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ǻ
첫눈
   
13000
2016�� 03��




 


■ 책 소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고 아름답게 펼쳐지는 글
 


 


카카오 브런치에서 ‘그녀의 요일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연재해 온 고수리 작가는 2015년 다음 카카오가 주최한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2000:1의 경쟁률을 뚫고 금상을 수상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격려와 희망, 따뜻함을 전하는 책으로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어제 나의 일상 같은 친근한 글이 담겨있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소한 순간들,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긴 이 책은 그저 삶이라는 드라마를 살아가는 평범한 주인공들, 그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도 드라마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쳐가는 타인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저자의 잔잔한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늘을 살아 갈 힘을 얻게 된다.


 


■ 저자 고수리
저자 고수리는 인터넷 뉴스 영상취재기자, 광고 기획 피디를 거쳐 ‘KBS 인간극장’ 팀에서 방송작가로 일했다. 카카오 브런치에 ‘그녀의 요일들’이라는 제목의 요일별 에세이를 연재해왔다. 뭉클하면서도 따뜻한 그녀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브런치북 프로젝트’ 수상작에 당선되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는 책 속 문장으로 대신한다.


 


“누구에게나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고, 또 누구에게나 위로를 건네주고 싶은 선한 순간들이 있다. 외딴 방에서, 미용실에서, 텅 빈 거리에서, 어느 새벽 눈이 내리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이름 모를 당신에게 나의 온기를 나눠주고 싶다. 바람이 불고 밤이 오고 눈이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런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하얀 눈처럼 담백하고 따뜻한 글을 쓸 것이다. 손가락으로 몇 번을 지웠다가 또 썼다가. 우리가 매일 말하는 익숙한 문장들로 싸박싸박 내리는 눈처럼, 담담하게 말을 건넬 것이다. 삶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위로의 말을.” 책을 덮고 나면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일상에도 드라마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방송에 나가냐는 사람들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가 주인공이고 우리 삶이 다 드라마예요.”


 


브런치 brunch.co.kr/@daljasee


 


■ 차례
고작가의 날들
작은 기적
결혼은 예고 없는 불시착 같은 것
신기원의 카세트테이프
엄마라는 직업
기억을 걷는 시간
눈 내리던 밤
그때 우리는 꽃처럼 피어
내가 사랑한 1분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누구나, 누군가의 별
꽃으로 둘러싸인 요새
그렇게 어른이 된다
밤의 피크닉
상큼한 알토의 하루
어느 기숙사생의 수능도시락
패배의 기억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어쨌든 사랑
밤바다에서 우리
코끝에 행복
멀고 아름다운 동네
버려진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늙어간다는 것
산타클로스는 있다
일요일의 공기
세 번의 장례식
끼니라는 것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하이 데어! 잘 지내나요?
애송이의 사랑
나의 꽃노래
쉰 한 살, 어른의 눈물
한밤중의 목소리
태평한 미아가 되는 시간
히키코모리의 아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작가의 날들

"할머니, 할아버지, 저 고수리 작가예요. 수리수리마수리 고수리 작가요!"


어르신들은 내 이름을 좋아했다. 아하, 수리수리마수리 고수리 작가! 다음 번 통화에서도 그렇게 나를 기억해 주셨다. 지긋지긋하게 놀림을 받았던 특이한 이름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귀가 어둡고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나는 수화기에 입을 딱 붙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했다. 고수리. 내 이름 석 자에 악센트를 주고선 아주 명랑한 손녀톤 목소리로.


수리수리마수리 고수리 작가. 조금 웃기면 어때. 나는 그 호칭이 참 좋았다.


몇 년 전만해도 나는, 이름 빼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딱 남들만큼만 고만고만하게 공부하고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집 회사 집 회사 집. 무난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그런 나에게도 자그마한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언젠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감히 넘보기에 작가라는 타이틀은 너무 대단하고 특별해 보였다.


그러다 소위 꺾이는 여자 나이가 되었을 때,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문득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지금 행복한 건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때 불현듯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해봐야겠다고. 그래서 적지 않은 나이에 빡센 방송 일을 시작했다. 방송 판의 가장 밑바닥에서 막내야 혹은 잡가(잡일은 다 하는 작가)라고도 불리는 막내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저 작가라고 불리는 게 좋아서 시작했던 내 인생 최초의 일탈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KBS 인간극장 팀 취재작가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좋아서 무작정 시작한 일이었지만, 작가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매일은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주말은 반납했고 사무실은 집이 되었다. 무제한 통화 요금제로 바꾼 휴대폰이 껌딱지처럼 곁에 붙어 다녔다. 툭하면 펑크 나는 아이템에 안절부절 똥줄이 탔다. 스커트 차림에 사무실을 또각또각 걸어 다니던 하이힐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 청바지에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서 소똥이 질펀하게 쌓인 시골 흙길이나 논길을 걸어 다녔다. 애교는 기본, 박장대소 쓰러지는 수다 맞장구를 장착하고, 막무가내 안마와 허그로 어르신들 맘을 살살 녹이는 사근사근한 손녀딸을 자처하게 되었다. 동글동글했던 나의 삶은 거침없이 요동쳤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매일 수십 명의 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신문에서, 뉴스에서, 제보에서 발견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하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작가 일을 하면서 어느새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걸 정도로 붙임성이 좋아졌다. 여태껏 다른 사람의 삶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한 명 한 명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다른 얼굴과 목소리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를 취재하게 됐다. 남편과 손을 잡고 마라톤을 완주하시는 모습에 감동받아 전화를 드린 터였다. 당차고 씩씩한 분이셨다. 하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섭외 전화를 받으셨던지, 내 전화에도 단박에 선을 그으셨다. "어떤 작가들은 유명한 프로니까 대뜸 나와 달라 그러더라고요. 그런 식이면 절대로 안 나가요. 작가양반, 마라톤이 몇 키로를 뛰는 건지나 알아요?"하고 물으셨다. "42...42 점...." 당황한 나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42.195킬로미터예요. 그럼,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42.195킬로미터 어둠 속을 뛰는 기분은 어떤지 알아요?" 아...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에겐 힘든 일이예요. 작가라면 최소한 공부라도 하고 전화를 해야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따끔한 말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그분이 도전하시는 그랜드슬램 마라톤 대회 종목과 거리와 일정들, 그리고 신문기사에서 보았던 그분의 사연과 생업에 대해서 꼼꼼히 공부했다. 그리고 다시 연락을 드렸다. 그제야 그분은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공부 열심히 했네요. 고마워요."라며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내가 하는 일은 단순 취재가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후부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취재하는 분들과 몇 달을 친구처럼 가족처럼 통화했다. 먼저 웃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그분들의 생업과 삶에 대한 공부는 미리 해둔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의 감정과 삶을 다루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났고 삶을 배웠다.


30년 동안 억척스럽게 소금밭을 일구며 살아온 명오동 씨는 꼬박 20일을 기다려야 피는 소금꽃을 기다리며 "보고 자란 게 염전밖에 없어. 아버지가 염전하니께 나도 염전한 거지. 하늘에서 내려준 대로 해야제. 나는 하늘에서 소금하라고 내려줬어."라며 소박한 인생철학을 말씀하셨다. 7살에 바늘을 쥐었고, 9살에 손수 저고리를 지었던 한상길 할머니는, 평생 수의(壽衣)를 지어왔지만 "수의는 인간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입는 옷, 정성스럽게 해드려야지."라며 아흔이 가까운 연세에도 매일 바늘을 잡으셨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며느리 모마리 씨는 "인도네시아 말에 사랑싸움도 있어야 더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어요. 사랑도 싸워야 간이 맞아요."라며 부부는 함께 이겨내야 더 행복해진다는 행복론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60년 만에 생모와 오빠를 찾아 나선 오복식 씨. "희망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여보?"라고 묻자, 남편 박기천 씨는 대답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 뭐든지."


정성, 행복, 희망과 같은 삶의 소중한 가치들. 내게 그것들을 가르쳐준 사람들은 훌륭한 학자도 특별한 유명인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 보통사람들이었다. 삶이라는 드라마를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주인공들. 그분들을 제일 먼저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내 일에 감사했다.


인간극장에서 취재작가로 일 년 반쯤 일한 뒤, 나는 몇몇 교양 프로그램에서 서브 작가로 일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일하고 밤을 새웠다. 그래도 내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물론 아이템이 펑크 나거나, 짝꿍 피디랑 영 맞지 않거나, 떡진 머리로 쪽 대본을 쓸 때는 정말 이 일이 지랄 같다고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래도 내 일이 좋아서, 꿈에서도 촬영을 하고 원고를 썼다.


그러다 문득 이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떠올려 봤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나. 그때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르신들께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고, 행복, 희망과 같은 것들은 그저 감상적인 말들이라고 치워둔 채 팍팍하게 살았다. 직접 뵌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줄은 몰랐고, 내 이름을 걸고 쓴 글이 전국 방송에 나가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그저 고만고만하고 동글동글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 일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알고 보니, 나 역시 가장 평범한 주인공이었고, 어느 내 내 인생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졌던 고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지금은 고민 끝에 방송작가를 그만두었다. 방송에서 배우고 느꼈던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 그 위에 좀 더 큰 꿈을 더해 글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방송을 끝내고 돌아오던 퇴근길. 열띤 연애가 끝난 듯 맘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여전히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때 문득 인간극장 출연자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방송에 나가냐는 출연자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딱 20일만 일상을 지켜보세요. 우리가 주인공이고, 우리 삶이 다 드라마예요."



눈 내리던 밤

엄마.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용히 눈이 내리던 그날을 생각한다. 엄마 혼자 걷던 하얀 눈길을, 하얀 눈물을, 하얀 공기를, 하얀 세상을, 그리고 그날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면 난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아빠와 헤어지고 우리 가족에겐 가난과 불행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혼자서 우리 남매를 키워야 했던 엄마는, 작은 보습학원을 운영하긴 했지만 집을 마련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순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셋은 똑 똑 떨어져서 유학 생활을 했다.


우리 가족에겐 집이 없었다. 대신 방이 있었다. 우린 마치 달팽이 가족처럼, 제 몸만 한 조그만 방을 한 칸씩 짊어진 채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다. 밤이 되면 나는 자취방으로, 남동생은 기숙사 방으로, 엄마는 학원 구석의 작디작은 쪽방으로 기어들어가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초라했던 각자의 방은 그나마 몸뚱아리도 피할 수 있기에 황송한 방공호 같았다.


저녁 일곱 시가 되면, 엄마는 학원의 모든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리고 새벽 세 시가 되면, 살금살금 계단을 걸어 올라와 다시 2층 학원 문을 열었다. 깜깜한 벽을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찾다가 싸늘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화장실도 세면대도 없는 차가운 방. 엄마는 찬 바닥에 몸을 눕히고 다리를 뻗었다.


우리가 흩어져 사는 동안 엄마는 낮에는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돈방석이라는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그 작은 동네에서 학원 선생이 밤마다 파전을 부친다는 소문이 퍼질까 봐, 엄마는 밤만 되면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그곳은 엄마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온뭄에 기름 냄새가 눅눅하게 배고, 연기에 눈이 따가워도,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도 파전을 부쳤다. 그래서 엄마는 밤마다 울었다. 힘들어서 울고 슬퍼서 울고 불쌍해서 울고 싫어서 울었단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갔고 그날이 다가왔다. 엄마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새벽까지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엄마는 주점 문을 걸어 잠그고 거리로 나왔다. 텅 빈 새벽 거리에 눈 쌓이는 소리만 싸박싸박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총총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가던 엄마의 머리 위로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박싸박. 눈에 눈이 쌓이고, 눈끼리 조그맣게 부딪쳐 움직였다. 싸박 싸박 싸박.


쌓이는 눈에 온 세상이 새하얗게 빛났다. 후우. 내쉰 하얀 입김에 눈송이들이 팔랑거리며 춤을 췄다. 엄마는 홀로 눈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선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앙상한 엄마의 몸무게만큼이나 가벼운 소리였다. 가로등 하나가 깜박이며 길을 비춰주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몸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던 기름 냄새가 지독했다. 식용유 냄새는 끈질겼다. 머리카락을 아무리 빨아도, 손을 수십 번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숨길 수 없는 가난의 냄새였다.


돈방석. 경박하게 발음되는 허름한 간판을 쳐다보다가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낡은 문짝에 걸린 싸구려 트리 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갑자기 엄마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세상이 희뿌옇게 사라져 눈이 먼 것만 같았다. 엄마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흰 눈 위에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눈 위에 점점이 깊이 팬 회색 자국이 서러워서, 엄마는 얼마나 울었는지. 흩뿌려진 눈물 자국 위로 뜨거운 김이 폴폴 났다.


그래도 살아야지. 새끼들 먹이려면 살아야지. 내가 살아야지. 


엄마는 이 이야기를 어느 날 미용실에서 꺼냈다. 나란히 앉은 우리는 돌돌 감아 올린 머리에 헤어 캡을 뒤집어쓴 채였다. 커다란 펌 기계가 머리 위에서 위잉 돌아가고 있었다. 미용 가운 위로 얼굴만 쏙 뺀 엄마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살아야지. 새끼들 먹이려면 내가 살아야지. 혼자서 어찌나 울었던지. 왜 그렇게 울었을까 나도 몰라.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김이 다 폴폴 나더라니. 딸, 정말로 눈은 그렇게 쌓여. 싸박싸박. 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니까. 싸박싸박 싸박싸박. 그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참... 그땐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아직도 생각만 하면...."


엄마는 옷소매로 눈물을 꾹 찍어내며 헛헛하게 웃었다.


엄마가 말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나는 동안, 엄마는 돈방석 민속주점을 처분했다. 학원이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났는지 꽤 많은 아이들이랑 복작거리면서 산다. 다행히 작지만 따뜻한 집도 마련했다. 그 집에는 화장실도 있고, 세면대도 있고, 베란다도 있고, 방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리라고 했건만 엄마가 버리지 않은 싸구려 돈방석도 있다. 주점 의자마다 놓여 있던 방석이었다. 엄마는 돈다발이 프린트된 돈방석을 집에 놓아두고는 엉덩이를 팡팡 들썩이며 그 위에 앉아보곤 했다.


미련스럽게 붙어 있는 돈방석처럼 우리 가족에겐 가난도 그렇게 붙어 있었다. 우린 쉴 틈 없이 일했지만, 가난을 버리진 못했다. 몇 번의 불행도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래도 우리는 견디고 울고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고 눈물을 닦아두고,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았다.


나는 지금도 종종 엄마가 걸어가던 눈길을 생각한다. 혼자 걷던 그 외로운 거리에서 싸박싸박 내리던 눈은 엄마를 위로했다. 눈에 눈이 쌓이고, 눈끼리 조그맣게 부딪쳐 움직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누구에게나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고, 또 누구에게나 위로를 건네주고 싶은 선한 순간들이 있다. 외딴 방에서, 미용실에서, 텅 빈 거리에서, 어느 새벽 눈이 내리는 거리 한가운데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이름 모를 당신에게 나의 온기를 나눠주고 싶다. 바람이 불고 밤이 오고 눈이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런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하얀 눈처럼 담백하고 따뜻한 글을 쓸 것이다. 손가락으로 몇 번을 지웠다가 또 썼다가. 우리가 매일 말하는 익숙한 문장들로 싸박싸박 내리던 그날의 눈처럼, 담담하게 말을 건넬 것이다. 삶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위로의 말을.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어떤 영상 관련 모임에서 나는 스물다섯 살 청년을 만났다. 그를 소개해 준 지인이 미리 일러두었다. 내가 영상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 조언을 해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는 조금 남다른 면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정말로 청년은 조금 남다른 면이 있었다. "저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그는, 사람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아래로 향한 눈은 쉴 새 없이 사방으로 움직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꾹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워 보였고, 어딘가 괴팍하단 느낌마저 풍겼다. 문어체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모습은 마치 외운 대사를 그대로 내뱉는 연극배우 같았다.


우리는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이야기가 뚝뚝 끊겼다. 그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확실히 청년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솔직히 조금 불편한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렵사리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내가 쓴 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청년이 불쑥 자기 얘기를 꺼냈다.


"저도 영화 시나리오를 써봤습니다. 그런데 글이 많이 어두운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사람들은 어두운 걸 싫어하는 거 같더라고요."
"저는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요."

"정말이세요?"

"어두운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표현 못할 복잡한 감정이 실린 눈빛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껏 아무도 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구나.


청년을 보면서 이십대 초반의 나를 떠올렸다.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불행하고 우울하다고 생각했던 시기. 그땐 나도 어두운 글만 엄청나게 썼었다. 말도 생각도 행동도 어두웠다. 세상은 그저 깜깜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바뀐 계기는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글을 올리던 블로그로 모르는 사람이 쪽지를 보내온 것이다. 일명 자살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죽는 게 힘들면 우리 함께 죽어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살 사이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죽음을 꿈꾸는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것. 충격은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큰 충격은 내가 마치 죽음을 꿈꾸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였다. 그때서야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어두운 글을 쓰고, 어두운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어둡다고 여기면서도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살고 싶었다. 하루하루 힘겨워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었다. 살아가야 할 실낱 같은 희망을 찾고 있었고, 내 깜깜한 어둠을 밝혀줄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찾아온 건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너무 깜깜한 나머지 방향을 잃었구나. 더는 어둠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구나. 그래서인지 나는 청년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스스로 자신이 어둡다고 인정하는 그가 찾는 것은, 어쨌든 빛이었을 것이다.


"시나리오 읽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메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정말이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먼저 관심을 두고 읽어준다는 사실만으로 들뜬 표정이었다.


반듯한 손 글씨가 적힌 노란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메일 주소와 청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치 미래의 명함 같았다. 누군가 그의 어둠을 알아봐 준 계기로, 청년이 깊은 철학을 가진 영화감독이 된다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게 나쁜 건 아니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느끼는 우울함, 죽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들은 유독 이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은 어둠에 홀리고, 죽음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둠은 해가 지면 찾아오는 짙은 밤처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어둠 속에 머무를 수 있고, 원한다면 그곳에서 내내 깊은 잠을 잘 수도 있다.


예전의 나처럼, 그리고 청년처럼,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다만 잠시만 그곳에 머무르라고. 어둠 속을 걷다보면 어딘가에서 당신을 이끌어 줄 빛을 만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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