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돌 개인이 찾고자 한 진실이 그를 둘러싼 ‘더 큰 나’, 다시 말해 우리 민족의아리랑과 만나게 되는 감동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에게 노래는,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며,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커다란 것’이었기 때문이다.
■ 저자 한돌
1953년 거제에서 태어나봄내(春川)에서 자랐다. 그의 작업실은 산(山)이다.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캐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들여다보면 이 땅의 소중한 자연과 소외된 이웃,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다. "타래"는 흔히 말하는 포크송(folksong)에 대한 한돌 자신의 노래 양식이다. 이 책은 어느 날 불현듯 자취를 감춰버린 "타래"를 찾기 위해 14년 동안 방황했던 세월이 담긴역사이자, 앞날에 대한 다짐이다. 그가 캔 노래들은 〈홀로 아리랑〉, 〈터〉, 〈개똥벌레〉, 〈여울목〉, 〈조율〉, 〈못생긴 얼굴〉,〈외사랑〉, 〈꼴찌를 위하여〉 등 백여 곡에 이른다.
■ 차례
타래나무 한 그루
1. 꿈 나들이
머나먼 아리랑
아버지의 마지막심부름
누비산
2. 깨진 거울 속의 평화
예쁜 노란 기차
낯선 슬픔
필름 한 통
3.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슬픔
하얀 달
특종
노래는 떠나가고
4. 다시 가는 길
그리운 눈물
봄눈
한뫼줄기
글을 마치며
저 산 어딘가에 아리랑이 있겠지
꿈 나들이
머나먼 아리랑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보물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물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닌 꿈을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다이아몬드, 진주 같은 보석을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보물은 노래다. 내가 이 산 저 산 노래를 캐러 다니는 것도, 알고 보면 보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산만 보면 아리랑이 생각난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아니면 산바람에 실려 떠도는 아리랑은 내가 캐고 싶은 보물 가운데 최고의 보물이다.
지금 나는 큰 보물을 찾으러 간다. 온 겨레가 함께 부를 아리랑을 찾으러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소풍 가서 하던 보물찾기에서는 한 번도 찾아내지 못했던 보물, 이번에는 꼭 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내가 아리랑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은, 흔히 말하듯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지방 특유의 아리랑을 채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로지 우리의 정서를 찾아가는 일이다.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산다는 옌벤만 하더라도 우리의 1960~1970년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산다는 것은 그 터에 오래도록 관습이 이어져오고 정서가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들을 되찾으려면 그곳에 가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정서를 아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아리랑을 아주 큰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여덟시, 큰 배는 중국에 도착했다. 나는 멍청하게도 도착하고 나서야 그곳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국으로 가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어느 항에 도착하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열 명이었다. 나는 처음에 아는 사람 서너 명이 떠나는 단출한 여행인줄 알았다. 내가 백두산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동무가 같이 가보자고 해서 오게 된 것인데, 나중에 보니까 다른 모임에 내가 끼어서 가는 꼴이 되었다. 배 타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서먹서먹하기는 배에서 내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오후. 베이징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옌타이 역으로 갔다.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라 모든 것이 궁금했는데 달리는 기차 안 풍경은 생각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베이징 역을 떠난 지 하루만에 옌지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인지 아니면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인지, 대합실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마중 나온 형들과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만 아버지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같은 피가 흐르는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일까. 나는 옌지의 하늘로부터, 그리고 첫 디딤에서 전달되어오는 땅울림으로부터 조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도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밥 짓는 냄새가 멀리서 놀고 있는 내 코에까지 날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어머니 냄새이기도 했다. 슬픔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에 나는 남몰래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를 여러 번 보았다. 삼 학년이 되고 나서 나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이 원산에서 가까운 어느 산골 마을이라는 것도, 어린 삼 남매를 그곳에 두고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슬픔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숙소에 짐을 맡기고 각자 필요한 것만 챙겨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관광철에는 천문봉 아래까지 운행하는 차들이 많이 있지만 입산 통제 기간이라 그런 차들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보호국 직원에게 갔다 오니 잠시 뒤에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관광철 때보다 조금 많은 돈을 지불하고 한 차에 모두 올라탔다. 그런데 하늘못 대문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커다란 장애물이 나타났다. 길 한가운데 집채만한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기사는 이런 장애물이 또 있을 거라면서 못 가겠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한 일행들은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걷고 싶은 대로 걸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바람이 우리를 떠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봉(2670m)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눈어림으로 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데 그게 또 만만치가 않았다. 눈에 푹푹 빠지면서 마지막 비탈길을 오르자 숨쉬기가 힘들 정도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아, 저기가 하늘못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흐렸지만 하늘못은 잿빛 안개로 채워져 있었다. 하늘못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남들은 백두산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간다는데 바람 때문에 눈물은커녕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인천항을 떠난 지 열이틀 만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백두산을 찾아왔건만 보물은커녕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나는 백두산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었단 말인가. 백두산을 보면 보물이 마구 쏟아지는 줄 알았다. 철저한 준비도 없이 느낌 하나로 아리랑을 찾겠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아버지의 마지막 심부름
어느 날, 사진 하는 안 동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년 전 중국 가는 배 안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놀부’라고 불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백두산에서 내쫓겼을 때, 그는 동료와 그곳에 남아 일을 할 거라고 했었다. 그 뒤 여러 차례 백두산을 오가며 많은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갑다며 백두산 사진집을 선물했다. 사진집을 펼치는 순간 나는 안 동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백두산과의 두 번째 만남은 그렇게 안 동지와 함께 하게 되었다. 달라붙는 마지막 더위를 밀어내고, 바람 소리 요란한 하얀 백두산을 향해 선양행 비행기를 탔다.
전쟁이 일어난 그 해 겨울, 아버지는 큰아버지 댁(함경남도 영흥군 선흥면 자산리)에 열 살, 네 살 난 두 아들과 일곱 살 난 딸아이를 맡겼다. 곧 데리러 온다고 해도 아이들은 막무가내로 울며불며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가까스로 아이들을 떼어놓고 피난길에 오른 어머니와 아버지는 쿵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주 잠시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 그것이 아버지가 본 고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흥남 부두에서 피난 배를 탔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휴전이 성립되던 그 해 시월,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가자면서 아버지는 강원도 봄내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고향 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피난 내려올 때 사진 한 장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북에 살고 있는 아버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두 형들과 누나의 모습도 알지 못한다. 1983년 여름, 대대적으로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진행될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여의도에 좀 갔다 오라면서 헤어진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 나에게 주었다. 이런 심부름을 시키는 걸 보면 아버지는 혹시나 북에 두고 온 자식들이 여기 내려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이름들을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아버지한테 말했다.
“못 찾았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북에 살고 있는 형들과 누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아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나오지도 않는 코를 풀며 애써 헛기침을 했다. 나는 아버지가 적어준 이름들을 열심히 찾아보지 않은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백두산에 올라서면 내 나라를 내려다볼 수 있을 거라는 만화 같은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백두산에 가는 건 아니었다. 오로지 아리랑을 캐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온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아리랑을 캘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아리랑을 헤어진 가족들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게 된다면 비록 몸은 오고 갈 수 없지만 슬픈 매듭은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노래 한 뿌리도 제대로 캐지 못하면서 마음만 앞서는 것이 그렇다. 나는 그런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노래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때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기상소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다. 몇몇 관광객들이 천문봉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기상소 건물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년 전 백두산에 왔을 때는 유령의 집처럼 을씨년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늑하게 보였다. 저녁을 해먹고 나니 어둠이 내려온 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잠도 오지 않고, 문득 밤하늘이 보고 싶었다. 현관문을 나서려다 예기치 않은 풍경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칼바람 대신 포근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감쌌고 관광객들의 발자국들로 얼룩졌던 눈밭도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게다가 새하얀 눈밭에는 휘영청 밝은 달빛과 함께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불현듯 북받치는 아버지의 아리랑이 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땅에 묻히기 전에 나는 떠돌고 있던 아버지의 아리랑을 내 마음속에 넣었다. 언젠가 두 형과 누나를 만나면 새카맣게 타버린 아버지의 아리랑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북에 살고 있는 두 형과 누나를 찾아가 아버지의 아리랑을 전해주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통일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 고향에 다녀올 수만 있으면 좋겠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그저 오고 갈 수만 있어도 나는 그것이 통일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자꾸만 말씀하셨다.
“통일이 되면, 네 형들과 누나를 꼭 만나거라. 만나거든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주어라. 꼭!”
누비산
하늘못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긴 해도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아 더디 움직여야 하는 것이 조금 답답할 뿐이었다. 호수 물이 빠져나가는 달문 쪽에는 여러 종류의 쓰레기들이 쌓여 출렁대고 있었다. 그 쓰레기 가운데 으뜸으로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폐였다. 대부분 단위가 낮은 지폐였지만 그것을 왜 하늘못에 날려보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산신령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그러는 건지, 아무튼 쓰레기가 돼버린 돈은 달문뿐만 아니라 호숫가 주변에도 많이 굴러다녔다.
드디어 하늘못에 손을 담갔다. 나는 솟구치는 감격을 억누르고 온 겨레의 염원을 전해주기 위해 마음을 모았다. 그런데 막상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을 담그고 있던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통일이 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에 통일을 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때 우리의 염원은 또 무엇이 되는 걸까.
창바이로 가는 길. 그 길은 처음 가는 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길은 지루할 정도로 비슷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검문소가 들어왔다. 어느새 창바이에 들어온 모양이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십 미터도 채 안 되어 보이는 강 건너편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둑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산 아래쪽에는 빈 공장들과 몇 채의 빈집들이 보였다. 아! 바로 저기가 혜산이고, 저 강이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뭉게구름 푸른 하늘 아래서 그저 평화롭게 흐를 뿐이었다.
창바이에는 번화가가 아예 없는 듯하다. 나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강물을 따라 걸었다. 굽이돌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림짐작으로 한 삼사백 미터쯤 되어 보이는 산인데,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숲은 간데 없고 산 전체가 온통 밭으로만 되어 있는, 그야말로 나무 한 그루 없는 그런 산이 내 가슴을 쳤다. 그 산을 보고 있으려니까 커다란 누이이불을 덮고 자는 산 같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펼쳐놓은 커다란 조각보 같기도 했다. 혹시 국경지대라 숲을 없애버린 것 아닐까.
산이 헐벗으면 창피해지는 건 산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창피함을 아는 사람들은 헐벗은 산을 되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을 것이다. 차라리 온 겨레가 한꺼번에 창피해져서 헐벗은 통일동산에 나무 한 그루씩 심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창피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산을 위해서 심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통일 동산에 푸른 잎 생겨나면 안타까운 저 누비산도 제 이름을 되찾겠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슬픔
하얀 달
며칠 번부터 압록강의 처음을 보고 싶어했다. 아스팔트길에서 흙길로 접어들자마자 차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마술에 걸린 듯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더운 바람에 살랑대는 나무 잎사귀와 흘러가는 구름을 빼고는 마을은 거의 정지된 화면처럼 평화스러웠다. 검문소가 보였다. 이렇게 깊은 산 속에 검문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긴장이 조금 풀리기는 했으나 더는 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오히려 맥이 풀리고 말았다. 며칠 전 큰비가 와서는 길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조금만 걸어갔다 오면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잠시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는 조심해서 갔다 오라며 허락을 해주었다. 그들의 친절이 미국 담배 한 보루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씁쓸함이 느껴졌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내 땅을 밟고 가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남의 나라에 와서 검문을 받고 내 나라 강을 보러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 끓는 일인가.
기우뚱기우뚱 꺼진 길을 걸어 마주 보이는 오르막길로 올라가 한 백여 미터 걸으니 강 건너편에 너와 지붕들이 보였다. 이런 산 위에 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작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강이었다. 서너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강이 나타난다. 이 강을 건너면 바로 내 나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감자를 씻고 있는 아낙이 보였다. 하지만 아낙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두 남자와 꼬마 아이들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압록강 발원지는 보지 못했지만 이 높고 깊은 산 속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더위도 식힐 겸해서 검문소 옆에 있는 강 그늘로 들어갔다. 너비가 채 십 미터도 안 되는 강 바로 건너편에 나이 어린 북조선 군인 두 명이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우리 일행은 차에서 먹을 것하고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검문소 사람들이 달려와 손을 저으며 말렸다. 혹시라도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 자기네들도 골치 아프다는 것이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자니 참으로 서먹했다. 영화나 소설처럼 우연이란 것이 있다면 그 어린 병사는 내 조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곳에 와서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보면 혹시 친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묻자 나를 닮은 어린 병사는 대답 대신 나무에 기대놓았던 총을 만지며 찍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고 있는 것이, 자꾸만 내가 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들의 마음속에 높은 벽을 쌓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이 저렸던 까닭과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은 그들의 벽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벽을 내가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이 학년, 아니면 삼 학년 때였나? 그 날은 상상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도화지 맨 앞에다 시냇물을 그린 다음 이어서 산 아래쪽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렸다. 그리고 하늘에는 하얀 반달을 그렸다. 아마 그때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이 세 명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선생님이 내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얘야, 달은 노란색으로 칠해야 한단다.”
하면서 노란 크레용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하얀 달 위에 노란색을 덧입히면서 선생님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하얀 달이었는데….’ 선생님이 잘못 가르쳤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하얀 달을 보았구나”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더불어 북한에는 빨갱이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형제가 살고 있다고 가르쳤더라면 적어도 이런 기분으로 내 나라를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맥주거품처럼 슬픔이 차 올랐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나는 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얀 달이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 되는 땅을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의 벽을 허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벽이 또 있다는 것이다. 제 마음속에 쌓은 벽은 제 스스로 허물 수 있지만 자기 마음이 아닌 남의 마음에 몰래 쌓은 벽은 몰래 쌓은 그 사람이 허물어야 한다. 아직도 내 나라가 하나 되지 못하는 까닭은 서로서로 허물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종
다시 메마른 길을 달렸다. 두만강 발원지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날씨가 얼마나 덥고 말라 있는지 바람 한 점이 그리웠다. 어쩌다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얼른 차창을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흙먼지가 차안으로 들어와 횟가루를 뒤집어쓴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제트기가 지나가면서 남긴 파란 하늘의 흰 줄기처럼 희뿌연 흙먼지는 차 뒤꽁무니에 붙어 쉼 없이 쫓아왔다.
안 동지가 카메라 가방을 열면 마 동무는 자동으로 차를 세우고 자동차 앞 뚜껑을 연다. 이어서 차창 밖으로 렌즈를 내밀면 마 동무는 변방부대 차가 보이는지 살펴본다. 1200mm 렌즈를 걸쳐놓고 늘여다보는 모습을 보면 꼭 기관총을 걸쳐놓고 전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안 동지는 그 렌즈를 통하여 많은 아리랑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아리랑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마음이 마비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대로라면 지금쯤 다듬질이 끝났을 텐데, 다듬질은커녕 삼 년이 지나도록 노래하나 캐지 못한 것이다.
저만치 검문소가 보였다. 군인 두 명이 나와서 되돌아가라는 시늉을 한다. 길이 망가져서 사흘 뒤에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압록강 발원지 갈 때도 그랬는데 두만강마저 그리 되었으니 길이라는 게 내가 가고 싶다고 가게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기대감이 무너져서 그런지 다시 되돌아가는 길은 정말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고요하던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쪽으로 한 이백여 미터쯤에 웅성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색안경을 쓴 젊은 남자 하나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시체 한 구가 떠올랐는데 가보지 않겠느냐며 애써 친절을 떨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먹을 것을 구하러 일 주일에 한 번씩 건너오던 여자라는 것이다. 안 동지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조금 전 우리에게 말을 붙이던 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나타나서 큰소리를 쳤다. 어느 특집방송에서 시체를 보여주고 돈을 받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안 동지는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하마터면 큰 싸움이 일어날 뻔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인 한 사람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는 말했다.
“제발 사진 잘 찍어서 세상에 좀 알려주시오, 기자 선생”
노인의 그 말 한마디에 그 남자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한 동포는 물에 빠져 죽고, 한 동포는 죽은 동포를 보여주려 하고, 또 한 동포는 그 동포의 멱살을 잡게 되고…. 이런 일도 따지고 보면 다 방송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언젠가 북한 관련 특집방송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 제일 화가 난 대목은 압록강, 두만강에서 하루에도 수십 구의 주검이 떠내려간다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그런 시신을 본 일이 없었다. 두만강에서,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구의 시신을 보았을 뿐이다. 왜 매일 수십 구의 시신들이 떠내려간다고 방송했을까. 그렇다면 한강은 어떠한가. 진실을 파헤치지 못한 조작은 결코 특종이 될 수 없다.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서로 잘산다고 하면 통일은 또 얼마나 멀어지겠는가. 남과 북 모두, 그러니까 온 겨레가 같이 보고 같이 느낄 수 있는 특집방송을 만들어 같이 웃고 같이 울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특종이 아닌가. 그런 특종이 많을수록 통일이 앞당겨진다면 누가 그 일을 해야 하는가. 평화스런 모습에 초점을 맞춰 보라. 그 평화 속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괴어 있는지 똑바로 말해보라. 비록 멀리서 바라보는 평화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노래는 떠나가고
내가 백두산에 가는 것은 순전히 노래 때문이다. 심마니가 그렇듯이 나 역시 노래를 캐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 산에 오를 때마다 노래가 캐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꾸만 가야 하는 것이 나의 일이기도 하다. 산에 오를 때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오른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노래는 쉽게 캐지지 않는다. 운 좋게 산신령이 예쁘게 봐주는 날이면 지나가는 바람 속에 실려오는 노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 백두산은 벌써부터 나를 설레게 하고 있다. 마치 노래가 묻혀 있는 곳을 알고나 있는 것처럼 머릿속은 온통 하얀 봉우리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들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길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름이었으면 돌계단이었을 길이 눈에 덮여 하얀 비탈길이 되어버렸다. 폭포 꼭대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가장자리가 얼기는 했으나 그래도 폭포는 위용을 잃지 않고 이 추운 겨울에도 힘차게 흘러내렸다. 오후 두시 이십오분. 드디어 하늘못이 눈에 들어왔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못 위로 안개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무라고 생각했는데 안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무슨 검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몸수색을 하는지 여기저기를 툭툭 치면서 무엇 때문에 여길 왔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겨울 백두산을 꿈꾸며 노래가 많이 묻혀 있을 거라고 좋아했는데 낯선 외로움이 내 마음을 흩뜨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안 동지와 오 동무가 두 사람용 텐트 두 동을 치는 사이 나는 손 동무와 함께 물을 길었다. 점심을 거른 우리는 돼지고기와 표고버섯을 구워서 배갈과 함께 먹으며 첫날을 보냈다. 일곱시도 안 되어서 잠을 자자니 눈만 말똥말똥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하얀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 덮인 하늘못 위를 걸어 다닐 것이다. 운이 좋아 아리랑 향기를 맡을 수 있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기 4333년(서기 2000년)1월 1일. 내 나라 제일 높은 곳에서 새해 첫날을 맞는다. 새해라는 것은 마음속에 새잎이 돋아나는 날이다. 그런데 새잎은커녕 얼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새해를 맞이하기가 너무나 버겁다. 그래도 이렇게 내 나라 제일 높은 곳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으니 사람들은 날보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밤새 날린 눈들이 바람막이 벽에 부딪혀 지나가지 못하고 텐트 있는 곳까지 밀려 내려와 쌓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새해 첫날 눈 무덤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될 뻔했다. 이제 오늘의 새로운 운동은 어제 쌓은 바람막이 벽을 다시 허무는 일이 될 것이다. 바람막이 벽을 허물다가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을.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잘못 만들어진 노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노래 만들기가 조심스러워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변명에 불과할는지 몰라도 그 문제에 대해서 마음 깊이 파고들어 보면 내 마음이 마비되었다고밖에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래는 나무와 같은 것이어서 노래가 시들면 마음은 금방 황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압박감이 마음의 여린 틈을 비비고 들어와서는 야금야금 마음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숨을 못 쉬게 된 마음은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견디지 못한 노래는 마침내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떠난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남은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저만치 앞서가는 안 동지와 오 동무를 뒤로하고 천활봉 기슭으로 향했다. 능선에 올라서니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계속 나아가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그런 나를 성난 칼바람은 밀어버리고 말았다. 능선 너머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진 나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결국 능선으로 올라가지 않고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부터 걷기로 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지 않은가. 눈보라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기상소 건물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길이 아닌 골이 죽 이어져있었다. 오백 미터가 넘는 낭떠러지 밑을 보고 나니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식구들이 생각났다. 간신히 기상소 앞 너른 마당에 도착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탈진 상태의 내 모습을 본 숙소 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죽으려고 환장했는가?”
어제 연락했던 마 동무가 열두시가 다 돼서야 나타났다. 마 동무는 혼자 가는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댔다. 자격 미달의 훈장을 안고 산을 내려가야만 했던 내 상황을 알 까닭이 없는 마 동무는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마 동무는 술을 못 하지만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면서 나에게 ‘꿈(夢)’이란 술을 사주었다. 삼십 팔도 짜리 꿈을 마시면서 잃어버린 꿈을 생각하니 자꾸만 슬퍼졌다. 꿈 한 병을 다 마셨는데도 꿈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 동무가 울지 말라고 내 등을 툭툭 쳤다. 그러고 보니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마 동무한테 말했다.
“이것은 눈물이 아니고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녹아서 흐르는 거야.”
마 동무가 킬킬대며 웃었다. 마 동무가 아무리 내 속을 잘 안다고 해도 아마 이번만큼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얼룩지고 질퍽대는 눈길을 걸으며 깊어 가는 옌지의 밤 속으로 들어가는데, 마음속에는 어느새 스며든 스모그가 슬픔의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