밀레나 예젠스카라는 젊은 유부녀를 만나 마지막 불꽃 같은 열정을 느끼면서 행복한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는 듯도 했다. 밀레나는 그가 평생 만났던 여성들 가운데서 그의 문학을 이해해주고 찬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1922년 한 해 동안 카프카는 병든 몸으로 최후의 장편 『성』을 써나갔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이듬해 여름 카프카는 북해 연안으로 요양을 갔다. 거기서 스무 살 도라 디아만트(Dora Diamant)를 만났다. 그해 9월 그는 도라와 베를린으로 갔다. 마흔살이 되어서야 그는 아버지의 집과 결별했고 프라하라는 이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났다. 베를린은 카프카에게 자유의 도시였지만 겨울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난방도 안 되고 음식도 부족한 을씨년스런 자유의 공간에서 그의 폐는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1924년 6월 3일 카프카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주검은 프라하에 묻혔다.



철학적 풍경

미셸 푸코 - 한없이 자유에 가까운 광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는 배덕자였다. 근대 서구가 수백년 동안 쌓아 올린 도덕의 신전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어떤 도덕도 도덕적이지 않음을, 설교대 뒤에 어두운 야심이, 지배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폭로한 사람이었다. 그는 배교자였다. 서양 정신이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믿음의 세계를 조롱하고 더럽히고 거꾸러뜨린 사람이었다.


■ 광기와 천재사이

푸코의 개인사는 엘리트가 갖춰야 할 조건을 거의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1926년 푸코가 태어났을 때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복한 부르주아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가업을 이어받았다면, 뒷날의 푸코는 없었을 것이다. 예정된 삶의 경로는 벗어나게 만든 것은 아버지와의 불화였다. 푸코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세계를 증오했다. 그는 역사를 좋아했고 문학에 심취했다.


1946년 가을 파리고등사범의 교정에 스무 살 신입생 푸코는 첫발을 내디뎠다. 파리고등사범에 입학했다는 것은 출세로 가는 고속열차 표를 얻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러나 이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푸코는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현기증 나는 속도에 실려 그의 내부에서 으르렁거리던 야수의 기질이 기어 나왔다. 아픈 짐승처럼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도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사방에 공격성을 드러냈다. 고등사범 학생들은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밴 이들이었다. 푸코는 그런 행태를 볼 때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 니체의 발견, 고고학과 계보학

고등사범을 졸업한 푸코는 1951년 교수자격 시험을 통과했다. 이어 그해 가을부터 모교인 고등사범의 강사가 됐고, 이듬해부터는 릴 대학에도 강의를 나갔다. 1953년 푸코는 최초의 작품 『정신병과 인격』을 펴냈다. 『정신병과 인격』을 쓰던 그해에 푸코는 니체의 저작과 조우했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거슬러 그 기원을 탐색함으로써 당대의 선악 관념이 아무런 정당성도 설득력도 없음을 밝혔다. 이 후퇴 없는 사유의 전사에게서 그는 자신의 튼튼한 연구의 무기인 고고학과 계보학을 끄집어냈다. 고고학적 발굴이 깊어질수록 성격이 다른 문명들이 켜켜이 드러나듯이 지식의 고고학은 시대마다 사고를 결정짓는 규칙들의 질서가 번번이 다름을 알려준다. 그런가하면 계보학은 진리로 행사하는 담론과 숙명처럼 강요되는 제도를 그 기원에까지 추적해 들어감으로써 그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이익에, 누군가의 권력에 봉사하는 것일 뿐, 결코 진리도 숙명도 아님을 폭로한다.


■『광기의 역사-』의 탄생

고전주의 시대에 정상이 비정상을 배제하고 격리하고 감금하고 추방함으로써 비정상을 광기로 규정하고, 이 규정을 통해 역으로 정상 자신을 규정했음을 푸코의 논문은 입장해간다. 정상은 울타리 밖으로 광기를 쫓아내고 지워버림으로써 자신의 승리를 얻어냈다. 승리한 정상은 이제 광기로 규정된 비정상을 심판한다.


■ 아침빵처럼 팔려나간 『말과 사물』

박사학위를 얻은 푸코는 1962년 클레르몽 - 페랑 대학 철학과의 정식교수로 승진했다.『광기의 역사』가 출간되고 5년이 지난 뒤 푸코의 이름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은 곳으로 띄워 올릴 또 하나의 저작이 출간됐다. 1966년에 나온 『말과 사물』은 푸코를 그야말로 프랑스 최고의 지식인 반열에 올라놓았다. 이 엄격한 학술저작에 쏟아진 말 그대로 열광적이었다. 서점에 놓인 책들이 마치 아침식사용 빵처럼 팔려나갔다.


■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법

말년의 푸코는 그런 지식인을 파르헤지아스트라는 고대 그리스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려 했다. 파르헤지아스트란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자를 말한다. 파르헤지아란 진실의 용기를 뜻하며, 풀어쓰면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 세계와 타인에 대해,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배려의 한 모습이다. 자기배려란 자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실과 대면케 하고 그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 형성이 미적 형식을 얻을 때 그 삶에 예술작품이라는 타이틀을 얹어줄 수 있을 것이다.


말년의 푸코는 이렇게 반문했다. 왜 램프나 주택과 같은 것들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의 인생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광기의 심연을 거쳐 저항과 투쟁의 강을 지나 그는 마침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고, 그렇게 예술로 만드는 데 각각의 주체들이 서로 참여하는 실존의 숲에 이르렀다. 삶은 아름답다. 푸코의 고통과 승리의 삶은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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