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가 ‘여행’이라고 할 정도인 저자 박석현이 부자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들과 먼 훗날에도 잊히지 않을 만큼 소중한 추억을 여행이라는 이름을 통해 풀어낸 책이다. ‘물질적 유산’이 아닌 ‘정신적 유산’을 남기는 특별한 순간을 만나보자.
저자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하는 여행의 시간 속에서 얻은 경험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며 남은 인생을 새롭게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는 편안한 친구 같은 책이 되기를 바란다.
“‘아빠랑 같이 외국 배낭여행 다니면 재밌겠다. 아빠, 나한테 여행하는 법 알려줄 거지?’ ‘사랑하는 아들아, 자고로 여행이란 것은 가르쳐줄 수가 없단다. 제환공과 윤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느냐. 자고로 여행이란 것은 말이지…….’”
부모는 자식에게 살아 있는 거울과도 같다. “공부해라”, “바르게 행동해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먼저 책을 읽고,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다. 사실 아이들에게 매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이 부모 역할이니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해야 한다.
이렇듯 이 책은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길을 인도하는 고민을 담은 책이다. 여행의 미묘한 매력은 가르쳐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스스로 깨닫게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자녀와 아버지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이 책을 통해 부자가 함께한 특별한 시간 속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깨닫고 자녀와의 여행을 계획해보자.
■ 저자 박석현
지금까지 저자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는 ‘여행’이었다. 배낭 하나 둘러매고 낯선 곳을 드나들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낯선 타인들과 만나 친구가 되며 지난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여행만큼 삶에 큰 지혜의 틀이 되어준 것은 없다고 할 만큼 그 시간은 그에게 소중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저자는 이제 그 여행을 아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들과 먼 훗날에도 잊히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들과 아버지의 시간』을 여행이라는 이름을 통해 풀어낸다. 이 책은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써내려간 여행의 기록이다. 아들과 아버지는 여행을 통해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삶의 지혜를 나누는 관계가 되어간다.
■ 차례
프롤로그
1. 아빠와 아들, 단둘이 여행을 떠나면
사랑하는 아들, 우리 여행 갈까? | 아들아, 여행이란 무엇일까? | 테마가 있는 여행 그리고 삶 | 내저치고? Latte is horse. | 스마트 폰이 좋아? 아빠가 좋아?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여행을 떠나오면 우린 다 친구야 | 가자,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2. 우리 모두의 고향은 지구별
여행길에서 발견한 아들의 고향 | 책과 함께하는 여행 | 기다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아빠, 나 꼰대일까? | 놀며, 놓으며 살아가는 삶 | 아빠, 나 드디어 미쳤어 | 미스터 파르크(Park)를 위해 뱀을 준비했어!
3. 자유로운 영혼들의 특별한 여행
자유로운 영혼을 위하여 | 인생도 여행도 휴식이 필요하다 | 수염이 자라는 자연스러움의 미학 | ‘관점’을 찾아 떠나는 여행 | 남는 게 과연 사진밖에 없을까? | 아들은 사춘기에 철학자가 되었다
4. 생각 너머로 떠나는 시간
아들과 함께하는 동상동몽의 시간 |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방구석 여행 1 |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방구석 여행 2 | 왜 나를 나이 들게 두는가? | 독서모임을 통한 인문학 여행 | 딸과 아버지의 시간 1 | 딸과 아버지의 시간 2 | 가르쳐줄 수 없는 여행 |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 아버지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
에필로그
아들과 아버지의 시간
프롤로그
배낭 하나 둘러메고 방랑자처럼 홀로 20여 개국을 여행한 경험은 내 삶의 큰 밑거름이 되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십대 후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아이가 태어나니 더 이상 혼자 여행을 하는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기는 쉽지 않았다. 그 후로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야 했다. 대신 홀로 여행하며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시절의 향수를 가족과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들아, 여행이란 무엇일까?
중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주말에 남한강으로 낚시를 떠난 어느 날이었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챙겨 먹고 물속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확실히 중학생이 되니 초등학생 때보다는 대화의 수준이 많이 깊어진 듯했다. 사랑하는 아들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빠, 우리가 여행을 자주 다니잖아. 근데 아빠는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그리고 옛날에 왜 그렇게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어?”
“사랑하는 아들아. 여행을 떠나는 목적은 무엇이고,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 삶에서 여행이란 무엇일까? 아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뭔지 좀 들려줄래?”
“음, 글쎄. 여행은 만남? 새로운 경험과의 만남,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아닐까? 아빠는 어때?”
“하하, 우리 아들 이러다 잘하면 철학자 되겠는데? 이왕지사 지금 우리가 강물 속에 들어와 있으니, 그럼 아빠가 생각하는 여행은 뭔지 강물에 비유해서 알기 쉽게 이야기해볼게.”
타국에서 배낭 하나 둘러메고 방랑자처럼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상념에 사로잡힌다. 나에게 여행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흐르는 강물과 그 강물 위를 유유히 떠내려가는 조그만 돛단배 하나와 그 배 위에 유유자적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한번 떠올려봐라.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일상적인 삶’이라면 여행은 그 배에서 벗어나 강물 밖에 나와서 흘러가는 돛단배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여행이다.”
흘러가는 일상과 같은 그 강물에서, 그리고 돛단배에서 벗어나면 된다. 강물 밖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배 위에 있는 ‘내 삶’을 관망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여행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 아닐까. 굳이 무엇을 느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평소의 ‘내 삶’을 타인의 시선으로 그렇게 관망하면 무언가를 느끼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자연스레 무언가 머리와 가슴에 남게 된다.
여행을 떠나면 모든 것이 새롭고, 흥분되고,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 상태로 처음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면 떠나기 전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시간이 다시 여행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과연 내가 살아온 일상이 정말 일상이었고, 여행이 정말 여행이었는지? 아니면 일상이 여행이었고, 여행이 일상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네 삶 자체가 하나의 큰 여행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비로소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아들과 함께 허리까지 오는 물속에 들어와 강물과 하나가 된 순간, 여행을 강물에 비유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여행의 의미가 한결 더 쉽게 와 닿는 듯했다.
“자,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아들은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음…. 나는 여행이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만남.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삶의 소중한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살아가며 알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여행의 의미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지만, 정작 내가 수시로 강물 밖으로 나와서 ‘나’를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가 흘러 저녁이 되었고, 아들과 나는 강가의 자갈밭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우리 두 사람 곁에는 넓은 강줄기를 따라 시원한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의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치를 보는 눈이 아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기다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아들과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을 떠날 때가 간혹 있다.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는 우리나라이긴 하지만 행선지를 시골 마을로 정해놓고 찾아가다보면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 있는 곳이 아직도 허다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빨리하는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나도 아이도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편이었다. 하지만 기다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여행을 하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성숙해졌다.
그날 우리가 가기로 했던 목적지로 들어가려면 마지막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도착 예정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날씨가 꽤 더웠던 탓인지 아들은 버스가 빨리 오지 않는다며 힘들어했다.
“아빠. 버스가 왜 이렇게 안 와? 시간이 한참 지났잖아. 아, 지겨워!”
“사랑하는 아들아.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 인내심의 연속이라고 하잖아. 아빠는 삼십 년을 기다린 끝에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우리 아들을 만났잖아? 수십 년도 기다렸는데, 이거 몇 분을 못 기다려서야 되겠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우리 기다리는 동안 게임이나 할까?”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예전 여행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해가 조금씩 저물어갈 저녁 무렵 인도의 어느 시골 조그만 기차역 안이었다. 인도에서는 기차가 연착되는 일이 다반사다. 연착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연착은 일상화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고, 누구 하나 기다리는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연착을 당연히 여겼고, 배낭에서 책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상하리만치 많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초조해졌고, 도대체 이놈의 기차는 언제쯤 도착하는지 지루해졌다. 음악을 듣다가 벤치에 앉아 쪽잠을 잤다. 기차는 결국 그날 12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취소가 되었다. 밀려오는 허탈함과 황망함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역무원에게 따져 물었지만 그는 연신 ‘문제없다’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역시 운명이겠거니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려 머물던 숙소로 다시 향했다.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듯하나 사실 이해하자고 마음먹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기관사가 갑자기 큰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고, 열차 사고가 났거나 아니면 상식을 벗어나는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하여 기차가 출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이해는 깨달아서 안다는 뜻인데, 영어로 접근하면 더 쉽게 수긍이 가능하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는 말 그대로 ‘이해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언더(under)’와 ‘스탠드(stand)’를 따로 분리하면 단어의 의미가 조금 더 깊게 다가온다. 정말 ‘언더 스탠드(아래에 서다)’를 했을 경우에만 상대방에게 ‘이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법이다. 내 마음을 낮추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의 말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수긍할 수 있다. 이날 이후 세상을 향한 나의 이해는 조금 더 깊어졌다. 상대의 질문에 나를 낮추고, 한 번 더 생각한 후 비로소 대답을 건네는 계기가 되었다.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들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 이렇게 말했다.
“아빠, 아임 언더 스탠드. 버스가 무슨 사정이 있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윽고 버스는 도착했고, 우리는 연착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그 이후 깊어진 이해는 아들과 나를 조금 더 철들게 만들었고, 기다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조금 더 성숙해졌다.
‘관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아들이 중학생이 되고 두 번째 맞이하던 봄, 길고 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찾아올 무렵 경남 하동 섬진강으로 낚시 여행을 떠났다. 벚꽃 필 무렵에 섬진강 주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싹을 틔우는 초록들과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햇살이 야외 활동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사람을 부추긴다.
순간 욱해서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먼저 충분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 떠나는 여행도 있다. 이번에는 아들과 단어를 하나 정하고, 그 단어에 대한 의미를 깊이 있게 알아보는 여행을 해보기로 계획했다. 지극히 아빠 주관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관점’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이 ‘관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방법으로 단어의 본질에 점점 가까이 가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집에서부터 준비해온 ‘관점’을 주제로 한 여행은 벚꽃 낚시와 함께 어우러졌다.
아들은 왜 물고기들이 생각보다 입질을 잘 안하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평소에도 낚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하는 질문인데, 마침 또 이번 여행의 주제가 ‘관점’이라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들. 낚시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물고기의 관점에서 생각해봐. 아무 생각 없이 낚싯대를 흔드는 것이 이니라, 내가 물고기라면 어떤 움직임에 반응을 하고 어떤 미끼에 더 유혹이 될까 하고.”
예전에 집 근처 제법 큰 절에서 불교 기초교육을 들은 적이 있다. 12주간의 수업은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로 마무리했다. 템플스테이의 첫날 저녁에는 발우공양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발우’는 승려들이 식사할 때 사용하는 그릇을 가리키며, ‘공양’은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을 말한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모두 본인의 발우에 설거지를 하기 위한 청수(맑은 물)를 부어 사전에 하나씩 나눠 받은 단무지로 발우를 깨끗이 닦는다. 그리고 남은 물과 단무지는 모두 본인이 먹어야 한다. 오랜 시간 수행을 한 승려들이야 고춧가루 하나 없고, 밥풀 하나 없이 퇴수가 가능하겠지만 어제까지 밖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퇴수 그릇은 온갖 양념과 밥풀로 인해 뿌옇게 엉망이 되어 있었고, 스님도 그것을 예상한 듯이 가만히 퇴수 그릇을 바라보았다. 보통 퇴수가 지저분하게 나오면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마셔야 했는데, 보살들은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리며 메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스님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물속에 들어 있는 부유물은 조금 전까지 여러분이 맛있게 먹었던 음식입니다. 지금은 그 크기만 작아졌을 뿐입니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보기에 좋고, 맛있어 보이고, 그것이 잘게 부서져서 작아진 후 물속에서 들어 있다고 해서 더러워 보는 것은 그만큼 여러분의 ‘관점’이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크기만 작아졌을 뿐 이 음식은 밭에 싱싱하게 달려 있을 때나 여러분의 발우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으로 있을 때나 물과 섞여 더러운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변한 것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땅 하고 한대 얻어맞은 듯 했다. 발우공양을 통해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관념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아싸, 왔다. 아빠 고기가 물었어! 확실히 물고기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입질이 바로바로 오네. 아까랑은 좀 다른데? 이제 좀 감이 오는데?”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본 2박 3일 간의 여행은 아들과 나를 평소보다 더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우리 부자는 종종 ‘관점’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단어’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나만의 관점으로 바라본 세상이 누군가의 눈에는 또 다르게 비칠 수 있기에 늘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쓴다. 아들과 함께하는 여행 또한 아들이 세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다양한 관점을 통해 아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내게 더 많은 배움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나 역시도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늘 실감한다.
가르쳐줄 수 없는 여행
보고 자란 것이 무섭다고 했던가. 어느 날 아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아빠, 나도 아빠처럼 넓은 세상을 다니며 여행하고 싶어.”
“여행 좋지. 여행만큼 인생을 배우기 좋은 것도 없지. 스무 살 넘으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다니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자. 책이나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좋은 공부를 여행을 통해 많이 할 수 있을 거야.”
“아빠랑 같이 외국 배낭여행 다니면 재밌겠다. 아빠, 나한테 여행하는 법 알려줄 거지?”
“사랑하는 아들아, 자고로 여행이란 것은 가르쳐줄 수가 없단다. 자고로 여행이란 것은 말이지….”
『장자(외편)』「천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 군주인 환공이 대청 위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을 때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노인 윤편이 망치와 끝을 놓고서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왕께서 읽으시는 것이 무슨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네.”
“그렇다면 그 성인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지금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그러자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감히 과인이 글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깎는 목수인 네놈이 무얼 안다고 함부로 참견이냐? 지금 한 말에 변명할 구실이 있으면 좋거니와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그러나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 일의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긋하게 깎으면 헐거워져 꼭 끼이지 못해 쉽게 빠져버리고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빨리 깎지도 않고 느긋하게 깎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손에 익혀 마음으로 짐작하는 것이라 입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정확한 수치가 중간에 있기는 하나 저는 그것을 제 자식에게도 가르칠 수가 없고 제 자식도 그것을 저에게 배워갈 수가 없어서 제 나이 일흔이 되도록 직접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정확히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왕께서 읽으시는 그 글이 옛사람의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현자는 선자의 경험을 책으로 배운다고는 하지만 실전 경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살아 있는 거울과도 같다. “공부해라”, “바르게 행동해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먼저 책을 읽고,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이 있다. 세상의 많은 스승들은 진리를 단편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와 우화를 통해 제자가 깊은 생각을 한 끝에 스스로 깨우치도록 만든다. 바로 제자를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밤새 진리만 딱딱하게 늘어놓으면 제자들은 지루해서 잠이 들 것이다. 깨달음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혜로운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지혜로운 스승의 역할은 부모가 해주는 것이 가장 좋고,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깨우쳐야 한다. 깨우침은 많은 경험과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가능하다. 아이의 질문에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총동원한 후 각색해서 재미있게 들려주어, 아이가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찾을 수 있도록 하자.
삶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행운과 고난이 연속하는, 장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아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의 발전된 삶이 아름다운 당신에게도 있기를 소망한다.
에필로그
삶은 재미있어야 한다. 너무 진지하기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가볍기만 해서도 안 된다. 진지함과 가벼움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삶이 재미있어지고, 그 가치가 더 빛날 수 있다. 여행은 우리가 살아가며 진지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즉 재미있게 삶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지금 바깥에는 바람이 분다. 늘 그렇듯이 이 바람은 나를 현재에서 벗어나 또 다른 어딘가로 이끄는 듯하다.
“아들! 우리 다음 여행은 어디로 떠나볼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