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마을 사우나
프롤로그
엄마가 죽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행복한 요양병원’의 원장님은 엄마의 마지막이 더없이 평온했노라며, 그간 한 번도 병원을 찾아오지 않은 민지를 애써 위로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강원도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였던 건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불안과 외로움이 위액의 신맛과 함께 목구멍을 넘나들었다.
병실을 둘러보았다. 엄마의 마지막 두 달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곱게 접은 바지, 얇은 스웨터, 두툼한 공책 한 권을 비롯한 약간의 서류 뭉치. 침대에 기대어 앉아 우둘투둘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에 손을 대자 차가웠던 손끝에 열이 올랐다. 얼굴이 후끈거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찌릿한 통증이 아래턱부터 관자놀이까지 찾아들었다. 엄마가 남긴 짐은 생각보다 더 단출했다. 당혹스러운 건 그 적은 유품들조차도 챙기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었다. 화장로에 유품들을 같이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적갈색 가죽 다이어리 아래 스테이플러로 철한 종이 뭉치가 보였다.
등기권리증? 한평생 접해 볼 일 없던 단어였다. 등기권리증을 집어 드는 민지의 손놀림이 부산스러워졌다. 부동산이었다. 먹고 죽을 돈 백만 원도 없다고 소리를 지르던 엄마에게 무려 아파트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이어리를 열자 포켓에 꽂혀 있는 낡은 통장이 눈에 띄었다. 통장이 마지막으로 정리된 날짜는 10여 년 전, 현재의 잔액은 알 수 없었지만 다이어리 중간중간 꽂혀 있는 현금은 엄마가 빈털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손때가 묻은 가죽 다이어리에는 정갈한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엄마가 글씨를 이렇게 잘 썼었나 싶을 정도였다. 절망과 현학이 뒤섞인 김미숙의 지난 시간들을 훔쳐보다 민지는 어딘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다이어리를 덮어 버렸다. 그간 엄마가 느꼈을 감정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과거를 살피고 보듬는 건 어쩐지 딸인 자신의 영역이 아니지 싶었다. 그럼에도 가름끈처럼 숨겨진 현금이 남아 있을까 싶어 얇은 종이들을 빠르게 넘겨 보는데, 진짜 가름끈이 끼워져 있는 페이지가 활짝 펼쳐졌다. 지난주 목요일 날짜였다.
민지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 위에 멈추었다.
사우나 바닥에 묻어 놓은 3천만 원을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티라미수케이크
왕복 이차선 도로를 달리다 녹음이 우거진 삼거리를 지나가면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 옆으로 넓은 분지가 등장했다. 평균해발고도가 9백 미터에 달한다는 태백보다야 고도가 낮았지만, 자동차로 급경사를 오르다 보면 한쪽 귀가 금세 먹먹해지는 동네였다. 민지는 마을 초입 내리막 커브에서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커다란 느티나무에 가려져 있던 붉은색 굴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우나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 인지하고 나니 세월의 흔적을 입은 ‘여관’, ‘목욕탕’이라는 글자가 제법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얼마 전 페인트칠을 새로 한 건물처럼 보였다.
‘목욕’이라고 적혀 있는 어두운 유리문을 밀었다. 그런데 카운터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불이 들어와 있는 곳은 남탕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민지는 크게 숨을 내뱉은 후 남탕의 손잡이를 잡았다. 질끈 감은 두 눈꺼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짙은 색 필름지가 붙어 있던 남탕 안에서 풍겨온 건 특유의 스킨 냄새가 아닌 고소한 커피 향이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민지를 응망했다.
“사우나 찾아오셨어요? 죄송하지만 사우나는 몇 달 전에 영업을 종료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민지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남탕이었지만 남탕이 아니었다. 사용감 있어 보이는 소파 두 개와 나무 의자 여럿, 디자인이 제각각인 테이블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이곳은 개업을 준비 중인 것처럼 보이는, 카페였다. 목욕탕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안쪽에 서 있던 남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커피 드세요?”
“매일 마시죠.”
“제가 한 잔 대접할게요.”
낯선 이의 친절은 긴장을 완화시켜 주는 최고의 처방전이었다. 민지는 한껏 쌓여 있던 긴장이 풀리며 온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꼈다. 새어 나오려는 하품을 요령 있게 삼키고 서둘러 작은 냉장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쇼케이스 안에는 알록달록한 케이크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 조각 케이크들도 다 판매하시는 거죠?”
“아, 모형이요? 나중에 정식으로 오픈하면 여기는 실제 케이크들로 바꿀 거고, 거기에 있는 모형들은 입구 쪽에 진열해 놓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민지가 모형 케이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까망베르더블치즈케이크, 블랙체리타르트초코케이크, 포테이토애플케이크, 로라케이크...... 로라케이크?
“이건.......”
‘로라케이크’라는 단어를 들은 남자는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갓 내린 커피를 쇼케이스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로라케이크 모형을 꺼내들었다.
“티라미수케이크예요. 겉모습은 재를 뒤집어쓴 것 같아 보여도 속은 한없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사실 여기 있는 케이크들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직접 만드는 케이크이기도 해요. 그냥 납품을 받아도 되지만 이건 누군가에 대한 헌사와 위로가 담겨 있는 빵이라서.”
남자의 시선이 로라케이크의 모형 위에서 민지의 얼굴로 옮겨 갔다. 그는 민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민지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달방
“아직도 개업 안 하신 거죠?”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요.”
“지금 오픈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카페는 그런데 여탕이랑 2층이 아직 공사 중이어서요. 여기, 이래 봬도 1인 숍이거든요.”
“뭐 준비하시는데요? 2층은 원래 여관 아니었어요?”
“2층엔 방이 총 여덟 개가 있어요. 관리인실 겸 비품 창고까지 하면 아홉 개. 처음엔 어땠는지 몰라도 삼촌 돌아가시기 전까진 달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이에요. 그런데 달방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아요?”
“음, 달방이라. 달이 보이는 방이란 의미는 아닐 거고. 다달이 사는 방? 단기 임대? 에어비앤비 같은 거 아니에요?”
“땡. 진짜 달이 잘 보여서 달방이에요.”
“정말요?”
“아니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참던 정훈이 민지를 마주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검은 눈동자는 꽤 호의적이고 장난스러워 보였다.
“저, 지금 차에 이불하고 베개 갖고 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아니, 당연히 실례겠지만, 오늘 밤만 2층에서 자고 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숙박비는 지불할게요.”
1층 카페의 불이 꺼지고 정훈의 차가 출발하기까지는 방에 이불을 펴고도 네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세기 홍콩이 콘셉트인 건지 깡촌 게스트 하우스의 벽지는 보급형 레스케이프 호텔에 들어온 것처럼 지나치게 화려했다. 짙은 초록색 벽지에 프린트된 화려한 문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지가 정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아직 여탕의 리모델링을 진행하지 않았다.
“뭐야.”
민지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명 아래 드러난 공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정훈은 여탕의 리모델링을 두고 ‘갈 길이 구만리’라 표현했지만 그건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여탕’의 내부는 리모델링에 더해 청소까지 마무리되어 있었다.
단차를 내어 만든 오픈형 샤워부스의 한쪽 구석에는 샴푸와 비누들이 놓여 있었다. 사용감이 느껴지는 목욕용품들을 훑어보던 민지가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였다.
- 에이 씨, 날도 더운데 에어컨도 없고. 그래도 목욕탕이라 씻고는 갈 수 있어 그거 하나 다행이네.
도망가거나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성대를 잃어버린 것처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가슴께로 올려 드는데,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와 또 다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번엔 조금 더 얇고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 그러니까 말이야. 타일 공사를 이 돈 받고 해서 남는 게 있겠어? 아무리 정훈이 부탁이어도 그렇지.
- 그게 바로 의리라는 거다. 그래도 반년 넘게 매일 얼굴 본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텅 빈 목욕탕 허공을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누 거품이었다.
송 씨 아저씨
날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한 민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간방은 휑한 거실과는 다르게 옷장, 문갑, 장식장 따위가 가득 차 있는 맥시멀리스트의 공간이었다. 반전 아닌 반전은 놓여 있는 가구 대부분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서연이 청소를 하며 내용물들을 정리한 것인지 아니면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전 처분을 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민지에게는 어차피 모두가 버릴 물건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완전히 비어 있는 줄 알았던 문갑 가장 오른쪽 서랍에 작은 액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랍 가장 구석진 곳에 놓여 있던 액자에는 원피스를 입은 엄마와, 또 그런 엄마를 찍어 주고 있는 낯선 남자가 함께 담겨 있었다. 남자는 전파사 유리창에 반사되어 꽤 선명하게 찍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얼굴이 사진에 같이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탄광에서 일했던 엄마가 다방 레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안 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다. 악의 없는 어린이들은 너희 엄마 다방 레지라며? 진짜야? 하는 질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코앞에서 해 댔다. 아니, 사실 악의를 가졌던 순수악들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너희 엄마 창녀라며? 커피 들고 나가서 몸 파는 일 하는 게 창녀 아니야? 라는 비아냥거림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지껄였다. 골목대장이었던 민지는 한순간 외톨이가 되었다. 혼자 음악을 듣고 혼자 점심을 먹는, 과묵한 아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친구가 많지 않다는 건 서글프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서글플 수는 있어도 불편하지는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 학교에 혼자만 친구가 없다는 건 서글프기도 불편하기도 한 일이었다. 민지의 학창 시절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서글펐고 불편했다. 민지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로라케이크
사우나에서 빠져나가는 손님들을 본 건 불과 10여 분 전의 일이었다. ‘여탕’의 기본 이용 시간은 인원수 제한 없는 3시간이었지만, 몇몇 손님들은 이용 안내를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4시간, 5시간씩 목욕탕을 이용했다. 이번 손님들 역시 5시간 가까이 목욕탕을 이용한 사람들이었다. 목욕탕에선 비누 냄새가 아닌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전기가 온 듯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민지가 어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로라케이크는 어쩌다 만들게 된 거예요?”
“로라 여사님을 기리기 위해서요.”
“로라 여사님이 누군지 알아요?”
“이 동네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그럼 혹시 나는 누군지 알아요?”
순간 민지와 정훈이 서로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두 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눈빛은 다른 온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훈 씨 설백고 나온 거 맞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낸 것처럼 침묵이 석탄가루처럼 내려앉았다. 오랜 시간 정훈은 입을 열지 못했다. 충분히 얼지 못한 호수 한가운데 돌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그들 사이에는 예상치 못한 속도로 균열이 번져 나갔다.
“민지 씨는 고등학교 한 학년 선배였어요. 공부를 잘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고요. 학교 동판에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니까.”
“동판이요?”
“저 졸업하기 직전에 3층 복도에 동판이 걸렸거든요. 성은 선배 아버지가.......”
“잠깐. 홍성은? 지금 홍성은 얘기하는 거예요?”
고등학생이던 시절, 남들은 어리다지만 결코 어리지만은 않았던 그 시절, 대부분은 민지를 없는 사람 취급했지만 홍성은을 중심으로 한 무리는 민지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괴롭힘을 꾸준히 일삼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옆 칸을 타고 올라와 낄낄거렸고, 브래지어 후크를 망가뜨려 가슴을 웅크리고 다니게 만들었다. 등하교를 할 때 오토바이 몇 대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서 있던 패거리가 떠올랐다. 그 안에 정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를 더 이상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민지에게 학창 시절이란 도려낼 수만 있다면 머리통 절반을 떼어 내서라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화로 속 고구마처럼 얼굴이 붉어진 민지가 몸을 틀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한 걸음을 떼려는 찰나, 정훈이 민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팔목에 뜨거운 손바닥이 맞닿았다. 정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인면 뒷산 중턱에 폐건물 하나가 있어요. 가정집은 아니고, 과거 사우나로 사용했던 건물이요. 선인 1차 뒷길로도 갈 수 있고요.”
“그곳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다 누가 번개탄을 무더기로 태웠나 봐요. 원래대로라면 문을 열고 환기를 했어야 하지만 그러기엔 다들 너무 엉망으로 취해 있어서. 아마 30명인가 40명인가 있었을 거예요. 말씀하신 패거리가. 그 사우나 안에. 멍청한 놈들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편도가 잘려 목소리를 아예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때 저희를 구해 준 분이 로라 여사님이세요.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가 열리지 않자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도끼로 나무 합판을 내리찍으셨대요. 그 건물이 지붕은 목재였거든요. 도끼질을 하다 꽝꽝 언 얼음 때문에 1층으로 떨어지셨는데, 부러진 발목을 끌고 올라가 결국 혼자 지붕을 부수는 데 성공하셨어요. 어떻게 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낸 불도 꺼 주시고, 그때가 저 수능 보고 나서, 그러니까 아직 고3 때였나.”
“강대병원까지 실려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부엌에서 강소주를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안주도 하나 없이. 사고깨나 치고 다녔던 10대답게 얼른 상황 파악부터 하고 무릎을 꿇었는데요. 그런데요. 아버지가 우시더라고요. 아이처럼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태어나서 아빠가 우는 걸 처음 본 날이라서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다, 하면서 싹싹 빌었는데요. 아버지가 무릎을 꿇으셨어요.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내가 죽일 놈이라고. 그게 저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는 건 다음 날에야 알았어요. 로라 여사님 댁에 끌려갔거든요. 저는 감사 인사를 드리러, 아버지는 용서를 빌기 위해.”
손목을 감싸 쥔 정훈의 손바닥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불덩이처럼 붉어진 그의 귓불을 내려다보며 민지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때 처음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방관자였다는 걸.”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는 자신이 춤을 추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말릴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며, 로라 여사님께 당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날은 이상하게 바닥이 미끄러웠다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처럼 입을 다물었다고.”
지방에 삽니다, 놀랍게도 청년이고요
민지가 무릎 위에 놓인 검은색 비닐봉지를 내려보았다. 서걱거리는 비닐봉지 안엔 신문지로 꽁꽁 둘러싼 3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설백종합버스터미널은 생각보다 더 낙후한 장소였다. 80년대 혹은 90년대 어디쯤엔가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대합실에선 아직도 긴 연통이 연결된 연탄난로로 난방을 했다. 쿠션도 없는 성당용 나무 벤치가 서넛 놓여 있었고, 매표소 앞 고랭지 배추 박스에는 새 연탄 몇 장이 연탄집게와 함께 담겨 있었다.
“아예 떠나려고 그러죠?”
인기척을 느낀 건 종이컵 안의 커피 알이 다 녹았을 무렵이었다. 고개를 돌린 민지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미간에는 힘이 들어갔다. 심장박동이 거세졌다. 어금니를 꽉 물어야 했다.
손아귀에 힘이 빠져 커피가 출렁거렸다. 민지는 흐물거리는 종이컵을 내려놓지 않고 더 세게 쥐었다. 말을 걸어 온 이는 점퍼 안에 품고 있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 꽤 묵직해 보이는 봉지를 그는 민지 쪽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무릎 사이에 손을 모은 상대는 고개 한 번을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소주 냄새를 풍기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3천만 원이에요.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미숙 씨한테 주기로 했던 3천만 원. 엄마 유택 동산에 모신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진 같은 거 남아 있으면 보고 전해 줘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살아 있을 때 주지 못해서 면목이 없다고.”
남자를 막아섰다.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죄인처럼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민지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되밀었다.
“가져가세요.”
“내 돈이 아닙니다.”
“엄마한테 채무가 있으셨어요? 아니면.......”
“엄마한테 뭐라고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죽음에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몇 있어요. 그 당시 작업반장이랑 그 패거리들,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던 샌님들, 그리고 모든 걸 지켜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우리들. 미숙 씨가 결혼 전에 일했던 곳 사장님이 신문사 기자들을 알아 언론에 알리려고 했던 걸, 그 사람들이 돈을 쥐여 주며 억지로 막았어요. 미숙 씨한테 선탄부 일자리도 주고, 위로금 명목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3천만 원도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3천만 원이면 지금도 적은 돈이 아닌데 그 때는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거든요.”
역한 탄내가 풍겨 왔다. 어린 시절 옆집에서 쓰레기를 태우면 날아왔던 매캐한 냄새였다. 미간을 찌푸린 민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앞 차도의 새까만 아스팔트가 석탄가루가 내려앉은 검은 천처럼 일렁거렸다.
“그날 발파한 막장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면, 용철이가 나대신 카나리아 역할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아주 미세했으니 상관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가스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나도 며칠을 미식거리고 머리가 띵했는데,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온 용철이는, 용철이 그 자식은.......”
남자가 말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난쟁이라 불렸던 용철에게 미끄러운 목욕탕에서 춤을 추라고 부추긴 직접 가해자 수십 명과 진실을 알면서도 묻어 버린 사업소, 더해서 모든 걸 지켜봤으면서도 그저 함께 낄낄거렸던 수백 명의 동료들이 함께 3천만 원을 만들어 주기로 했었다는 말만큼은 전세보증금을 떼인 딸에게 돈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던 엄마의 목소리만큼이나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그때 미숙 씨 산달이 아마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였지, 라는 송 씨의 말에 민지의 얼굴이 힘없이 무너졌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은 민지의 무릎 위였다. 3천만 원이 담긴 검은 봉지가 찢어질 듯 팽팽했다. 봉지를 잡고 있는 허연 손등에 검푸른 핏줄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