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의 철학자

   
마크 롤랜즈 (지은이), 강수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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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밭(청림출판)
   
19000
2025�� 05��



■ 책 소개


“행복한 삶은 성찰하지 않는다” 
철학하지 않는 철학자, 개에게 배운 삶의 의미

반려견과 생활해봤다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매번 하는 산책에 어쩜 변함없이 즐거워할까?’, ‘매일 먹는 간식인데 저렇게 맛있을까?’’ 반복되는 일상도 늘 처음인 듯 반기고 기뻐하는 개를 보면, 어쩌면 개들이 인간보다 삶을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개에게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늑대와의 우정을 그려내며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오른 《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가 이번에는 개와의 삶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심도 있게 담아냈다. 이 책은 일생을 개와 함께 살아온 저자가 개에게서 배운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흄, 스피노자,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까지 인간계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의 삶과 견주어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왜 인간은 개와 같이 행복할 수 없는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성찰’하는 인간과 ‘몰입’하는 개를 대비하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찰한다. 특히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이 오히려 삶을 불행하게 한다고 말하며 우리가 치르고 있는 성찰의 대가란 무엇인지 알아본다.

■ 저자 마크 롤랜즈
영국 출신의 철학자. 아장아장 걷던 어린 시절부터 인생 후반부에 접어든 지금까지 일생을 개와 함께 지내왔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반려견들은 온몸으로 철학적 교훈을 보여주었다.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와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그저 살아가며 질문에 답하는 개들에게 진정한 삶을 배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끝없이 묻는 인간에게 개의 단순명료한 답을 전하고자 이 책을 써냈다.

현재 마이애미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주로 마음, 윤리 및 도덕심리학의 철학을 연구한다. 모든 생물이 타고난 존재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체화된 인지론’을 철학계에서 이끈 선두주자로 꼽힌다. 국내에 출간된 주요 저서로는 늑대 브레닌과의 삶을 기록한 《철학자와 늑대》를 비롯해 《철학자와 달리기》,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등이 있다.

■ 역자 강수희
부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외 유수 기업의 통·번역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철학자와 늑대》, 《철학자와 달리기》, 《감정의 미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의 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철학 강의
프롤로그 노래하는 법을 잊지 않는 타고난 철학자

1장 섀도의 바위
섀도와 녹색이구아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섀도의 즐거움
본성에서 비롯된 행복과 조작된 행복
공격성 강한 개를 사랑하는 일
위험한 개, 섀도 훈련기
성격은 곧 운명
개의 행복은 명료하다

2장 캐묻지 않는 삶
자기 검열 없는 개의 삶
캐묻지 않는 삶의 가치
과연 캐묻는 삶이 더 우월한가
성찰은 인간에게 필요한가
진화, 흔적기관의 퇴화
자신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

3장 거울아, 거울아
시각만큼 후각도 중요한 개들의 세계
목욕을 해야할지언정 소똥에 구르는 게 낫다
‘그래, 저건 나야’와 ‘이건 내 거야’
보는 행위에 포함된 암시적 자기 인식
개들은 메타인지를 할 수 있는가
성찰은 인간만의 것이라는 ‘착각’
전념의 피조물과 의심의 피조물

4장 도박꾼의 자유
본성의 표현이자 분리의 표현인 자유
의식은 존재에 난 구멍
인식의 대상에는 의도성이 없다
고뇌, 결심이 소용없다는 깨달음
결심이 의미 있으려면 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뿌리 뽑힌 존재다

5장 착한 개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동을 하는 개
동물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가
동기의 비판적 검토
동기의 과도한 검토는 도덕적 실패
사람과 동기에 대한 도덕적 평가
동물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개에게 거울신경세포가 존재할 가능성
목줄 훈련, 감정과 억제의 복잡한 상호작용
개와 인간은 같은 방식으로 도덕적이다

6장 삶의 설계
이른 오후 인간과 개의 논리 구조 탐구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생각하는 인간
인간의 생각을 읽어내는 개들의 능력
인간은 개의 확장된 마음
직접 짖을 거라면 개를 왜 키우는가
개에게 인간의 이성은 수단일 뿐
계획을 조금만 덜 세우고 조금 더 항해한다면

7장 입스를 겪는 개
죽음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빛났던 휴고
개는 왜 인간보다 삶을 더 사랑하는가
객체로서의 몸과 주체로서의 몸
하나의 삶을 산 개와 두 삶을 사는 인간
견생에는 부조리가 없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철학에 감염되는 인간
인간은 입스를 겪는 개와 같다

8장 가끔 에덴을 바라보다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는 섀도
삶 속의 의미에 정답은 없다
객관적 가치와 주관적 몰입이 하나 되는 곳
인간은 삶 속 의미의 유무를 심판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서 오는 불안
본성에서 샘솟는 삶 속의 의미
견생이 인생보다 의미 있는 이유
행복이 솟아날 도약대가 없는 인간의 본성
반려견과 함께하면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더 읽어보면 좋은 책
감사의 글       

 




네 발의 철학자


섀도의 바위

섀도와 녹색 이구아나

매일 아침, 섀도와 나는 정원 아래쪽 대문으로 나가 집 뒤편 운하 제방으로 걸어간다. 운하 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는 처음 몇 초간 섀도는 목줄에 묶여 있다. 섀도와 사이가 좋지 못한 옆집 아메리칸 불독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과 같은 돌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목줄을 풀기 무섭게 녀석은 총알처럼 튀어 나간다.


달리는 방향은 북쪽이다. 100미터, 200미터, 300미터, 400미터, 그리고 서서히 멈추고는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온다. 나와 가까워질수록 보폭도 커지고 발놀림도 빨라진다. 그렇게 다가오다 나를 지나 남쪽으로 달린다. 100미터, 200미터, 아마 300미터일 거다. 둘 다 늙었다. 마침내 녀석은 걸음을 늦추고 크게 방향을 틀어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마이애미의 운하에 있는 우리는 이민자이다. 나는 영국 출신이지만 사우스 플로리다의 태양 아래 산 지 16년째이다. 섀도는 그중 6년을 나와 함께하고 있다. 섀도가 태어난 곳은 독일 서쪽 끝 자르브뤼켄 근처의 작은 마을 홈부르크이다. 동독 개들이 보통 그렇듯 셰퍼드치고는 몸집이 커서 신장은 약 76센티미터에 체중은 45킬로그램이 조금 못 된다. 언뜻 보면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빛이지만 자세히 보면 발가락 사이에 연갈색 털이 나 있어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 색을 띤 바이컬러다.


이 운하 제방의 또 다른 이민자는 중남미 태생의 녹색이구아나이다. 섀도가 운하를 남북으로 오가며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것도 이 녀석들 때문이다. 섀도의 1차 북방 출격 때는 30~40마리의 이구아나 떼가 1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북쪽의 동태를 파악하고 적절한 안전 조치를 취할 테니 이후 남쪽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다.


섀도의 우렁찬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이구아나들은 차례로 물에 뛰어들어 도망친다. 결연한 섀도의 노력 덕분에 매일 아침 이구아나 떼가 운하 반대편으로 추방되고 있다. 오후 산책길에 섀도가 제방을 따라 뛰면서 반대편 제방 위로 도망가 쉬고 있는 수백 마리 이구아나 떼를 노려보며 ‘그래, 너희 거기 있는 게 좋을 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낮에는 그런 지혜로운 행동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이구아나에게 밤은 망각의 시간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전날의 교훈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구아나들은 섀도의 산책 코스로 되돌아와 세세한 부분까지 똑같은 파충류 극장을 재현할 것이다.


본성에서 비롯된 행복과 조작된 행복

우리는 모두 이 운하 제방의 이민자인데, 특히 이구아나들은 불법 체류 중이라 당국의 가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다. 토종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이라 '침입종'으로 분류된다. 만약 그런 비난이 존재한다면 이는 불쾌하고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이자 현존하는 가장 성공적인 침입종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기나 할까?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해 전 세계에 침입했고, 지금은 배와 비행기로 이동 하며 외래종의 이동을 돕고 있다. 이구아나 퇴치 노력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독극물 살포가 포함된다. 이는 매우 시시포스적인, 슬프고도 부질없는 노력이다. 몇 주 못 가 주변 지역에서 유입된 이구아나들로 개체 수는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이구아나가 퇴치되고 주변 개체가 유입되기까지 몇 주 동안은, 이유는 달라도 나와 섀도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다.


나는 이구아나가 좋다. 이름을 붙여준 녀석도 많다. 가장 최근에는 '코키'라고 이름 붙인 녀석이 있는데, 끝까지 제방에서 버티다가 마지막 순간에 마지못해 물에 뛰어들어 도망가는 비행 임곗값이 매우 높은 녀석이다. 또 '볼트'는 등에 석궁 화살이 박혀 있어 그렇게 이름 지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속도가 느려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름만 봐도 무늬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스트라이피'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빅 포피'이다. 녀석들이 독극물을 먹고 하나둘 사라져가고 신규 이민자들이 유입될 때마다 에덴동산의 낙담한 아담인 나는 이구아나 작명을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슬픔은 섀도가 느끼는 참담함에는 명함도 못 내민다. 독극물을 살포한 다음 날 아침이면, 섀도는 적막한 광경에 혼란스러워한다. 녀석의 최초 북방 출격은 평소처럼 거창한 야단법석으로 시작하지만, 화들짝 놀라 물속으로 도망치는 이구아나가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서히 시들해진다. 그러면 섀도는 혹시 숨어 있는 녀석이 있나 해서 전략을 약간 수정해 여기저기 돌진해보고 전력 질주도 해본다. 하지만 헛일이다. 이제 섀도의 나머지 아침 산책은 형식적인 동작의 반복일 뿐이다. 평소 녀석의 건조한 메아리이다. 마치 간밤에 누군가 시시포스의 바위를 훔쳐 간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신들이 시시포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고 상정해보자. 바위와 언덕,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부질없는 노동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신들은 시시포스가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다. 기존 신화의 기본 전제처럼 시시포스는 그의 운명을 증오한 것이 아니라 신들의 개입으로 인해 자신의 과업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가파른 언덕으로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릴 때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신들은 이 기이한 욕망을 통한 영원한 충족을 그에게 선사했다.


기존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위엄 있는 존재였다. 전능하고도 사악한 신들이 시시포스에게 끔찍한 운명을 강요했다. 그에게는 자이런 운명을 강요한 신을 경멸하고 그 손에 망가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비극적이고 강렬한 위엄을 부여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가 에세이 《시지프 신화The Myth of Sisyphus》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라고 주장 혹은 조언했을 때 가진 생각이었을 것이다. 카뮈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 강렬한 위엄은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했을 때 사라진다. 기존 신화 속 위엄 있는 시시포스는 이제 더 멍청하고 착각에 빠진 시시포스로 대체되었다.


신화를 이런 식으로 재구성하면 섀도의 행복과 신들에게 속아 착각에 빠진 시시포스의 행복이 더욱 극명하게 대비된다. 시시포스의 행복은 그의 본성이나 정체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하지만 섀도의 행복은 가장 깊은 본성에서 비롯되고 분출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박꾼의 자유

고뇌, 결심이 소용없다는 깨달음

성찰은 자신과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 동시에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성찰을 통해 생각, 느낌, 믿음, 욕망, 희망, 두려움 등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관한 정신적 상태를 다루는 특정 범주가 있다. 우리가 행동하게 만드는 상태의 범주로, 여기에는 동기, 결심, 결정, 선택 등이 있다. 나의 성찰 능력으로 이들 중 어떤 것도 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사르트르의 일반 원칙이 적용된다. 나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동기, 결심, 결정, 선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먼저 해석해야 하고, 내가 부여하는 해석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자유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스피노자적인 개의 자유와는 매우 다르다. 이 자유가 가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르트르의 글은 난해하다. 희곡과 소설은 좀 다르지만, 적어도 그의 철학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글 이해하기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아주 유용한 예 하나를 제시한다. 우리의 자유는 '자기의 자유의사로 더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도박꾼이 도박판에 다가가는 순간 그의 모든 결심이 일시에 녹아내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도박꾼의 자유이다. 도박꾼은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인식하고 있다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그는 이 결심을 수년, 아니 수십 년이라는 꽤 오랜 기간 조심스럽게 세우고 다져왔으리라. 가끔은 주먹을 꼭 쥐고 이를 악문 채 버텼을 것이다. 그 결심은 지금까지 그의 행동을 안내하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도박판 앞에 서서 그 결심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도박꾼은 인간 자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도박꾼은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 결심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을 사르트르는 '고뇌'라고 부른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장벽을 쌓고 자신을 결심이라는 마법의 원 안에 가둔 뒤, 나는 무엇도 나를 도박하지 못하게 막지 못한다는 것을 고뇌 속에서 깨닫는다. 그 이유는 도박꾼이 자신의 결심이나 동기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의식이 동기에게 그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는 뜻이다. 그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도박꾼의 결심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의미든 가지려면 도박꾼의 해석이 우선해야 한다. 이 결심은 어제처럼 오늘도 의무적이고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구속력 있는 명령일까? 이는 하나의 해석일 것이다. 아니면 이제 안심하고 기꺼이 내던져도 될 어제의 변덕일까? 그 또한 하나의 해석이다.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고, 도박꾼이 신중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각 해석은 결심의 의미를 확정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해석이 없다면 결심은 의미가 없다.


이는 사르트르의 일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도박꾼이 결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채택하라는 강요를 받는다면, 이는 다른 해석보다 그 해석을 선호하게 될 새로운 동기가 된다. 하지만 도박꾼이 이 동기를 인식한다면(동기의 인식은 스피노자적인 개의 자유와 대비되는 인간의 특정한 자유를 형성하는 요소이다), 그 동기는 무력해진다. 하나의 해석을 다른 해석보다 선호하게 되는 동기는 그 자체로 해석이 필요하다. 즉 원래의 동기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다른 해석에 비해 선호하는 동기에 대해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해석의 무한 회귀로 이어지며, 이 회귀를 멈출 방법은 없다. 우리는 '어떤 것도 동기에 대한 특정 해석을 강요할 수 없다'는 추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결정하고 결심하고 선택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 즉 이런 의미의 자유의 인식이 바로 고뇌이다.



착한 개

동물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동기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혼동한 것은 칸트의 심각한 오류이다. 안타깝게도 칸트는 이 혼동에 또 다른 혼동을 더해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덕적 행동이 되려면 동기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가정한 후(사실 그렇지 않지만), 동기에 대한 통제가 비판적 검토라는 형태의 성찰에서 온다는 비논리적인 설명을 했다. '이 동기를 수용해야 할까, 아니면 거부해야 할까?', '이 동기에 따라 행동해야 할까, 아니면 저항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정신적으로) 던진 후, 선호하는 도덕 원칙을 이 질문에 적용하면 그 동기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게 된다. 혹은 그렇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앞 장에서 사르트르의 주장을 알아보았기에, 비판적 검토는 통제력을 제공한다는 칸트의 가정은 심히 의문스럽고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만약 사르트르의 주장이 맞는다면, 동기의 비판적 검토는 오히려 동기에 대한 통제를 잃게 만든다. 자신의 동기를 인식하게 되면 본질적인 의미나 의도성을 더는 갖지 않게 된다. 동기의 의미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특정한 하나의 해석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동기에 대한 통제는커녕, 비판적 검토는 동기를 근거 없게 만든다. 동기를 통제하고 싶은가? 사르트르가 맞는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동기의 비판적 검토이다.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칸트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최대한 논란의 여지가 적은 가정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칸트의 견해는 굳이 사르트르의 견해를 믿지 않더라도 문제점이 보일만큼 명백하다. 가끔 특정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우리는 자신과 우리의 견해에 비추어 불편한 증거를 무시하고 없는 다른 증거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한 죄가 있다. 정치 운동과 정치적 체계가 모두 그러한 기반 위에 구축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오늘날 우리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뉴스 플랫폼에 대한 접근조차 거부하는 동기화된 추론 현상에 기반한 집단 극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적인 현상의 결과로 인해, 동기를 검토하는 자체가 자기중심적인 행동일 수 있다. 실제로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 자기 사례든 남의 사례든,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이 드러내는 바이다. 그러한 가능성 자체가 동기의 비판적 검토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을 드러낸다. 동기의 비판적 검토에서, 비판적 검토를 통제할 수 없다면 동기도 통제할 수 없다. 동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방식과 그 결과로 도출되는 결론을 포함한 비판적 검토를 통제할 수 있어야 동기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통제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생각과는 달리 비판적 검토는 통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동기 수준에서 드러나는 통제의 문제가 동기의 비판적 검토 수준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회귀 문제의 또 다른 사례이다. 특정 현상(동기에 대한 통제)을 설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가정하면(비판적 검토) 그 가정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비판적 검토는 통제를 전제로 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통제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칸트는 두 가지 설명 모두에서 틀렸을 수 있다. 도덕적으로 좋든 나쁘든 동기의 상태에 통제가 필요하지는 않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동기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통제력을 얻게 되지도 않는다. 이것으로 나의 부정적인 논증은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의 정설에 따르면, 인간만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이 정통 관념이 도덕적 행동의 본질에 대한 여러 타당성 없는 가정에 기반한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이를 해체하려고 노력했다.


즉 동기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든지, 비판적 검토라고 알려진 특정한 형태의 성찰에 의해 그러한 통제가 확보된다는 가정 말이다. 이 부정적 논증이 인정받는다면(그리고 그 전망에 대해 내가 비정상적으로 낙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동물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삶의 설계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생각하는 인간

고대 스토아학파 철학자 크리시포스가 토끼를 쫓는 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땅에 코를 대고 달리다가 세 갈래 길에 도착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길의 냄새를 재빠르게 맡더니, 양 갈래 길 어디에서도 토끼 냄새가 나지 않자, 세 번째 길은 냄새를 맡을 것도 없이 즉각 길을 따라 내달린다. 출처가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 추론 능력이 개에게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A, B, C 중 하나인데,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그렇다면 C이다.


이는 선언삼단논법 또는 라틴어 표현으로 부정적 긍정식(대전제의 선언지 중 어느 것을 소전제에서 부정하여 결론에서 나머지 선언지를 긍정하는 형식-옮긴이)으로 알려진 논리적 추론에서 선언지의 수가 세 개인 버전이다. 선언지가 두 개인 표준 형식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A 또는 B이다.

A가 아니다.

그러므로 B이다.


크리시포스가 묘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개는 적어도 한 가지 유형의 논리적 추론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개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개에게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조건이 동등하다면, 그리고 피할 수 있다면, 그러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최근 들어서는 어떤 동물이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지 밝히려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검사하기가 비교적 쉬워 선언삼단논법 수행능력이 주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이 늘 그렇듯 여기에는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싶은 인간의 끊임없는 추구에서 비롯한다. 여러 차례 살펴본 대로, 인류의 생각만큼이나 오래된 인간의 집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고 더 나아가 우월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특징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가장 우월한 특성으로 선호된 것은 이성이다.


플라톤은 인간만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에 동의하며, 동물은 영양을 섭취하고 움직이는 데 관여하는 영양과 운동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만은 이성적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 영혼이 있고 그로 인해 불멸한다' 고 했던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표현은 인간의 이러한 자부심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반면 동물은 생물학적 인형에 불과하다고 했다. 데카르트 당시 유행했던 생제르맹 왕궁 정원에 있는 유압 인형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방문객이 특정 타일을 밟으면 목욕하는 비너스와 넵투누스를 향해 물이 방출되어, 비너스는 몸을 가리려 하고 넵투누스는 삼지창을 휘두르며 방문객에게 달려든다. 데카르트에게 영혼이 없는 육체란 이런 것이다. 기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기 때문에 동물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계일 뿐이다. 동물에게는 생각도 감정도 없다. 불이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빈집인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인간만이 이성적인 존재라면, 다른 동물들은 선언삼단논법 같은 논리적 추론을 수행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동물은 논리 법칙에 따라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철학자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이 아닌 여러 종의 동물에게서 그러한 추론 능력이 나타났다. 이런 능력의 입증에 사용된 실험은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형의 형태를 띠었다. 실험 동물에게 두 개의 불투명한 컵 A와 B를 제시한다. 두 컵 모두 처음에는 비어 있고 동물에게도 빈 컵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실험자는 컵 중 하나에 미끼를 넣는데, 불투명한 장벽에 가려져 어떤 컵인지는 동물이 볼 수 없다. 그런 다음 컵을 투명한 뚜껑으로 밀폐한다.


마지막으로 실험자는 하나의 컵, 예를 들어 컵 A가 비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동물에게 두 개의 컵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한다. 만약 그 동물이 선언삼단논법을 수행할 수 있다면, 컵 B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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