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역사회의 지도자, 학교들과 협력하면서 그와 동료들은 불우한 청소년과성인들에게 더 밝고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 필요한 기회와 수단을 줬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주체적인 개인의삶, 청소년의 비행, 실업 등의 사회문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여 미래 사회를 만드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 저자 빌 스트릭랜드
직업훈련센터이자지역사회 예술프로그램인 맨체스터 비드웰의 CEO이다. 그는 맨체스터 장인길드(Manchester Craftsmen"s Guild)에서 해마다수백의 청소년에게 도예, 사진, 회화(繪畵)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여 그중 90%에게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갖게 했고 대학에 입학시켰다. 한편비드웰 직업훈련센터(Bidwell Training Center)는 인근의 주요 기업과 협력하여 성인을 대상으로 요리, 약학, 원예기술과 같은전문 직업훈련을 실시한다. 그는 사회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맥아더 재단의 ‘천재 상’을 받았고, 하버드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했고, 국립예술기금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와 맨체스터 비드웰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세 가지 사례연구의 주제가 됐다. 이제 그의 역할모델은 세계로 퍼지고있다. 차별받는 재일한국인을 위해 일본으로,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위해 이스라엘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로, 코스타리카로 그의 센터가 들어설예정이다. 그는 지금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 살고 있다.
■ 역자 강성구
서울대학교 법대공법학과 졸업. 책이 좋아 시작한 번역 일에 흠뻑 빠져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을 바꾼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힘』이 있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 차례
이 책에 대한찬사
Chapter1. 슬럼가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Chapter2. 내 손 안의 삶
Chapter3. 희망의탄생
Chapter4. 역경 속에서 찾은 사명
Chapter5. 아름다운 것의 비밀
Chapter6. 안 되면 되게하라
Chapter7. 열정의 힘
Chapter8. 생명의 율동, 스윙
Chapter9. 더 멀리 세상밖으로
Chapter10. 누가 세상을 바꾸는가?
옮긴이의 글
피츠버그의 빈민가에 핀 꽃
슬럼가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1996년 겨울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로 벽을 둘러치고 사람이 꽉 들어찬 하버드 대학의 한 강의실 중앙 연단에 서 있었다. 내 위로는 나무로 만든 좌석 열이 반원형으로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무언가 기대에 부푼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눈빛이 날카로운 백여 명의 하버드 경영대학원 학생들이 내가 할 말을 기대하며 앉아 있었다.
나는 항공사나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역사회 예술교육과 직업훈련센터인 맨체스터 비드웰의 설립자이자 CEO인 내 사명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취지는 같지만 서로 별개인 두 개의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맨체스터 장인길드(Manchester Craftsmans Guild)라고 부르는 첫 프로그램의 목적은 방과후 예술교육 과정을 개설하여 위험한 상황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창의성의 불꽃을 피워 학교 공부를 계속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장인길드의 각 학급에서는 정식 예술가나 전문교사가 최고의 사립학교나 사설학원에 맞먹는 수준 높은 교육을 한다. 한편 같은 건물에 있는 ’비드웰 직업훈련센터(Bidwell Training Center)에서는 가난하고 불우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최고 기술 수준의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그곳에서는 밝은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지고, 수입 면에서도 좋은 직업 마련에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를 제공한다.
우리가 20여 년 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도시 최하층 흑인이었다. 요즘은 전체 학생의 절반 정도가 불우한 환경의 백인 아이들이다. 생활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의 삶의 기회가 아무리 비관적이라도, 자신의 꿈을 억누르고 야망을 품지 말라고 아무리 철저히 강요받았더라도 그들은 만족스럽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정당한 권리와 잠재력이 있다. 그들이 이러한 말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잠재력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신뢰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믿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20년 넘게 쌓인 성공률로 보아 우리가 틀림없이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한다.
우리에게 온 아이들의 98% 이상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고, 85%가 대학과 상위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의 직업훈련 프로그램도 비슷한 성공을 거뒀다. 성인 학생의 80%가 직업훈련을 마쳤고, 그중 86%가 졸업 후 직업을 얻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시급을 받는 시시한 직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얻은 직업은 부조리장, 화학공업 기술자, 약사와 같은, 가족 전부를 가난과 무기력에서 구할 수 있고 안정적이고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한 참된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직업이다.
오늘날 맨체스터 비드웰은 세 개의 분리된 건물을 합쳐 면적이 15,000평방미터이며, 직원이 150명이고, 피츠버그 교육구와 협력하여 우리가 공립학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2,500명의 청소년을 제외하고도 해마다 1,200명이 과정을 수료한다. 나는 맨체스터 비드웰이 기업적 전망이나 사업적 착상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는다. 상처받고 버림받은 삶의 한복판, 절망적인 역경이 가로놓인 환경에서도 인간의 정신은 놀라울 만큼 발랄하여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잠재력이 있다는 무언의 통찰을 19살 어수룩한 청년이 확신했기 때문에 이 일은 가능했다.
부모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교육 수준이 어떠하든, 삶이 어떤 종류의 인연과 능력, 기회를 허락했든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갈망하는 삶의 목적, 목표, 성공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이끌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내 인생과 이 책의 핵심 가르침이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접한 모든 독자가 나이, 그동안의 성취, 환경에 상관없이 삶에서 불가능한 것, 불가능한 것에 대한 선입견을 다시 생각하고 원대한 꿈을 꾸며, 그 꿈을 실현할 정당한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과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기를 바란다.
내 손 안의 삶
열여섯 살 때, 나는 매일 아침 오하이오 강 북쪽 도심 내의 가난한 저지대 동네인 맨체스터에 있는 집에서 올리버 고등학교로 가는 언덕을 오르며 학교를 다녔다. 매일 학교에 가면서 본 것은 변치 않을 쇠락의 모습이었으며, 그 경관은 나에게 어디를 돌아보아도 절망과 패배뿐이라는 지워지지 않을 교훈을 주입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깊게 새겨진 몇몇의 기억에는 빈민가의 절망과 쇠락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사실은 당시 미국 내 도시의 가난한 동네가 다 그랬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자란 동네이고 인생에 대한 나의 전망이 형성된 곳이다. 그것은 마치 비천함이 밑바닥부터 온 동네를 감염시키고 맨체스터를 내부에서 절멸시키는 것 같았다.
우리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 굳이 영웅적 행동을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빈민가에서는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찾는 것과 같이 매우 간단한 행동을 하는 데에도 영웅적 결단이 요구된다.
나의 어머니는 교육이야말로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차표라고 믿었으며, 동생과 내가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나는 어머니의 뜻을 존중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다. 하지만 실상은 학교공부에 열의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설렁설렁 시간만 보내고 수업을 빼먹고 낙제를 면할 만큼만 공부했다. 졸업반이 됐을 때 나는 졸업 후 무엇을 할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대학에 갈 마음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2학년 때 미술선생님이었던 프랭크 로스 선생님을 미술실에서 만났다. 내 기억으로 로스 선생님은 예술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자기 학생들을 교육이 불가능한 무뇌아집단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접한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프랭크는 여름에 뭘 했는지, 무슨 수업을 듣고 있는지 물었고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모두 흩어졌다. 프랭크가 점토를 빚는 그 마술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프랭크의 수업에 수강신청을 했고 프랭크의 교실은 금세 나의 졸업반 생활의 중심지가 됐다. 나는 프랭크의 수업에 절대로 지각하지 않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공간에는 프랭크가 창조하는 힘찬 무엇이 있었다. 그 공간에는 프랭크가 창조하는 힘찬 무엇이 있었다. 빛, 재즈, 끝도 없이 우러나는 커피 향, 그가 뿜어내는 고요한 노동의 감각, 그가 창조해 마지않는 도구와 물품을 정비하고 보관하는 데 있어서의 정연함과 조심성. 이 모든 것들이 목적의식, 평정심, 온전함의 분위기에다 내가 살던 거리에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무엇인가를 더했다. 나는 그 교실이야말로 오래되고 깊은 수많은 상처를 치료하는 곳임을 온몸으로 깨달았고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려 했다.
몇 주일이 지나고 녹로에 매달리는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점토에서 어떤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컵, 접시, 사발 같은 기본 작품 몇 점을 완성했다. 이 작은 성공은 점토에 손을 댔던 그 순간의 느낌, 나의 정신에 기본적인 그 무엇이 풍성해지는 느낌, 내 손 안에 순수한 잠재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살찌웠다. 내 인생 최초로 대단한 그 무엇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됐다. 흙으로 하는 작업이야말로 희망을 꿈꾸고 희망으로 달려가는 용기를 줬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실망하겠지만, 어느 날 진흙과 상상력만으로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결과물을 창조하게 되면 마치 기적이 일어난 느낌이 든다. 프랭크 로스 선생님은 바로 이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기적은 일어난다. 너의 손으로 이를 빚을 수 있다.
3학년 중반이 되자 나는 처음 미술실에 왔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로스 선생님은 내가 도예작업에서 이룬 발전과 진보에 기뻐했다. 내 작품은 소규모 전시회에 전시되고, 상도 받았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보는 눈을 다시 형성하는 것이었다. 아직 우리 집은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위도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아직은 거리에 소용돌이치는 광기와 맞서야 했다. 나는 도자기로 말미암은 약간의 성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나의 인생은 힘들고 투쟁으로 가득찰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싸울 동기를 갖게 됐고 이 점이 모든 것을 바꿨다.
삶의 자서전을 바꾸려면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소망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의해 규정받도록 스스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맨체스터가 더 이상 깎아내리고 타락시킬 수 없고 누가 뭐라 해도 ‘내 것’이 틀림없는 나의 기술, 열정, 재능, 성취에 뿌리박은 자기정체성의 새로운 기초를 다졌다.
나는 1967년 올리버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형편없는 성적과 저조한 SAT 점수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추천으로 나는 수많은 신입생 중에서 몇 안 되는 흑인 학생 중 한 명으로 피츠버그 대학에 임시학생으로 입학했다. 피츠버그 대학 관계자들은 내가 예술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나의 예술 경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나는 전공을 역사로 정했다. 언젠가 교사가 되어 프랭크가 나를 도왔던 것처럼 아이들을 가르칠 꿈을 꾸었다.
역경 속에서 찾은 사명
피츠버그 대학 졸업 후 나는 비드웰 직업훈련센터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센터는 내가 장인길드를 설립한 해인 1968년에 맨체스터에 문을 연 직업훈련소였다. 비드웰의 사업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공, 석공, 전기배선, 배관과 같은 건축기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당시 도시 내 다른 직업훈련소와 마찬가지로 기대만큼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드웰의 관리자들이 센터 지원 목적으로 지급된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착복한다는 소문이 들었고 그래서 교육의 질이 형편없었다. 나는 비드웰이나 건축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비드웰을 수료한 많은 사람들이 맥도널드나 버거킹에서 카운터를 보는 것을 봤다. 나는 그곳 운영자들이 마침 해고되자, 비드웰의 방향 전환에 관한 제안서를 들고 관리자직에 지원했다.
그 직업훈련센터를 설립한 비드웰 장로교회의 제임스 로빈슨 목사님 집에서 목사님과 부목사님이 나를 인터뷰했다. 나는 장인길드를 계속 운영하는 조건으로 그 직책을 맡겠다고 했다. 그들은 태연히 수긍했다. 며칠 후 나는 주차장에 서서 비드웰을 처음 둘러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장인길드의 경험으로 나는 존중이 존중을 낳고, 높은 기대가 더 높은 성취로 이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지금 나는 비가 새는 지붕, 기울어진 벽, 망가진 화장실, 한쪽으로 기운 복도가 있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을 이보다 더 무시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학교 자체가 인생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오래되고 비인간적인 바로 그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너에게는 미래가 없어. 너의 인생은 하찮아. 네 주위에 있는 것, 그게 너의 전부야.’ 장인길드에서 나는 이 거짓말, 우리 모두의 삶을 밑동부터 싹둑 자르는 이 거짓말에 대해 나의 깨달음이 강력한 해답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우리의 가치를 주위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북돋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로부터 최선을 다하겠는가?
이후 몇 년간 대학 친구인 제시 파이프와 나는 비드웰의 문화를 바꾸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훌륭한 교사를 모셔와 교육의 질을 높였으며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향상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계속 입주하는 한 정말로 필요한 성취, 즉 비드웰의 옛 모습을 일신하여 희망과 자부심의 중심지로 재창조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것을 해내려면 우리 학생들에게 거리의 자기파괴적 논리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공하는 그런 환경을 비드웰에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수년에 걸쳐 정교하게 계획된 전략을 적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드는 시간과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재정상황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재정적 기초를 수립하려고 쉬지 않고 노력했지만 대부분 그 노력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와중에 갑자기 불이 나 수많은 안전규칙 위반 사실이 드러나면서 45일 안에 안전한 시설로 센터를 옮기라는 판사의 판결을 받았다. 몇 주 후 우리는 근처에서 전에 있던 곳보다 조금 더 잘 관리된 창고를 찾아냈다. 그래도 그 건물은 모든 안전기준을 충족했고 우리의 부족한 예산에도 맞았다. 우리는 새 공간에 빠르게 정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 주소에서 우리를 괴롭혔던 문제점들이 새 집에도 그대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계속해서 보조금 지원서를 쓰느라 시간을 보냈고 자금을 구하러 뛰어다녔다.
비드웰은 늘 재정 궁핍에 시달렸고 그 꿈의 실현은 조심스러운 정치인과 관료의 손에 전적으로 좌우됐다. 나의 인생에서 참으로 답답한 시절이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알았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1980년대 초가 되자 돈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하자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재정지출이 대폭 삭감됐고 비드웰도 이를 비껴가지 못했다.
비드웰의 재정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결국 급료를 주지 못해 직원 중 3분의 1을 해고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나는 창 밖으로 축구장 크기의 버려진 땅을 내다봤다. 한때 그 땅에는 집과 거리가 들어섰었지만, 1968년 폭동으로 집들은 모두 불탔고 잡초만 무성한 버려진 땅으로 남아 일단의 트랙터와 트레일러가 임시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늘 나를 우울하게 했고 비드웰에서 내가 이루려는 사명이 결국은 헛된 노력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환기시켰다. 그런데 난잡한 그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에 새 센터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며 고비마다 수많은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충분히 가능한 삶을 살 기회를 잡으려면, 나는 그 건물을 현실로 만들어야 했다. 피츠버그에서 손꼽히는 건축가인 타소 캇셀라스의 설계로, 피츠버그 시 전역의 주요 기업과 재단 이사회,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딕 손버그의 재정 지원 협력을 얻어 1984년 그 황량한 부지 위에 새 건물을 짓는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2년 후 모든 공사가 마무리됐고 맨체스터 비드웰은 새로 태어났다.
종이로 만든 건물모형을 들고 이곳저곳 기업의 사무실을 찾아다니면서 꿈속의 그 건물을 지을 돈을 구하러 다닐 때, 나는 수많은 회의론과 의심, 때로는 생색내기가 아니냐는 비난에 마주쳤다. 하지만 우리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가나한 흑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줌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며 공동체의 자산이고, 그들을 고용하는 기업에게 가치 있는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새 센터의 비드웰이 번창하면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같은 건물 내 맨체스터 장인길드도 쑥쑥 자랐다. 여러 과정의 높은 교육수준이 맨체스터 외부로 알려지면서 흑인 우세 지역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인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오늘날에는 백인과 흑인의 학생 수가 비슷해졌다. 이러한 폭넓은 수용성은 다양한 부류의 학생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생기는 편안함 그리고 열정과 함께 우리가 일군 강력한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의 성공을 나타내는 지표는 그 외에도 많다.
맨체스터 비드웰 교육철학의 힘은 우리가 상급 교육과정으로 진학시킨 공립학교 학생의 수, 우리가 취업시킨 비드웰 수료생의 비율,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지속적이고 깊은 지원의 수준, 우리가 받은 그 모든 명예와 인정, 내가 앞서 말한 천재상 등을 보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맨체스터 비드웰은 프랭크 로스 선생님이 나에게 만들어준 올리버 고교의 마술 같은 그 교실의 구현이자 확장이며 살아 있는 찬사에 다름 아니다. 로스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에게 모든 꿈이 우리 손 안에 있음을 보여줬다. 지금 선생님은 해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은 교훈을 나를 빌어서 가르치고 있다. 수많은 절망에 빠진 삶이 더 나은 삶을 향해 변화하는 현실을 보노라면 그러한 변화가 다음 세대로 물결쳐 내려가서 수천 명의 삶에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정의 힘
나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람들은 나의 꿈이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지 않다거나, 나의 이상이 지나치게 거창하고 파격적이어서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라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빈민가에서 난을 기르겠다니 말도 안 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과학과 고등수학을 가르치겠다니 불가능해! 백인이라면 누구도 맨체스터 같은 곳에서 음악을 듣겠다고 가지 않을 텐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수대는 필요 없어.’
그런 충고는 아주 건전하고 현실적인 충고였다. 만약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단순한 욕망만을 추구했다면, 나는 당연히 그 충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받아들일 만하고 그럴듯한 일을 좇지 않았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시작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이것이 바로 나를 규정하는 열정이라고 자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렇듯 나는 비관적 비평가들의 말을 무시했으며 더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쉽지 않았지만, 나의 열정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면 할수록 나의 꿈을 따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더욱 분명해졌다. 또한 시절이 험악해지고 나의 소망이 아련히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열정은 나로 하여금 꿈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결단력과 끈기를 갖도록 했다. 내가 일생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렬하고도 지칠 줄 모르며 집중된 추동력 없이는 진정한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힘든 목표에 집중을 계속하려면 엄청난 양의 단련이 필요하며, 순전한 의지만으로는 일정한 수준의 몰입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목표가 아무리 중요해 보여도 그 중요성만으로는 우리의 진심을 얻지 못한다. 반면에 열정은 모름지기 일종의 흥분이며, 열정이 집중된 그 대상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열정은 다른 말로 하면 동기부여에 대한 끝없는 자기충실적(self-replenishing) 원천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프랭크 로스 선생님 교실에서 처음으로 빚던 도자기들이 전부 맥없이 쓰러졌을 때도 시도를 계속한 것은 절제력이나 의지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내면에서 느낀 나의 잠재력을 개발하겠다는 열정 때문이었다. 실패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때의 꿈과 그 이후 내가 가졌던 모든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 것은 바로 열정이었다. 나는 모든 경우마다 좌절을 겪었고 비탄에 빠졌으며 몇 년에 걸친 이루어지지 않는 고생을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어떤 희망에 열정을 투자한다면 고생은 피할 수 없는 또다른 일부이지만, 열정은 언제나 그 고생에 가치를 부여한다.
열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다 보면 우리는 전통적인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만의 오솔길을 밝혀 나가게 마련이다. 열정은 본래 특성상 우리를 리더가 되게 강요하며, 리더가 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각종 비난과 저항을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또 한편 열정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방향감각을 주어, 꿈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함과 동시에 우리가 저항과 비난을 무마하면서 효과적인 지휘를 하도록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열정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들여 주의를 집중하는 바로 그 생각과 희망, 가능성들은 저절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열정은 불가항력이며 쉼이 없다. 열정은 우리의 소매를 잡아끌어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우리의 열정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부분은 열정이 삶을 조직하는 원칙이라고 확고히 믿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공포가 문제이다. 우리는 열정 때문에 우리가 비현실적이거나 무기력하거나 자기만족적이거나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월 스트리트에서 재산을 모으는 일보다 훨씬 도덕적으로 우월한 직업이기 때문에 요리사나 예술가, 또는 도시빈민 활동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요점이 아니다. 정직하고 청렴한 투자가로 살면서 주위 세계에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다 망해가는 도심 학교에서 학생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현재 모습 이외에 다른 잠재력이 있다는 신념도 없는 교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열망에 불타는 이상주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온다. 나는 그들에게 첫 마디로 ‘너 스스로를 먼저 구하라’고 말한다. 먼저 자신의 생활을 바로 잡아라. 세상에 이름을 남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분명히 깨달아라. 깨달았으면 이제 그 일에 뛰어들어라. 그러면 나머지 일은 저절로 풀린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확신을 줬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여태껏 열정이 없는 의미 있는 삶을 본 적이 없다. 또한 나는 여태껏 열정으로 가득한 인생이 놀랍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