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의학콘서트

   
이문필(감수: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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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북
   
25000
2018�� 01��



■ 책 소개

 

제대로 알아야 할 의학의 진실과 의학혁명의 패러독스!

 

이 책에는 인류가 걸어왔던 파란만장한 의학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또한 독자여러분에게 의학에 관한 지식과 정보, 안목과 통찰력을 길러주게 될 것이다.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놀라움, 상상력, 즐거움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한 인류의 조상들이 질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중하고도 값진 에피소드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의학의 역사는 곧 예술, 화학과 과학, 그리고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질병과 끊임없이 싸우며 오늘날까지 걸어왔다. 앞으로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는 의학적인 문제로 인하여 윤리적, 종교적 갈등 상황이 수없이 전개될 것이며,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불특정한 무리에 의해 의학적 지식과 능력의 가치가 흥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저자 이문필
젊은 의학을 꾸밈하는 모임

 

이 책은 서양에서 출간되었던 의학과 관련된 수많은 도서와 참고자료에서 의학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대부분 한국에 전혀 소개된 적이 없는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다.

 

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실로 다양하다. 이 책은 단순히 의학적인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과 소양, 그리고 역사, 철학, 과학, 의학적인 식견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의료와 의학과 관련된 각계각층에서 종사하고 있는 교수, 의사, 간호사, 학자, 출판기자, 강사, 선생님, 기업인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원고의 집필기간은 여러 차례의 피드백과 전문가의 감수를 의뢰한 기간을 포함하여 대략 3년 6개월이 소요되었다. 또 한편으로 교정과 원고 수정에 노고를 쏟아준 분들도 필자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강병찬 강선주 공유석 김대원 김미숙 김영미 김영환 김재훈 류미숙 박민철 유택규 이동탁
이문영 이문필 이원철 이장호 이혜림 조선미 조혁기 황효순

 

■ 감수 박민철
전남대학교 의학과 신경정신과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회장, 전라북도광역정신보건센터장, 대한우울조울병학회 회장, 한국정신분석학회 회장, 대한정신약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원광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보건환경대학원장,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부속제2병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재난 정신건강의학 / 공저 / 하나의학사
-임상신경정신약물학 / 공저 / 시그마프레스
-우울증 / 공저 / 시그마프레스
-자살의 이해 / 역서 / 하나의학사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25년사 / 저서 / 원광의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 역서 / 하나의학사

 

■ 차례
머리말 4

 

제1장 원시시대의 의학 - 점술과 마법의 의술
인류 의학의 출발-자연치유 16 /
점술과 주술의 무속신앙 18

 

제2장 고대 이집트 의학 - 신화적 처방
임상처방 ‘R’ 24 /
나일 강변에 비친 의학의 서광 26 /
파라오를 위한 궁정의학 31 /
미라 -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구 32 /
파피루스 처방전 35

 

제3장 고대 오리엔트 의학 - 히브리, 인도, 메소포타미아 의학
불결은 만병의 근원 40 /
치료 권한의 이전 42 /
유향의 비밀 46 /
고대 인도의 의학 48 /
메소포타미아 의학 51

 

제4장 고대 중국 의학 - 유교와 도교에 나타난 생명과학
천인합일과 음양오행 54 /
본초학과 의식동원 58 /
중국 최고의 의학서 《황제내경》60 /
인체의 비밀 - 중국의 경락학 63 /
죽은 사람도 살리는 편작 65 /
마취의 대가 화타 68 /
중국의 의성 장중경 70

 

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호메로스의 붓끝에서 탄생한 명의 74 /
올림픽과 공중위생 77 /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 80 /
우주의 개념을 인체에 도입 85 /
4대 원소와 4가지 체액설 89 /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93 /
히포크라테스 학파 98 /
그리스 의사의 진면목 105 /
의학의 성지 알렉산드리아 108

 

제6장 고대 로마 의학 - 고대 제국 최후의 전성기
로마제국의 그리스 의사 환대 114 /
백과사전의 탄생 118 /
로마제국의 공중위생 121 /
산부인과의 창시자 125 /
갈레노스가 끼친 영향과 업적 127

 

제7장 중세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로마의 쇠락과 기독교의 부흥 136 /
기적의 복음 139 /
최초의 의학교 - 살레르노 143 /
전염병의 확산 148 /
사혈요법과 스콜라철학 154 /
볼로냐 대학 158 /
‘메스’의 중요성 부각 161

 

제8장 아랍 의학 - 알라의 음성
최고의 전리품 168 /
연금술과 약사제도 171 /
임상경험주의자 라제스 174 /
의학의 왕자 아비센나 178 /
아랍의 의사들 183

 

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새로운 시대의 개막 188 /
의학을 향한 예술가들의 열정 191 /
매독 - 문명인의 명함 196 /
후텐의 매독일기 200 /
의학의 구세주 등장 203 /
인체 해부의 서막 210 /
인체 해부학의 아버지 베살리우스 214 /
전쟁, 외과학의 대부 220 /
파레 - 신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다 224 /
새 생명의 탄생, 제왕절개 수술 229 /
눈을 망치는 사람, 안과의사 233 /
코 복원 수술 236 /
르네상스시대의 의사들 239 /
세르베투스와 카르다노 241

 

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측량의 시대 도래 248 /
윌리엄 하비의 신념과 열정 252 /
미생물의 위대한 발견 257 /
최초의 수혈 수술 263 /
국제교류시대의 도래 266 /
생기를 잃어버린 외과학 270 /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 토마스 시드넘 273 /
신약의 등장 277 /
전염병에 무릎을 꿇은 의학 282 /
양대 학파의 대립 286 /
국왕들의 이야기 291

 

제11장 18세기 의학 - 산업시대 이성의 힘
의사의 진심 어린 거짓말 - 금방 다 나을 것입니다 296 /
18세기의 의사들 299 /
의학의 거성 부르하베 303 /
애니미즘의 등장 307 /
컬런과 브라운 311 /
유방 - ‘여성과 어머니’ 상징의 이중성 313 /
소아과학의 탄생 - 한 그루의 나무처럼 곧고 자유롭게 자라나라 317 /
감옥 개혁 운동 - 인도주의의 확장 320 /
직업병, 괴혈병, 그리고 방부제 324 /
양대 의학 명저의 탄생 329 /
외과의사의 모험시대 332 /
남성 조산사의 시대 335 /
현대 외과학의 아버지 - 존 헌터 338 /
독특한 치료법의 등장 - 전기요법, 자기요법, 최면술, 동종요법 343 /
약물치료의 신기원 - 화학 349 /
신대륙에서의 의학 352 /
정신질환 - 참혹한 환경을 벗어나 인도주의의 품에 안기기까지 356 /
천연두에 도전한 제너 363

 

제12장 19세기 의학 - 과학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
과학 중흥시대의 개막 368 /
나폴레옹과 군사의학 371 /
조직학의 창시자 비샤 374 /
라에네크의 귀중한 유산 - 청진기 378 /
의학의 전문화 381 /
스코틀랜드의 벨 형제 384 /
최초의 난소절제술 387 /
윌리엄 버몬트의 ‘위’ 생리실험 390 /
통계학과 의학의 결합 393 /
19세기의 의사들 398 /
‘웃음가스’를 이용한 호러스 웰즈의 발치 수술 401 /
에틸에테르 - 무통 수술시대의 도래 404 /
무통분만 - 산과의 혁명 409 /
산모들의 구세주 제멜바이스 413 /
최고의 명약 ‘물’ 418 /
새로운 의학의 중심 독일 - 임상의학을 추월한 실험의학 422 /
실험광 베르나르 426 /
세포왕국 429 /
진료의 새 도구 등장 - 체온계, 검안경, 후두경, 이경, 방광경 433 /
등불을 든 천사 나이팅게일 441 /
정신질환 치료의 신기원 447 /
항균소독의 시대를 연 조셉 리스터 451 /
여성의사는 과연 연약한가- 455 /
공중위생 - 깨끗한 물과 신선한 공기 458 /
황열병 퇴치 461 /
위대한 미생물학자 파스퇴르 464 /
미생물학의 기반을 확립한 코흐 469 /
19세기의 외과학 475 /
의학의 새로운 빛, 뢴트겐의 X광선 478 /
유아의 영양과 우생학 482 /
화학요법과 혈청요법 486 /
의학계의 4대 천왕 - 헨리 웰치, 할스테드, 하워드 켈리, 윌리엄 오슬러 491

 

제13장  20세기 현대 의학 - 의학의 혁명기
획기적인 의학의 발달 506 /
외과학의 급성장 508 /
20세기에 거둔 의학적 성과 509 /
의학혁명의 새로운 전환기 522 /
21세기 의학혁명은 현재진행형 523

 

에필로그 - 현대 의학의 남겨진 과제와 전망 525  




한권으로 읽는 의학콘서트


원시시대의 의학 - 점술과 마법의 의술

점술과 주술의 무속신앙

초기 인류는 온전히 실제 경험을 통해서만 질병과 통증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대자연의 신비를 알아내기에는 인류는 힘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당시 점술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종합하여 인체에 이롭거나 해로운 식물을 밝혀냈다. 또는 동물의 자생치료법을 모방하거나 약초를 이용해 병을 고쳤다. 이들은 환자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본인의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신령의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마법과 주문을 생각해냈다. 의학은 이처럼 점술가의 주문과 마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의식과 원시 사회의 수술, 그리고 자연치료법 등은 모두 점술가들의 의료영역에 속했다. 물론 이러한 의식이 환자들에게 어느 정도 정신적 위로를 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점술가들은 동물의 독소와 식물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의학의 기원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대 문명국가 모두 신전과 성지를 중심으로 의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으며 얼마 안 되어 의학은 최고의 권위를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일부 원시부족의 점술가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고대 오리엔트 의학 - 히브리, 인도, 메소포타미아 의학

치료 권한의 이전

유대 왕 아사(BC 915~875)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처음으로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한 장본인이다. 다리에 병이 나 여호와가 아니라 의사를 불렀던 것이다. 결국 아사 왕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당시 의사들이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병을 치료할 특권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관장하던 치료의 특권이 먼저 선지자와 목사에게 부여되었고 마지막에야 세속의 의사에게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전한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관례가 되었다. 모세가 전파한 율법은 유대교의 진수를 담고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예방 의학 관련 지식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놀라운 수준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모세는 인류 최초로 공공집단생활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열왕기에는 아람 왕 시대 나아만 장군이 피부병에 걸린 이야기가 나온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여인의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의 엘리사에게 보낸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과 만나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차례 목욕을 하도록 전했다. 나아만은 억지로 엘리사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해졌다.


당시 내과의 모든 증상을 비롯해 구강, 실명 등의 치료 행위는 모두 하나님과 제사장, 선지자의 권한에 속했다. 그러나 세속의 의사들도 점점 그 치료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접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나면서 많은 질병이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의사들의 치료를 받는 비중이 늘어났다. 제사장들도 점점 의사의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의사들에게 치료권이 이전되면서 엄격한 의료허가제도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의료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법정에서 의사 자격을 검증하는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의사들은 매우 풍족한 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의학

고대 인도의 의학은 베다교시대(기원전 1500~800년)와 브라만교시대(기원전 800~기원후 1000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베다시대의 의학은 다분히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것이었으며, 브라만시대의 의학은 신비적인 색채가 농후한 베다시대 의학에 비하여 비교적 학문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보다 전반적으로 의학 기술이 우수하여 처방전과 같은 것도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잘 정돈되고 일정한 서식과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인도의 의학은 고대문명의 다른 의학과 유사한 점도 많지만 훨씬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 의학과 매우 유사한 측면도 있는데 그리스 의학은 거의 인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도 의학은 종교와 과학의 혼합형으로 중세 의학에 견줄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훨씬 더 우수했다고 판단된다.


인도의 불교와 관련된 의술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동남아, 중국, 한국, 일본 등 극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리아인들에 의해 발달된 의학 기술은 페니키아, 이란 문화와 융합한 다음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으로 꽃을 피웠는데 이집트를 비롯하여 그리스를 거쳐 유럽까지도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의술 서적으로써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의학적 지식을 기록한 <아유르베다>(‘삶의 지혜’내지는 ‘생명과학’이라는 뜻)를 힌두교의 건강관리 체계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우주의 개념을 인체에 도입

철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로 불리며 인류의 행복한 유년기를 장식했던 사대!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노예제 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스는 반도 국가로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했다. 또한 산이 많고 평지가 적어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 때문에 그리스는 해상 무역이 발달했다. 다른 나라들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그리스인들은 바빌론, 이집트의 발달된 의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리스는 인도와도 의학 교류가 이루어졌다.


한편,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고대 그리스의 외과용 시술도구는 대개 주석 함량이 15% 정도인 구리제품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서에서도 수술 칼이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밖에도 ‘은’으로 만든 ‘내장용 침’ 등 정교한 의료기구들도 발견되었다. 이처럼 정교한 외과용 수술도구는 경험이 풍부한 전문 장인들이 금속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손잡이 부분까지 화려한 장식을 하는 등 수준 높은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만큼 수많은 철학가와 성현을 배출한 나라도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색과 연구에 매진했던 이들은 우주를 신의 작품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밝혀내려 했다. 당시 철학자들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신분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세계의 본질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은 물이며 물에서 만물이 기원했으며 물이 모든 물질의 기반이라고 여겼다. 아낙시메네스는 주변에 가득한 공기가 우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였던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의 본질을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강조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의학에 원용되었다.


철학자들의 풍부한 사색을 바탕으로 원시 의학은 ‘신앙에서 과학’으로 바뀌는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해 의약을 다각도로 연구한 셀수스와 플리니우스, 산부인과의 창시자 소라누스, 갈레노스 등의 영향으로 의술과 의학 이론은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의학은 철학과 함께 발전하였으며 과학과 예술의 영역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특히 우주의 법칙을 인체에 원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의사의 진면목

한 국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면역학의 원칙을 세워 세계 최초의 면역학자가 된 사례가 있었다. 폰투스의 국왕 에우파토르(BC 132~63)는 계속된 궁중 암투 속에서 항상 암살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독약에 강한 약재를 발견했는데 죄수에게 먼저 실험을 해보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얼떨결에 독약 연구의 권위자가 된 그의 이름이 서방 해독제로 명명되기도 했다. ‘테리아카’라고 불리는 이 항독제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으며 개량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64종의 약재가 결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곧 모든 약방에서 이 약을 팔기 시작했으며 특히 농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항상 논밭에서 일해야 하는 그들은 뱀과 곤충에 물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점점 부흥하면서 해외 식민지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의 의학도 그 영향력이 점차 확산되어 약재무역이 황금 무역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의 의사들이 모두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입지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호메로스시대부터 그리스 의사들의 지위는 구두공이나 도자기공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직 히포크라테스만이 이름난 명의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왕궁의 어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보통 의사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시장이나 마을의 임시거처에서 작은 임시 간판을 내걸고 의료행위를 했으며 생계를 위해 ‘고객’을 속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그리스 지방정부는 일부 마을에 시범적으로 공공 종합병원을 건립했다. 병원의 위생을 담당할 관리는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도록 했다. 이 제도의 성공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일부 역사 문헌에서 기원전 3세기경 전염병을 연구했던 한 의사가 아테네 시민을 잘 섬겼다는 이유로 푸른 올리브 관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병원 위생을 담당했던 관리 중에는 올림픽 경기의 영구 좌석을 부여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새로운 시대의 개막

중세, 길고 긴 암흑의 시간이 흐른 후,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가 세계를 황폐화시키고 있었지만 문명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14세기 초부터 이미 새로운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1453년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이때 수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문화유산을 들고 서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는 교조주의, 스콜라철학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도 여전히 굳건히 살아남았다. 또한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자유로운 경쟁 환경이 필요했던 상공업자들은 개성의 해방과 인문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는 인간을 사상의 중심에 둔 이념으로 인간이 신앙의 속박에서 벗어나 현실세계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르네상스(문예부흥)’는 1855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슐레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16세기 ‘세계와 인류에 대한 탐색’을 총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간이 다시 역사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천당과 지옥이 아니라 자신과 우주의 신비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식과 미에 대한 갈구로 학자들은 고대문헌을 탐독하고 그리스 예술의 항구성에 다시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문헌에 담긴 지혜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가져온 성과는 소수의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여전히 중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영위했다. 여전히 점성술이 사용되고 있었고 질병 진단과 치료 역시 소변 검사, 사혈요법에 의지했으므로 돌팔이 의사와 사기꾼이 도처에서 들끓고 있었다.


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므로 다른 과학 분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의학은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대학은 더 이상 교회의 속박을 받지 않고 의학의 새로운 지식들을 다룰 수 있었다. 자유로운 학술 연구가 이뤄지면서 전통 속에 뿌리박힌 오류들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인체해부를 통해 진정한 생명교육과 인본주의적 치료의 물꼬가 트였다. 중세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던 견고한 종교적 성벽이 무너지면서 의학이 드디어 인간의 의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인체 해부의 서막

우리는 인체의 비밀이 모두 밝혀진 시대에 살고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뼈, 근육, 심장, 간, 비장, 허파 등에 대해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메스와 나누는 대화, 그것이 바로 ‘인체 해부학’이다. 해부학은 의학의 기본으로 건축설계사의 설계도면과 같은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 크로톤(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크로토네 지역)의 알크마이온(BC 500년 전후)은 역사상 최초의 해부학자이다. 그는 생물학 사상 처음으로 해부학 저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의 해부학 저서는 수많은 동물 해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알크마이온은 해부학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동물을 체계적으로 해부해 보아야 하며 특히 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해부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대에는 종교의 영향으로 시체 해부가 금지되었다. 해부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시체를 접촉하는 것조차 교리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 교리를 어기면 바로 종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때문에 동물의 내장과 부패한 동물의 시체만 가지고 해부학을 연구했으므로 그 성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대학이 발전하면서 볼로냐, 파도바, 살레르노 등이 의학교육의 메카로 떠올랐다. 교회가 대학의 인체 해부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최초의 대학 내 인체해부실은 종교의 교리가 가장 엄격했던 이탈리아에 처음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의 의학교에서도 이탈리아를 모방한 해부학이 속속 개설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시체 확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부는 해부학이 사망자의 사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14세기 중엽부터 사인이 불분명한 사망자가 발생하면 법관은 대학의 외과의사에게 검시를 요청했다. 당시는 해부용 시체가 늘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빙자한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828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게리 부부가 그들이 묵고 있던 여관에서 혈흔과 낯선 사람의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이 의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시체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범인은 바로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여관에 투숙한 손님을 죽인 후 팔아넘겼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각국은 해부학 관련법을 제정하기 위한 토론회를 연거푸 개최했다. 그리고 1889년 최초의 해부학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조항에는 “자살한 자, 교수형에 처한 죄수, 사망 후 시체를 수습할 가족이 없는 죄수, 고아, 신원불명의 사망자 등의 범위 내에서 해부학 연구를 추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18세기 의학 - 산업시대 이성의 힘

감옥 개혁 운동 - 인도주의의 확장

18세기는 대규모 공중위생 시설이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다. 1765년 버밍햄에서 가장 먼저 위생법규가 시행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런던, 맨체스터에서 동일한 법률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 소도시들도 이를 모방하여 시행해 왔다. 공업화의 진전에 발맞춰 오수 처리, 도로 건설, 가로등 설치, 하수도 개선 등과 같은 시설이 구비되면서 점차 현대화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런던 같은 대도시에도 상수도 공급은 일주일에 세 번 그것도 몇 시간 정도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근대 감옥관리와 공중위생의 개혁가’로 불리는 존 하워드(1726~1790)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진정한 인도주의자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베드퍼드셔 카운티 지역의 사법 행정장관으로 각 도시의 감옥을 감찰하던 중 감옥의 불결하고 처참한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감옥의 열악한 환경에 분노한 그는 사법 행정장관을 사퇴하고 일부러 경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감옥관리의 폐단을 직접 체험하며 수감자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었다. 출옥한 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옥관리의 제도화, 정기적 위생 점검, 종교 교육, 1인 1기술 교육 등을 골자로 한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류 최초로 실시한 범죄자 권익보호 운동에 해당한다.


감옥개선운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잉글랜드 테딩턴의 헤일스(1677~1761) 담임목사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헤일스는 오염된 공기가 유행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에 착안해 일종의 ‘통풍 풍차’를 개발했다. 그는 이 ‘통풍 풍차’를 지방의 감옥에서 시범적으로 사용해본 결과 양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헤일스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농촌에서만 51년 동안 생활했다. 1709년 테딩턴의 부목사로 부임한 그는 첫 해에 인공수로를 만들어 촌민들이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한 지붕에 소형 풍차를 설치해 실내 통풍 환경을 개선하기도 했다.


1727년 그는 식물 정역학이라고 명명한 최초의 식물생리학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식물의 증산작용을 밝혀냄으로써 ‘식물생리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 식물학계 최고의 학술상 이름도 ‘스티븐 헤일스 상’으로 명명되고 있다.


신대륙에서의 의학

미국이 건국된 후 100년 동안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각종 의학서적도 부족해 신대륙 전체의 의학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교통도 불편했으며 무엇보다도 의사 부족현상이 심각했다. 신대륙에서의 의료행위는 여전히 구시대의 사혈, 설사요법뿐이었으며 개척시대의 폐쇄성으로 인해 의사는 본인이 알고 있는 편협한 지식을 바탕으로 약 처방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아직 의학교가 설립되지 않았으므로 의사들은 중세방식(도제), 즉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형태로 의술이 전수되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의사 집안의 가사노동은 물론 마구간 청소까지 도맡아했으며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의학지식을 익혔다. 정식 제자가 되면 스승이 보는 책을 보며 이론 지식을 쌓을 수도 있었다. 연륜이 쌓이고 스승이 그의 실력을 인정할 때면 일종의 ‘증서’를 받고 ‘졸업’한 후 자신만의 진료소를 개업했다. 이 ‘증서’는 의술뿐만 아니라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박애정신을 함께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대륙의 의사들이 제대로 된 의학 시스템을 갖추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1900년경 당시 의사들의 약 상자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물론 약은 없었다. 약을 대신해 상자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염화수은, 아편, 키니네 등이 전부였다.



19세기 의학 - 과학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

과학 중흥시대의 개막

18세기를 돌아보면 구제도의 폐단이 극에 달하면서 진보적 성향의 군주들이 대거 등장한 시대였다. 인류는 지혜와 예술을 숭상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세련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급진적인 경향으로 치달으면서 혁명과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18세기에 비친 서광이 19세기 초의 비참한 전쟁 속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과 전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낭만주의가 고전주의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1830년대에 진입하면서 이들은 폐허를 딛고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려 시도했다. 그 결과 구시대적인 전통은 바로 무너져 버렸다. 민주주의가 새 시대의 복음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유럽의 사회체제와 구조에 대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회와 과학의 발전은 의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의학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 영역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순수과학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각종 가치관과 생명관이 결합된 종합적인 학문이었던 것이다. 인문주의 의학 전통은 생명의 주체인 인체를 이해하고 인도주의 실천을 다루도록 강조했다. 의학은 생명의 숭고함과 질병에 대한 고통을 승화시키는 감성적이고 시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진입하면서 탐구 정신은 근대 의학에 풍부한 성과를 선사했다. 인체의 비밀이 밝혀지고 정밀하고 효과적인 치료방법, 치료기계가 등장하면서 인류의 생명관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의학상의 난제들이 하나 둘씩 극복되면서 과학의 날개를 단 의학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생기 넘치고 젊어졌다. 또한 동물실험이 보편화되는 등 그 연구 대상이 객체화, 객관화되는 특징을 보였으며 의학에 기술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인문적 요소는 점점 무시되기 시작했으며 현대과학을 무기로 한 의사들은 그들에게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일종의 패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패권은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진시키긴 했지만 생명의 윤리학적인 부분을 배제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새로운 의학의 중심 독일 - 임상의학을 추월한 실험의학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난 후부터 과학이 점차 직업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독일의 상황도 프랑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추세는 더 강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개념, 과학의 연구 대부분은 독일의 대학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독일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의 대학들은 양적, 질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현대적 의미의 고등교육 체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공과대학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고전 인문주의 철학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으며 기초이론과 응용과학 기술로 무장한 과학 이성주의가 독일 대학에 군림하게 되었다. 거대한 공업체계가 사회 조직까지 분화시키자 독일 대학 내의 학과들도 급속하게 분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로써 독일은 명실상부한 세계 교육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미국이 ‘과학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대학 내에 연구소를 설립할 때도 주로 독일 대학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의학의 경우 화학자들의 실험 연구 방식을 모방해 생리학, 병리학, 세균학 등에 응용함으로써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1930년대 독일에는 이미 강의용 실험실이 건립되었으며 수준 높은 임상 의사들로 하여금 실험실 연구에 더욱 몰두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임상 관찰에 투자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실험에 대한 열정은 의학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함으로써 의학의 주도권을 프랑스에서 독일로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학을 했다. 독일 의사들이 세계 의학계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세계 의학의 주류도 실험의학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임상의학은 실험의학의 뒷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1840년 뮐러는 신경의 자극에 따른 신경전달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10년 후 그의 제자였던 헬름홀츠(1821~1894)에 의해 번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뮐러는 독일에 생리학의 새 장을 연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저서 <인체 생리학 개론>은 오랜 기간 각 대학의 필수 교과서로 채택되어 왔다. 19세기 후반 세계 의학의 신발견과 신발명을 주도했던 독일 의학계의 중심에 바로 뮐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열정을 다해 가르쳤던 제자들이 세계 의학계 각 분야에서 의학의 청사진을 그려냈다.



20세기 현대 의학 - 의학의 혁명기

획기적인 의학의 발달

20세기에 현대 의학은 면역학의 발달로 인하여 각종 예방 백신과 항생제 개발, 암치료, X선의 발견으로 진단기술의 발전, 피임약의 개발 등으로 특정지어질 수 있다. 특히 예방 의학은 대규모 사업들이 실시되었는데 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소아마비 등의 질환에 대해서 예방 접종이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황열, 말라리아, 뎅기열 등에 대처하기 위해 기생충을 박멸하는 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고, 살충제가 개발됨으로써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에 무렵에 그로트얀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는 사회병리학을 주창하여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 의학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또한 암이나 고혈압, 세균학과 내분비락 등에 관한 지식이 증가하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인의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1916년에는 미국의 내셔가 ‘노인 의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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