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고은 외
ǻ
21세기북스
   
16000
2015�� 02��





■ 책 소개


상처 입은 사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행복한 삶을 향한 역사·철학·종교·문학의 성찰


우리 사회는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황폐해진 개인의 삶과 희미해진 사회적 가치가 두드러졌고, 그 결과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 열풍이 거세진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 책은 플라톤아카데미가 주관한 대중강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름다운 삶과 죽음 Beautiful Life> 시리즈의 두 번째 강연을 묶어낸 책이다. 책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열두 명의 지성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기본과 원칙’이다. 개인과 사회 모두 이 두 가지를 신뢰하고 지키고 따를 때 우리의 삶은 여유로워지고 우리의 사회는 안전해질 것이다.


■ 저자 고은 외
1958년 처녀시 「폐결핵」 발표 이래 시·소설·평론·에세이 등 1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시집은 서사시 『백두산』 7권, 전작시 『만인보』 30권을 비롯해 모두 70권이며, 『고은 시전집』 『고은 전집』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25개 국어로 시와 소설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 가운데 『만인보』는 스웨덴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선정되어 중고교 외국문학 교재로 채택되었다. 현재 단국대 석좌교수,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명예위원회 위원, 한겨레사전 남북한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 차례
발간사 흔들리는 세상에 맞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


1부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는 지혜
아포리아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 김상근
『징비록』 과거를 경계해 훗날을 대비하다 / 한명기
화쟁,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 / 조성택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 석영중
시와 타자의 목소리 / 황현산
내 안의 광야, 노래의 씨를 뿌려라 / 고은


2부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아프게 하는 사회,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 / 손봉호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 박승찬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 차드 멩 탄
행복은 몸에 있다 / 최인철
행복한 삶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 용타
글로벌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 이강호


 




어떻게 살 것인가


흔들리는 세상에 맞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들의 인문학적 성찰이 ‘나는 누구인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범부(凡夫)의 인문학이 될 것입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그것은 이기적인 인문학입니다. 모든 문제를 나의 문제로 환치하고 나 자신의 해탈과 구원을 소원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거칠고 잔인한 적자생존의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문학적 성찰은 반드시 그 다음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인문학적 성찰은 더 큰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에만 집중한 인문학은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호사가 될 것이고, 자기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또 다른 술책이 될 것입니다.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인문학은 교묘한 지배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는 지혜

아포리아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 김상근

지금 대한민국은 아포리아의 시대

저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아포리아(aporia)로 규정합니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통로나 수단이 없는 상태 또는 해결 방안이 없는 심각한 난관을 뜻합니다. 이것은 위기보다 더욱 심각한 단계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길 없음’의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며 모든 책임이 너에게 있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황금만능주의가 불러온 몸짱 열풍

그리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도 외세의 침략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그 아픔과 고통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꽃다운 아이들이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아포리아는 그리스의 아포리아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포리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헐뜯고 비난할까?


그리고 젊은이들은 점점 테세우스를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창립자로 스파르타에 헤라클레스가 있다면, 아테네에는 테세우스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의식이 강화되었고, 테세우스처럼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 이렇게 황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숙고할 때 소크라테스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몸짱이 되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고 헌신하며 정의를 실현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탁월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휴대전화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제일 배를 잘 만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포리아 상태에 처한 지금, 우리는 작은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와 명성에는 안달하면서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그러면서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기에 급급합니다.


통치자의 지혜

플라톤이 아포리아를 극복할 방법으로 내세운 것은 교육이었습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들어 아포리아의 원인을 설명하는데, 우리 사회의 교육 현실과 무서우리만치 일치합니다. … 그러나 플라톤은 시민들에게 “쇠사슬을 끊고 밖으로 나가라. 밖으로 나가 횃불 앞에서 일렁거리는 저 환영의 실체를 봐라. 거기서 그치지 말고 태양을 보라”고 말합니다. 진짜 빛, 본질, 이데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플라톤의 반전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동굴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 태양을 마주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방향을 바꾼 것이지요. 참된 교육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다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허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네”라고 말합니다. 다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다시 저 수감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보잘 것 없는 일이건 중대한 일이건 간에 수감자들의 고통이나 명예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단 말일세.”


『징비록』 과거를 경계해 훗날을 대비하다 / 한명기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란사입니다. 제목인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 이비후환”(豫基懲 而毖後患), 즉 내가 경계함은 후환을 삼가기 위함이라는 구절에서 한 글자씩 따왔습니다.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외교전과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민중들의 생활상, 그리고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이순신과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평가까지 담고 있는 임진왜란의 입체적인 기록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에 걸친 미증유의 대전란을 기록한 일기나 문건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유독 『징비록』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 책이 일본의 무도함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문제점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전쟁의 양상을 대단히 안타깝게, 동시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을 당해내기가 기본적으로 어려웠다. 첫째는 그들이 조총이라고 하는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는 100년 가까운 내전을 겪으면서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군대는 적군의 조총 소리만 들어도 놀라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합니다.


16세기 중후반 일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 물론 옛날부터 일본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자부심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은 상황에 따라 비극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지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우습게 여기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과의 특수 관계 때문에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일정한 역량과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을 무조건 하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류성룡의 끝나지 않은 고민

그런데 『징비록』에 담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류성룡의 정신은 과연 계승되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위기가 지나가자 위기 의식도, 개혁 의지도 모두 사라졌지요. …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노비를 줄이거나 면천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개혁 의지도 군대를 양성하겠다는 계획도 공염불이 되고 만 것이지요.


1712년, 일본에 간 한 통신사는 오사카의 난전에서 류성룡의 『징비록』이 팔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서는 『징비록』에 거론된 개혁론이 이렇다 할 실천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사이, 정작 일본에서는 조선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일본 자체의 침략성을 탓해야겠지만 조선 스스로가 위기의식을 잊어버렸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일본인들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축구 한일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치일을 앞둔 8월 28일 한 방송에 충격적인 장면이 잡혔습니다. 양재동 시민의 숲에 가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에 비친 기념관은 처절할 지경이었습니다. … 이렇게 기념관 하나 변변히 간수하지 못하는 우리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징비록』에서 이야기하는 미래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를 통합하고 그 통합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화쟁,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하는 지혜 / 조성택

‘어떻게’라는 질문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함께 사는 지혜’가 아닐까요. ‘함께 사는 지혜’라는 말 속에는 경계와 차이를 넘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나와 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실 이웃이란 말처럼 모순적인 말도 없습니다. 내가 아니면서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말하니까요. 그러므로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을 전제하는 삶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분쟁은 상존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가 곧 분열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곧 타도의 대상이며 나의 적이 됩니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한다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한 사회 혹은 국가의 나아갈 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합의입니다. 사회적 합의는 결과로써의 ‘일치된 의견’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절차와 과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한 사회에 단 하나의 의견만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투표라든지 다수결이 민주적 제도로써 의미를 갖는 것도 그 과정의 선(善)함이 있는 것이지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결정이 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투표나 다수결은 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최종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투표는 파국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제도적 장치일 뿐 모든 것을 투표로만 결정해야 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투표 이전에 다양한 방식과 경로는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총명함과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화쟁론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원효 사상의 근본은 바로 화쟁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쟁’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입니다.


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

‘부분적’인 여러 경전들을 통섭하여(統),

여러 갈래의 흐름을 ‘한 맛’으로 돌이키며(歸)

(또한) 부처님의 지극히 올바른 ‘뜻’을 열어 전개해(開),

여러 학파들의 쟁론을 화동한다.


여기에서 핵심어는 통섭(統)과 전개(開)입니다. 개별 경전의 부분성을 통합하여 불설(佛說)이라는 일미(一味)로 돌이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설의 의미를 다양하게 전개함으로써 여러 학파의 이쟁(異諍), 즉 서로 다른 주장들을 그대로 살려 조화롭게 회통한다는 것이 화쟁의 핵심입니다. 통섭과 전개라는 원효의 해석학적 전략은 그의 다른 저서에서 종요(宗要) 혹은 개합(開合)의 논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부분적 진리만 있으니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내가 만진 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경험과 지식만이 진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도 진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의 개시개비의 핵심은 누구도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으니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곧 화쟁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민주사회의 걸림돌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의 출발점입니다.


화쟁은 대화의 철학이다

원효의 화쟁론은 일종의 대화의 철학입니다. 논쟁은 내가 옳음을 입증하는 과정이지만, 대화는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과정,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과정이므로, 논쟁은 반드시 대화로 이어져야 하며 그 과정이 곧 개시개비입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입니다. 경청은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화쟁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비우는 주관의 체념諦念입니다. 체념 또한 경청과 마찬가지로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하나로써 오늘날 시민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체념을 포기의 뜻으로 생각하지만 체념의 체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체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망을 버리고 단념한다는 익숙한 정의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도리(혹은 진리)를 깨닫는 마음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 석영중

톨스토이는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런 고민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에게는 문학과 사상, 그리고 예술과 교육과 철학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게 되는데요, 그 답은 바로 ‘성장’입니다.


성장이란 인간이 끊임없는 성찰과 학습을 통해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톨스토이는 성장에 대해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톨스토이, 마음을 바꾸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에게 성장은 나와 나의 관계, 그리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 어떤 완결된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장은 그 자체가 과정입니다.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레빈의 성장은 세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일단 레빈은 ‘몰입’합니다. 그리고 ‘소통’하고 ‘죽음’을 기억합니다. 이 셋을 앞에서 말한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변화에 대한 이해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단계는 각각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서로 얽혀 있지요. 몰입은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레빈은 이것을 체험합니다. 다음은 『안나 카레니나』의 명장면인 ‘레빈의 풀베기’ 부분입니다. 이 소설을 연구하는 사람치고 이 장면을 언급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동안이나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30분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톨스토이, 소통을 말하다

톨스토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레빈의 경험을 확장시켜나갑니다. 자아에서 해방된 레빈은 비로소 외부와 타자와 세계와 교감하게 됩니다.


레빈은 그들에게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인에 대한 어려움은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일꾼들은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빈은 영감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잔뜩 흥미를 느끼며 그의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그는 형보다 영감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농부들도 영주인 레빈이 자기들과 같이 풀을 베면서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말이 필요 없는 것이지요. 농부들과 풀베기를 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완전히 그들과 일체화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유대감이 형성되었고 레빈이 그토록 허물고 싶어 했던 벽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톨스토이, 죽음을 말하다

그는 이 소설이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결국 그가 발견한 대답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지요.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모순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현재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죽음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현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지겠습니까. 톨스토이는 죽음을 미워하고 혐오하며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죽음을 기억하는 것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면서 산다는 것은 또한 변화에 적응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마지막 메시지는 “시간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이고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하지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아프게 하는 사회,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 / 손봉호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결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찾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삶, 이것이 핵심입니다.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인간에게는 두 가지 궁극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이고 하나는 고통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쾌락이 좋고 고통이 나쁘다는 것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것을 느낀다”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단박에 마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직관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행복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 역시 “행복과 고통은 대칭적인 게 아니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주체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오늘날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5분의 4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호의적이고 책임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관계 때문에 고통 받을 이유도, 불행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욕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 받게 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토머스 홉스의 표현처럼 오늘날의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잡혀 먹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고통이 비롯됩니다.


인간의 악행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고통 받듯이, 나로 인해 누군가가 고통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내가 받은 고통만 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도덕적이 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회는 개인보다 훨씬 더 비도덕적이라는 말입니다. 사회에는 개인에게 존재하는 양심이나 위선, 동정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개인의 욕심과 이기주의가 사회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때 그 심각성은 더욱 증폭됩니다. 사회는 인간의 악의적인 면들을 똘똘 뭉쳐서 더욱 견고하게 만들지만, 그 악을 억제할 수 있는 양심이나 합리성, 체면 등이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훨씬 더 비도덕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요. 개인이 나쁜 짓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했다면 그 사람이 책임을 져야겠지만, 사회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했자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지나친 경쟁심입니다.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나보다 더 똑똑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경쟁심은 강한데, 도덕적 수준이 낮다 보니 페어플레이가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규칙 아래에서는 억울한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려면 우리 모두 인내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눈앞의 이익에도 옳지 않은 일이다 싶으면 과감히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비인불인非人不忍이요 불인비인不忍非人입니다. 참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면 참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참지 못하고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면 인간은 결국 비도덕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 박승찬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뜻이지요. 그만큼 우리의 삶이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을 보나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이면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고통 앞에 선 우리가 그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힘, 바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고통에 대한 다양한 구분

우리는 고통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구분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고통을 좋은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때로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명시했지요. 하지만 올바른 의지와 이상 대문에 받게 되는 고통은 때로 유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 자체와 고통의 유용성을 구분하고, 지양될 수 없는 고통과 지양되어야만 하는 고통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전체적인 이야기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

이렇게 욕구를 끌어올렸다가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고통에 빠집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욕구를 낮춰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욕구,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는 쾌락이 중요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인 쾌락은 매우 제한된 시간 동안만 지속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쾌락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잔잔하게 지속되면서 언제든지 반복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이고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꿈꾼 것은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철학적인 성찰을 나누면서 책을 읽는 것이었고, 여기에서 오는 즐거움이 바로 쾌락이었습니다.


왜 선한 사람이 고통 받을까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게 홀로 서 있는 순간이고, 이때 우리의 삶은 깊이를 갖게 됩니다. 최근에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라는 책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호스피스 간호사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인문학의 위안

나쁜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책이 『철학의 위안』입니다. 책의 내용은 조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시가 나오고 그것에 대한 논변이 나오고, 다시 시가 나오고 논변이 나오고, 이것이 반복됩니다.


보에티우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 결론은 악인들의 행운은 진짜 행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처음 갇혔을 때 동고트족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보에티우스는 어느덧 손을 내려놓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악행에 항거하고 덕행을 닦아라. 올바른 희망에 마음을 들어올려라. 너희는 모든 것을 투시하는 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에티우스는 정확하게 경고했습니다. “모든 것을 투시하는 재판관 앞에서 너희들은 마지막 계산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행운에 만족하지 말라.”


사랑하시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하시오

430년에 그가 죽은 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토교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매우 복잡하게 여러 곳에 기술해놓았지만, 저는 한 줄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

Dilige, et quod vis fac.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행위를 할 때만 함께 사는 정의가 실현되는 신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걷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장황하게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단합니다.


홀로서기와 함께 걷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대할수록 상처는 더욱 커집니다. 고통은 홀로 맞서야만 하는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그렇더라도 고통에 바진 사람 옆에서 함께 걸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고통스러울 때 그 사람도 나와 함께 걸어줄 것입니다. 이런 홀로서기와 함께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