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중국, 중국인

   
장홍제(편역: 황효순)
ǻ
베이직북스
   
18000
2013�� 10��



■ 책 소개
양의 속성과 늑대의 속성을 지닌 중국인의 두얼굴! 

세계 여러 민족의 성향을 인류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비교우위적으로 고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5,000년역사과정 속에서 형성된 중국인의 속성을 낱낱이 파헤쳐 한족화의 과정에서 ‘늑대의 속성’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를 되짚어보고, 중국인 고유의민족성으로 대별되고 있는 ‘양의 속성’의 근원을 철저하게 해부하였다. 

세계적인 관점에서 중국 국민성을 관찰하고, 역사적 시각에서 중국 국민성의 변화 과정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국민성을 바꿀수 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중국인의 ‘저열한 근성’은 낙후된 제도의 산물이다. 중국인의 몸에는 ‘여과성 바이러스’가 없기 때문에 국민성을개조하려면 반드시 제도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저자 장홍제
몽고족 출신으로 1972년 랴오닝에서 출생하였다. 1994년둥베이재경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후 2006년 중국 건설은행에서 근무하다가 2006년 보하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문화학 석사과정을 거쳐문학을 전공한 바 있다. 저서로는 『대명왕조의 7가지 얼굴』 『중국황제의 5가지 운명』 등 다수가 있다.
■ 편역자 황효순
1965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중국경제사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시아경제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동서문화센터에서 지역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중국지역개발연구소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행자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역경제학회에서 중국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중국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하여 중국전문가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2008년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의외국인 고문으로 위촉되어 한중양국의 문화교류 협력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로 활동하며, 동양고전의심오한 지혜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지역개발론』『문화적 자원과 중국경제의 발전』『중국중소도시의 문화적 자원 활용』이 있고,공저로 『한국통신사업자의 중국진출방안』(한국통신)이 있으며, 『경기북부 한국가구산업의 중국진출 전략』을 비롯하여,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중국진출한국기업의 실태조사』 등 수많은 정부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 차례
상편 대국과 소국 
Part 1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일본인
Part 2 중국인이 한국인에게 배워야 할 것들 
Part 3 서울에서 살펴본 한국인 
Part 4 중국인과 유대인: 닮은꼴과다른꼴 
Part 5 상상과는 전혀 다른 미국인 

하편 양의 속성과 늑대의 속성 
Part 1 잘못 알려진 춘추전국시대 
Part2 만주 왕조의 출현과 소멸 
Part 3 만주족의 한족화 과정 
Part 4 한없이 드넓은 몽골 
Part 5 다마오,초원에서 나귀를 타다 
Part 6 정착한 칭기즈칸릉 
Part 7 허난: 장독 속의 장독 
Part 8 그들만의 세계, 투러우
Part 9 샹그릴라의 이미지 
Part 10 타이완의 최근 사정

후기





알다가도 모를 중국, 중국인


중국인이 한국인에게 배워야 할 것들

한국인의 변화에서 해답을 찾다

한중일, 국민성 분석

한 나라, 한 민족이 발전해 나가려면 반드시 장기적인 안목을 갖춰야 한다. 또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기본적인 자긍심도 갖고 있어야 한다.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민족성이라는 틀 안에 넣고 분석해 봐야 한다. 그래야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문화적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발전을 위한 발판을 견고하게 마련할 수 있고, 문제를 풀기 위한 정확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다.


사람마다 각자 개성이 있듯이 모든 민족은 고유한 민족성을 갖고 있다. 한 나라의 만족성은 그 나라의 지리적, 기후적, 문화적, 제도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민족성은 세월과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한국인이 봉건시대에는 보수적이고 참을성이 강한 민족으로 유명했고, 현대 역사에서는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보여 준 강한 투쟁의지로 이름을 알린 것처럼 말이다.


중국의 국민성 가운데 부정적인 면은 대부분 사회제도와 사회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국민성을 분석하려면 먼저 열등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열등감이란 전근대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산만, 단결력 결여, 나태 등은 해가 뜨면 밭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 쉬는 소농사회의 생활리듬과 맞아떨어진다. 독창적인 사고 결여, 창작력 부족, 낡은 사상 답습 등은 전체통치 속에서 길러진 순종 근성 때문이다. 자존심 부족, 원칙 상실, 동물적 생존력 등은 가혹했던 생활환경으로 생겨난 왜곡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재난과 고난을 많이 겪은 탓에 중국인은 성격적, 기질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중국인은 성격과 기질적인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면, 한국인처럼 끊임없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사회체제 속에 숨어 있는 불합리성을 근절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성 개조는 요원해진다. 따라서 국민성을 되돌아보는 노력에만 그치지 말고, 제도와 경험까지 되돌아보는 노력이 절실하다.


중국인에게 여과성 바이러스 따위는 없다. 중국인의 결점이 치료약도 없는 불치병은 더더욱 아니다. 중국인은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고, 할 수 없다고 포기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제도에서부터 손을 대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심히 갈고닦은 기술이라 해도 중국인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급한 근성이라는 단어에는 항상 중국 특색이란 단어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즉 다른 지역에서는 작동되는 물건이 중국에 가면 고장이 나거나 일시적으로 말을 안 듣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국이라는 나라는 독특하다는 의미다.


세상에는 중국 특색이나 저급한 근성 같은 불치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사회나 중국인이 앓고 있는 문제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 민족에게 듣는 처방전이라면 중국에서도 분명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계속 중국 특색의 진찰이나 치료 방법만을 고집한다면 정말 위독한 상태까지 갈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인과 유대인: 닮은꼴과 다른꼴

중국인과 유대인의 닮은꼴

중국인과 유대인은 교류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놀라울 만큼 많이 닮았다. 첫째, 중국인과 유대인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무수히 많은 우수한 민족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이들과 함께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여러 민족 가운데 역사의 흐름에 도태되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이 바로 중국인과 유대인이다. 두 민족 모두 선조들의 전통과 혈통을 고집스럽게 계승해 오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그들은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적 특징까지도 거의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둘째, 중국 문화와 유대 문화 모두 자만심이 지나치다. 사실 모든 민족은 초기에 이런 자기중심적인 유아독존 사상이 상당히 농후했다. 다만 중국인과 유대인은 이 특징을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지켜오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유아독존 사상은 하 왕조 때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중국인은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며 유일하게 문명을 가진 민족으로 여겼다. 유대인도 중국인 못지않다. 남들과 달리 천성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천민(天民), 즉 하늘의 백성이라고 했다.


셋째, 중국인과 유대인 모두 동양적 특징이 농후하다. 두 민족 모두 중용과 조화를 으뜸으로 꼽는다. 공자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했다. 즉,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강조했다. 유대교 핵심 법전인 『토라』에도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을 같은 민족에게 행하지 말라."는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넷째, 중국 문화와 유대 문화는 단점까지도 닮았다. 남존여비 사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정통파 유대교 신도들은 과거 중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남존여비 사상과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 남녀 간에는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다) 사상을 엄격히 지켰다. 유대인들은 집안에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거행하고 한 달이 지나면 큰 잔치를 열어 축하했다. 반면 딸이 태어나면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지나갔다.


다섯째, 중국과 유대인은 우수한 기질이 몸에 흐르고 있다. 중국인과 유대인은 모두 부지런하고 근검절약 정신이 강한 민족이고 사업수완도 뛰어나다. 하지만 모든 이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두 민족의 닮은꼴은 바로 학구열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중국인과 유대인 모두 교육을 으뜸으로 여긴다. 심지어 그들은 가진 것을 전부 내다 파는 한이 있어도 자식은 공부를 시켰다. 덕분에 서양에서는 유대인과 중국인 대학생은 우수 학생의 대명사로 인정받는다.


여섯째, 외국에 나가 있는 중국인과 유대인의 운명이 닮았다. 그들은 지독할 정도로 각자의 민족 특성을 지켜나가기 때문에 현지 문화와 융합되지 못하고 자민족끼리 의기투합해 차이나타운이나 유대인 타운 등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또 사업수완이 뛰어난 민족 특성을 살려 현지 부유층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타국의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희생양이 되기도 하는데, 언제나 약탈이나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나라가 이렇게 많이 닮아 있는 경우는 중국인과 유대인밖에 없을 것이다.


위기의식이 있으면 흥하고, 안락함에 빠지면 망한다

중화문명은 수많은 원시문화와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탄생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초기 중국 문화는 다중심적이고 다원적인 특징을 보였다. 신석기 초기부터 중국 대륙 곳곳에서 탄생하기 시작한 문명의 싹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중국 중원 일대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런 지리적 특징은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각 문화 거점들은 영역 확장과 다른 문화와의 교류에 힘을 쏟기 시작했고, 이런 노력에 힘입어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교류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문명이 교류와 충돌을 반복하면서 하나로 융합되고, 또 질적 향상을 실현하면서 오늘날의 중화문명을 탄생시켰다. 바로 황하 중하류 지역 허난 일대에서 가장 찬란한 중화문명의 꽃이 핀 것이다. 이로써 허난 지역은 명실공히 중화문명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이때부터 중국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문화 거점지의 중앙에 위치한 허난 지역은 무엇보다 주변 지역과의 교류가 편했기 때문에 각종 정보와 지식을 빨리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다른 문화의 압력, 그들과의 갈등, 끊임없는 도전 등은 그 어느 문화와 민족보다 심했다. 이에 그들은 강력한 대응책으로 극복해냈고 마침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은 자국을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며 천조상국(天朝上國)을 외쳤다. 당시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던 중국은 외부와의 교류가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호기심도 사라졌다. 그러다 점점 중국은 자국의 폐쇄정책에 심각한 폐단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든 유기질은 폐쇄적이고 고정된 환경 속에서 변질되고, 근친교배나 자기복제는 생물체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는 이치와 같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고 체하듯이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이 물려준 단 몇 권의 경전만이 유일한 교재였던 중국인들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해 갔다. 자만에 빠지고 보수적으로 변해 가더니 나중에는 창조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천조상국이라 자만하던 중국은 명청시대에 이르러서는 폐관쇄국을 단행하더니,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렸다. 중국은 이처럼 다른 문화를 배척하던 타성에 젖어 아편전쟁 이후 계속된 외부 침략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중국 문화가 현대화를 실현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모든 민족은 타고난 운명이 있다. 유대인은 나라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운명 속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과 사고방식을 얻었다. 그들은 "위기의식이 있으면 흥한다."라는 옛말을 고스란히 증명해낸 민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총애 덕분에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안락한 환경 속에서 수천 년간 외부 침략 없이 생활해 온 중국은 지금 결국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실에 안주해 발전은 이루지 못한 채 그야말로 "안락함에 빠지면 망한다."라는 옛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타고난 운명이라고 해서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마음을 다하면 도를 얻고, 도를 실천하는 것은 사람이다."라는 옛말처럼 모든 일의 절반은 운명이 결정짓지만 그 나머지 절반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


전 세계가 중국을 향해 문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중국은 더 이상 교류하기 힘든 머나먼 이웃이 아니다. 중국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계 각국의 새로운 문화, 특히 정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 문화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때에 아직도 자만의 수렁에 빠져 세계 흐름에 역행한다면 중국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다. 보수적인 생각과 좁은 시야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중국은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가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라는 『상서』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봐야 한다.



만주 왕조의 출현과 소멸

어부에서 자금성의 주인까지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선양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둥베이(東北) 평원은 여전히 거친 모습이다. 농가들로 뒤덮여 있기는 하나 호탕한 본성은 가려지지 않는다.


홀연 이 길을 걷던 만주 사병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당시 이곳에는 농가도 몇 채 없었고 큰길은 더더욱 있을 리 만무했다. 사방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숲과 수풀, 습지로 뒤덮여 있었다. 기차로 20분이면 지나칠 곳이 그들의 발 아래에서는 하루 종일 걸리는 고된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인구가 적었던 만주인에게는 비옥한 동북 땅에서 어업이나 수렵, 황무지 개간 등을 통해 충분히 먹고살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힘들게 끝이 없는 광야를 통과해 중원(황허 중류, 하류에 걸친 땅으로 허난성 대부분과 산둥성 서부 및 허베이, 산시성 남부를 포괄함)의 정권 쟁탈전으로 뛰어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천성과 진취성, 호기심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들을 막고 있는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의 피는 안주하지 않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 내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애신각라 가족들은 의기양양했다. 더 많은 재물과 영토를 차지하고 더 큰 존경을 얻고 싶은 열망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어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기세등등한 자신감과 웅장한 야망,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다시 말 등에 올라탔다. 물고기 가죽 모자를 쓴 사내들은 자신들이 최강자라는 사실을 세계에 증명하려 했다.


애신각라들이 동북 황야에서 순조롭게 북경성으로 진입한 것은 결코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누르하치 때부터 끈질긴 생명력, 진취적인 욕망, 극히 높은 지능지수를 보여 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정력이 왕성하고 주도면밀하며 승부욕이 굉장했다. 누르하치, 홍타이지, 순치, 강희, 옹정, 건륭 등 이들 혈통의 우성 유전자는 여러 대를 거치면서 차츰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뛰어나게 발전했다.


184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의 모든 주제는 중원 농업문명과 북방 유목문명의 대항에 관한 것이었다. 몇 천 년을 이어온 이 싸움에서 애신각라들은 여진인을 이끌고 가장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고, 성공적으로 말을 타고 중원에 진입하여 268년에 이르는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들의 통치는 분명 모든 한인 왕조보다 성공적이었다. 마상민족의 강건함과 예리함은 한문화에 의해 약화되거나 무뎌지지 않았고, 좋은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담금질하는 것과 같이 한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강건한 본질을 유지함은 물론이고 점점 믿음직하고 주도면밀하고 노련하게 연마되었다. 이렇게 중국 역사상 최장의 태평성대가 이민족의 통치 아래서 자연스럽게 성숙되었다.


이로써 이민족의 침입이 중원 문명에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중원 문명은 본질적으로 진취성을 상실한 폐쇄형 문명이기 때문에 이런 문명은 노인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 즉 요나라 시대를 회상하기 마련이다. 과거에 미련을 두고 타성에 젖어 자아갱신 메커니즘이 결핍된 이런 문명은 자아순환 속에서 점점 더 문약해지고 보수적으로 변한다. 만약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자극이 없었다면 이 문명은 끊임없이 퇴화하고 침적하거나 정체되었을 것이다. 바로 여진족의 침입이 중원 문명에 새로운 피를 주입했고, 얻기 힘든 진취성을 가져다주었다. 애신각라 가족 구성원은 부분적으로 자신의 개인 품성을 국가 전체에 주입하고 걸출한 전체적 본질에 기대어 서양 문화가 중국의 전통문화를 침탈하기 전까지 마지막 번영의 꽃을 피워냈다.



만주족의 한족화 과정

앞 사람의 실패를 교훈 삼다

만주인의 정복은 그들의 선배 민족들이 이룩한 사업의 반복에 불과했다.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미 여러 민족들이 남쪽 지역의 한지에 들어왔다. 먼저 서북의 흉노와 돌궐, 그 다음에 북쪽 지방의 선비와 몽골, 마지막으로 동북의 만주인이었다. 한, 당 시기 이들 야만인들은 흉노와 돌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약탈과 살육으로 만족했다. 훗날 나날이 문약해지는 한인의 두려움에 질린 눈빛은 기마민족의 야성을 자극했고, 그들은 차츰 더 내지 깊숙이 들어왔다.


강이 바다로 이끌림을 거부할 수 없듯, 해바라기가 태양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듯 한족화는 중원 왕조와 친밀하게 접촉할 기회가 있는 소수민족에게는 불가항력의 숙명이었다. 이 야만족들은 약탈의 방식을 통해 한족 문화에 진입하여 눈길을 끄는 물건들을 탐욕스럽게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었다. 결국 이 약탈자들은 한족 문화에 유괴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이런 숙명은 거대한 문화적 격차 때문에 생겨났다. 중원 왕조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찬란한 문화에 비해 주변 소수민족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해 보인다.


생활의 아름다움과 정적인 세계관이 결합하여 형성된 한문화의 거대한 위력은 블랙홀처럼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민족을 모두 삼켜버렸다. 이처럼 아편전쟁 이전의 수천 년 동안 한족의 동화력을 제압할 수 있는 민족은 없었다.


역사가 판원란이 말했듯이 "한족은 각 민족을 융화시키는 용광로와 같다." 민족의 융합은 각 민족의 공동 번영과 국가 부강의 통일을 촉진시키고, 소수민족의 문화 수준과 생활의 질을 높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 융합은 사실상 예외 없이 한족화나 마찬가지다. 어떤 이민족 문화든 한문화라는 천 년 묵은 국속에 들어가면 한문화와 같은 맛을 냈다. 본래 강하고 독특한 맛을 가졌던 이질 문화도 펄펄 끓는 물속에서 한번 끓고 나면 흐물흐물해져 바삭함을 잃어버렸다. 문화의 다양성, 풍부성이 크게 침해되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탄소와 철의 비율

만주족은 역사적으로 중국 역대 변경 민족 중 가장 진취적이고 정복욕이 강하며, 생활욕망이 가장 치열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모든 것에 흥미를 느꼈다. 정복의 성과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 돌 성벽을 넘은 후에 반드시 문화의 성벽을 넘어야 했다.


한층 더 강력한 한족화의 원동력은 불안감이다. 한족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한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한족의 심리를 파악함으로써 한인을 통치하는 기술을 배워 한족 사회의 운행 규칙에 정통해야만 한다. 그래서 한지를 정복한 후 한어라고는 간단한 단어 몇 개밖에 할 줄 모르는 만주족들은 다시 새로운 정복, 즉 한문화 정복을 시작했다.


한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는 청대의 성공적인 통치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이를 토대로 그들은 한족의 정치적 전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역대 한족 제왕의 통치 경험을 전면적으로 본받고 흡수해 한족이 수천 년에 걸쳐 형성한 통치 기술을 금세 습득했다.


한문화의 핵심은 보수다. 성인들의 말씀으로 빼곡한 한인들의 정신세계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성인들의 하해와 같은 가르침은 한 올 한 올 밧줄이 되어 한인들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옭아맸다. 무슨 일을 하든 옛 사람들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아야 했고 현실과 성인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생기면 잘못된 쪽은 영원히 현실이어야 했다.


그러나 만주족 문화의 핵심정신은 현실이다. 변방에 있던 낙후한 소수민족이던 만주족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곳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일을 현실에서 출발해 융통성 있게 실천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화적으로는 낙후되었지만 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사유방식을 가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총명함과 지혜는 한족을 능가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한판 전쟁에서 이들 야만족은 정확한 순서와 노련한 방법으로 곳곳에서 고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족들의 충신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대신 정복 과정에서 진심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과거를 따지지 않고 흔쾌히 고관직을 내어 주었다. 이렇듯 너무나도 현명했던 조치는 만주족의 부족한 인재와 병력을 충분히 메워 주었고 한인 관료들의 정치 경험과 사회 호소력을 손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몰락

수천 년 동안 변방 민족은 호수에 새로운 물을 넣는 것처럼 끊임없는 침입을 통해 죽은 듯이 가라앉은 중원 왕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호수는 너무 컸고 물이 고이다 보니 새로운 물의 충격력은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결이 잔잔해지자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한 민족에게 언어란 사슴의 뿔, 호랑이의 이빨, 공작의 깃털처럼 그 민족의 독창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언어를 상실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만약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언어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그들의 생각이나 기질, 성격 또한 모두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청나라의 몰락은 만주어를 완전히 잃어버린 건륭 중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결코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만주족 특유의 사유방식과 인지방식, 정신적 기질은 언어라는 길을 통해 황실 내에 계승되었다. 건륭 이전까지는 용좌에 앉았던 모든 이가 용감하고 도전을 좋아했다. 그러나 가경 황제(재위 1796∼1820)에 들어서면서 그런 진취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모국어의 변화는 가경 이후 황제들과 이전 황제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을 만들고 말았다. 만주족의 민족정신 계승은 사유방식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단절을 가져왔다. 봉쇄와 만족, 선험적인 세계관을 가진 한문화는 조금씩 진행된 정규 교육을 통해 이후 황실에서 곱게 자란 성인 황제들을 손쉽게 정복했다. 만주족 황제들의 의지가 무너짐에 따라 모든 만주족 역시 금나라 말기와 같은 부패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허난: 장독 속의 장독

장독의 중심

허난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물론 그들의 중저우(中州, 허난성의 옛 이름)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사실이다. 허난의 영광과 유구함에 대해서는 사흘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란다.


그들이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할 때 필자는 그들에게 그들이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허난 문화를 낙후시키는 주요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문명의 발전은 30년은 강 동쪽에서, 30년은 강 서쪽에서 발전한다는 것은 문명의 법칙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장은 계절을 지나면 자연스레 구더기가 생긴다. 유구한 역사는 그만큼 역사의 짐이 무겁다는 의미이며, 또한 생각이 보수와 정체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 문명의 중심지일수록 보수, 정체에 빠지기 쉽고 신흥 문명은 변두리 지역에서 생성된다.


중국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토록 힘든 길을 걸었던 이유가 바로 과거의 길이 너무도 찬란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각도에서 볼 때 중국에 현존하는 모든 문제는 대부분 오래된 전통과 현대 문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겨난 것이다. 전제주의, 우민정책, 폭력적 전통, 노예관, 관본위(官本位, 직위나 권력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가치관) 등 수천 년 동안 비바람에 씻겨 내렸음에도 중국 문명의 기본적인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 사실은 중국인이 보기에는 중국 문명의 질긴 생명력을 의미한다. 반면에 서양인들의 눈에는 극도로 비참하고 공포스럽게 비친다. 하나의 문명이 설령 다시 빛을 발하고 성공하더라도 스스로 갱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무서운 굴레가 될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송대 이후 중국 문화는 이미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고 본다.


허난은 중국 전통문화의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다. 허난인은 보수적이고 봉건적이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며, 가문의식이 강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신용도가 떨어지며, 이기적이고 교활하다고 하는데, 이는 허난인만의 전매특허인가? 이는 중국인이 보편적으로 가진 저열한 근성이 아니었던가? 단지 장독의 중심에 전통문화가 비정상적으로 두텁게 쌓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썩은 냄새가 더욱 짙게 풍기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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