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이미예
ǻ
팩토리나인
   
13800
2021�� 07��



■ 책 소개


1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힐링 판타지’
잠들어야만 입장 가능한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초대합니다

어느덧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일한 지 1년이 된 페니. 제법 꿈 백화점의 일이 손에 익어 자신감이 넘친다. 첫 번째 연봉협상과 함께 꿈 산업 종사자로 인정을 받아 ‘컴퍼니 구역’에도 출입할 수 있게 된 페니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페니를 기다리고 있는 건, 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로 가득한 ‘민원관리국’이었다. 민원을 낸 사람들은 왜 꿈을 꾸지 않으려고 할까? 그리고 사라진 단골손님들은 어디로 간 걸까? 

꿈 백화점의 각 층에서 애쓰는 매니저들과 손님들을 위해 특별한 축제를 준비하는 달러구트. 페니와 꿈 백화점의 직원들은 과연 오랜 단골손님을 되찾을 수 있을까?

■ 저자 이미예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에서 재료공학을 공부하고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했다.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現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첫 소설을 발표해 후원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성공적으로 펀딩을 종료하였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교보문고·영풍문고 2020 종합베스트셀러, 2020년 예스24·인터파크·알라딘·영풍문고에서 뽑은 ‘올해의 책’을 수상하였고, 서점인이 뽑은 2020 올해의 책, 2021년 부천·창원·포천·남양주시·용인시·의정부·대구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2021년 상반기 교보문고, 예스24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였다.

잠을 자면 기억에 남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좋아하는 것은 8시간 푹 자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잠도 못 자고 밤새워 일하기

■ 차례
프롤로그 - 달러구트의 다락방

1장 - 페니의 첫 번째 연봉협상
2장 - 민원관리국
3장 - 와와 슬립랜드와 꿈 일기를 쓰는 남자
4장 - 오트라만이 만들 수 있는 꿈
5장 - 테스트 센터의 촉각 코너
6장 - 비수기의 산타클로스
7장 - 전하지 못한 초대장
8장 - 녹틸루카 세탁소
9장 - 초대형 파자마 파티

에필로그1 - 올해의 꿈 시상식
에필로그2 - 막심과 드림캐처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달러구트꿈 백화점으로부터 남쪽으로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주택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페니는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그녀는 꿈 백화점의 1층 프런트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입사 1주년을 맞이해 부모님과 작은 축하 파티 겸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1년 동안 적응하느라 고생 많았어.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페니. 이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야.”


페니의 아빠가 열 권 정도 되는 책들을 식탁 위에 힘겹게 올려놓았다. 전부 사회 초년생을 위한 자기계발 서적과 에세이였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이제 일한 지 1년이 지나서 국가에서 인정하는 ‘꿈 산업 종사자’가 됐어요.”

“그럼 혹시?”

“네, 맞아요! 서쪽에 있는 ‘컴퍼니 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 나온대요. 게다가 내일은 직원 한 명씩 따로 연봉 협상을 할 거래요. 아마 내일 연봉협상 때 달러구트 님께서 출입증을 주실지도 몰라요. 이제 정말 꿈 백화점의 직원이라는 게 실감나요.”


**


한편 꿈 백화점의 주인장인 달러구트는 자신의 다락방에 있었다. 그의 다락방은 고풍스러운 목조건물이자 층마다 다양한 꿈 상품을 판매하는 ‘꿈 백화점’의 꼭대기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다락방 한가운데에는 총 네 개의 침대가 머리 부분을 맞댄 채 놓여 있었는데, 네 개의 침대는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의 높이, 그리고 침구의 소재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침대를 네 개나 놓은 것은 매일 밤 꾸고 싶은 꿈의 분위기에 따라 골라서 눕기 위한 것이었는데, 간결한 그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었다.


달러구트는 이른 저녁에 퇴근한 이후부터 다락방에 홀로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셔츠형 잠옷을 입고네 개의 침대 중 가장 낮은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이번 주에만 30개가 넘게 도착한 편지들을 한꺼번에 읽고 있었다.


달러구트는 따분한 표정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편지의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그것이 손꼽아 기다리던 편지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달러구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최근에 달러구트의 모든 관심은 가을에 진행할 어떤 ‘커다란 행사’에 쏠려 있었다. 그건 아직 가게의 직원들조차 모르는 달러구트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다행히 관련 업체들로부터 긍정적인 회신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 뒤에는 직원들에게도 두근거리는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달러구트 님, 아침부터 창고에는 어쩐 일이세요?”

“보다시피 정리할 게 있어서 말이야. 일찍 출근했구나, 페니.”


“네. 아침에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참, 달러구트 님도 아셔야 할 일이 있어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단골손님 두 분이 한동안 가게에 방문하지 않고 계세요. 330번 손님과 620번 손님인데, 민원을 내신 적도 없어요.”


“나 말고도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직원이 있다니, 무척 기쁘구나.”

“역시 알고 계셨군요? 다행이에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얼른 행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구나. 혹시 파자마 파티에 가본 적이 있니?”

“친구네 집에서 잠옷을 입고 밤새도록 벌이는 파티 말씀이지요? 아주 어릴 때 딱 한 번이요. 정말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커서는 그런 기회가 없었네요.”


“기대하렴. 다가오는 가을에 우리 가게에서 파자마 파티가 열릴 거야. 아니지, 우리 가게뿐만 아니라 주변의 거리를 모두 파티 장소로 쓸 거란다.”


달러구트의 말에 페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니, 우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초대형 파자마 파티를 열게 될 거야.”


**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330번 단골손님은 60대 중반의 여성이다. 그녀는 10년 전에 갱년기를 다른 사람보다 수월하게 넘겼고, 직장생활도 무사히 정년까지 마쳤다. 세 명의 자녀를 남편과 함께 키워냈고, 올해 초에는 막내까지 장가를 갔다. 막내의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이제 정말 다 끝냈다고 긴장을 풀던 순간, 예기치 못한 무기력이 여자를 집어삼켰다.


돌아보면 자신 말고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하루하루였다. 35년간의 직장생활이 끝났다는 것과 텅 빈 둥지가 된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는 자각이, 한꺼번에 단단한 고무공처럼 사방에서 튀어와 여자의 가슴팍을 때렸다. 주변에서는 그녀에게 이제 푹 쉴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 말이 편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 고깝게 들렸다.


정신 차려보니 크게 아프지 않은 게 다행스러운 나이가 되어 있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볼 때면,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보는 듯한 어색함마저 느껴졌다. 일부러 큰 거울을 작은 거울로 바꿨다. 하지만 곁에서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남편의 얼굴만 보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간 세월의 흔적을 외면할 도리가 없었다.


아침에 마실 차를 끓이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어떤 날은 반찬을 왕창 만들어보기도 하고 조그만 작물들을 키워보기도 했지만, 의욕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내 삶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 대출을 다 갚을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지, 애들 전부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힘내야지, 막내가 장가갈 때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지 하고 목표 지점을 정확히 조준하고 흔들림 없이 살아가던 날들이 그립기까지 했다.


이제 뭘 위해, 어떤 날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무기력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필요치 않은 잠을 청하던 여자는, 길 잃은 사람처럼 정처 없이 꿈속 세계를 걸었다. 그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란 털로 뒤덮인 녹틸루카를 만났다.


“혹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나요?”


녹틸루카는 그녀의 기분을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함께 갈래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을 알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녹틸루카는 그녀를 자신의 꼬리에 태웠다. 그녀는 그렇게 푸른 녹틸루카를 따라 세탁소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


330번 손님에게 무사히 초대장을 전달한 달러구트와 페니는 이제 620번 손님을 찾기 위해 세탁소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천장이 조금 낮아진 공간에 커다란 소파들이 보였다.


“620번 손님이 저기 계시는구나.”


**


남자는 자타공인 열심히 사는 청년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루를 알뜰하게 쓸 수 있냐고 묻는 친구들도 많았고, 후배들은 그를 닮고 싶은 선배로 꼽았다. 남자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만이 잡생각에 빠지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많은 경우에 남자의 생각은 옳은 듯했다. 남자는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답 없는 우울에만 빠져 있거나 감정에 매몰되어 지금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런 이들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의 동기 부여 수단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그는 가족을 정말로 사랑했다. 철이 든 이후에는 가족을 위해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생 오래된 차를 고치고 또 고쳐서 탄 아빠한테는 새 차를, 엄마한테는 한도가 넉넉한 카드를 선물하고 싶었지만, 시간은 남자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따금 자신이 자리를 잡고 나면 자신이 몇 살이고 부모님은 각각 몇 살일지를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대부분의 일이 그의 마음 같지 않았다. 노력만으로는 경쟁률이 50:1이 넘어가는 시험의 당락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고, 기다려도 도통 자리가 나지 않는 일자리를 뚝딱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떠나보낼 때마다, 그리던 모든 미래의 일들을 한꺼번에 뒤로 미루고 또 미루길 반복해야 했다.


‘지금의 경험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젊을 때 겪는 좌절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성공의 초석이다.’라는 식의 말들을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해놓는 것도 다 옛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번듯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 같아서 싹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남자는 빠르게 의욕을 잃어갔다.


혼자 마음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것이 가장 손쉽게 마음을 돌보는 방법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장나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의 잔고장처럼 껐다 켜면 싹 나았으면 좋겠어.’


그는 자신을 껐다 켜는 것처럼 잠들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잠드는 건 쉽고, 일어나는 데는 의지가 필요했다. 무기력은 어느새 그의 힘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남자는 우울에 잠식될까 두려워 함부로 우울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누구도 남자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꿈에서 빠져나와 열심히 살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자꾸 늘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데도 자꾸만 잠을 청하고 방의 불을 껐다.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더니 흔쾌히 초대장을 받았다. 그는 대화하는 도중에도 손을 쉬지 않고 녹틸루카들을 도와서 수면양말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


은퇴 후 무기력증에 빠졌던 여자는 꿈속에서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를 되새기고 있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힘겹게 일어나고, 주말에는 힘든 평일을 보상받듯이 달콤한 늦잠을 자려다가 애들이 찾는 소리에 남편과 함께 벌떡 일어나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당탕 난리를 피우며 바쁘게 출근을 준비하고, 나가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다가 마주치며 인사하던 이웃의 얼굴도 등장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관해 함께 의논하고, 번갈아 등장하는 기쁜 일과 걱정스러운 일에 웃고 울면서 서로를 다독이던 순간도 섞여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이유를 찾아가며 그날에 어울리는 음식을 차려 먹고, 철마다 피어나는 꽃과 제철 음식에 감사하던 일상도 매끄럽게 흘러갔다.


회사 생활에서 있었던 성취의 순간과 실망스러운 순간, 동료들과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시간 순으로 나타났다.


꿈속의 여자는 신혼살림을 마련했던 단칸방에서도 다시 살았고, 첫 아이를 낳고 이사했던 두 칸짜리 녹색 대문집에서도 살았다. 누워서 보는 천장의 울퉁불퉁한 부분과 서서 샤워할 때 바라보던 특이한 무늬의 타일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실제로 각 장면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은 찰나였다. 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장소가 여자가 충분히 머물렀던 인생의 거점이었으므로, 잠든 여자는 꿈을 꾸면서 그와 관련한 많은 기억을 함께 떠올릴 수 있었다.


**


“여보, 어제 꿈에 우리 예전에 살던 집이 보이더라. 우리 예전에 살던 방 두 칸짜리, 2층에 주인이 살던 녹색 대문집. 기억나?”


잠에서 깬 여자는 남편에게 말했다. “녹색 대문집? 당연히 기억나지. 그 집 주인 이름이랑 월급날 시켜 먹던 치킨집 전화번호까지 기억해. 나도 가끔 거기 살던 때가 꿈에 나와. 당신이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 많이 울었지.”


남편이 여자의 옆에 걸터앉아서 옛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땐 왜 그랬나 몰라. 짐을 다 들어내고 나니까 내 목소리랑 당신 목소리가 텅 빈 집에 울리는데, 그게 너무 이상하고 싫은 거야. 내가 거기서 밥 먹고, 당신이랑 떠들고 애들 재우고 청소하느라 돌아다니고, 웃고 울던 추억들이 짐이랑 같이 몽땅 들어내진 것 같더라고. 그리고 그 집한테 너무 고마웠어. 우리 가족이 제일 고생했던 때잖아. 이사갈 때까지 잘 품어준 게 고마워서 울었나 봐.”


“맞아, 참, 우리가 제일 처음 살았던 집도 기억해? 내가 총각때 혼자 살던 코딱지만 한 월세방 말이야. 정말 벽이랑 천장이랑 바닥밖에 없는 초라한 집이었어. 그땐 당신한테 같이 살자고 보여주기도 부끄러운 집이었는데, 난 사실 그 집도 그리워. 그 왜, 여름에 이불 빨래가 안 말라서 덜 마른 이불 위에 잠깐 누워서 시답잖은 얘길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잖아. 나는 그 기억이 왜 이렇게 좋은가 몰라.”


남편은 여자보다 더 신나서 얘기를 이어갔다.


“참 별걸 다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큰맘 먹고 값비싼 호텔에서 묵었던 날은 조식이 맛있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날에 우리 애들이랑 김밥 만들어먹고 호박전 부쳐 먹었던 걸 왜 이렇게 생생할까? 아유, 얘기하다 보니까 우리 참 재미나게도 살았다.”


“그래. 재미나게 오래 잘 살아왔지. 당신이랑 내가 함께 지낸지 정말 오래됐어.”

“그래서, 지겨워?”

여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으이구, 또 그런다. 지겹긴 뭐가 지겨워? 내 추억이 당신 추억이라서 좋다는 뜻이지.”

남편이 여자의 손등 위에 손을 포개고 토닥였다.


언제나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대되는 일이 없다고 슬퍼하기엔 99.9%의 일상이 너무도 소중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도, 매일 먹는 끼니와 매일 보는 얼굴도.


그제야 여자는 내 삶이 다 어디로 갔냐 묻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실은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660번 손님인 젊은 남자도 꿈속에서 지난 추억을 마주하고 있었다. 꿈속의 그는 수능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르지 못해서 재수를 결심했던 19살 연말, 딱 그 무렵이었다.


심란했던 남자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양말 하나 챙기지 않고 무박 2일로 친구들과 해돋이를 보러 갔었는데, 그때의 모든 순간을 꿈에서 다시 겪고 있었다.


기차의 가장 저렴한 좌석에 앞뒤로 붙어 앉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유치한 농담을 하며 킬킬 웃고, 도착할 때까지 한숨 자려다가 차체에서 풍기는 매캐한 기름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던 것마저 완벽하게 재현됐다. 꿈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와 친구들은 해가 뜨는 걸 기다리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들어갔던 건물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동그랗게 떠버린 해를 보고 허탈하게 한참을 웃고, 다 떠버린 해에다 소원을 빌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입시험에서 겪은 실패 앞에서, 19살의 남자가 갖고 있던 소원은 아주 뚜렷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껴지게 해주세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말은 없이 여행은 즐거웠냐고 묻던 부모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에게 바라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는 너무도 따뜻한 얼굴이었다.


잠에서 깬 남자는 꿈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 빌었던 소원만큼은 기억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지금의 남자는 알고 있었다. 후회 없이 공부한 1년과 좋은 결과가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당시엔 쓰라리게만 느껴졌던 경험들이,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남자의 형태를 다른 사람과 다른 모양으로 잡아나가는 밑 작업이었다. 남자는 부딪혀서 깨지고 갈려 나가더라도 그 밑에 남는 조각이 결국에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힘껏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남자에게 필요한 주문은 딱 하나였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파자마 파티를 다녀간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추억들이 각자의 꿈속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분명 그들의 머릿속에 있었지만, 일부러 꺼내 보지 않으면 곰팡내 나는 책장에 언제까지나 모셔져 있을 법한, 옛날 사진첩 같은 머릿속 한쪽 구석의 기억들이었다.


저렁 애랑은 평생 가도 못 친해지겠다고 생각했던 지금 절친과의 첫 만남의 장면도, 늘 만감이 교차하던 고단한 날들의 퇴근길 풍경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추억을 마주했지만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다.


어떤 날들도 추억이 되고 나니 사소한 기쁨과 슬픔 따위는 경계가 흐릿해지고,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이 추억은 분명 내 것이 맞는데, 어디에 있다가 어젯밤 꿈에 나에게 다시 돌아온 걸까?”


파티에 다녀간 사람들은 꿈에서 깬 뒤, 오랜만에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


일주일 내내 진행된 파티는 이제 마지막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기다렸던 단골손님들이 모두 다녀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페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파티를 즐겼다.


“달러구트 님! 준비한 꿈들이 모두 매진되고 있어요. 이게 다 제가 밖에서 열심히 손님을 모았기 때문이에요. 내년 연봉협상 때 잊으시면 안 돼요!”


모태일이 멀리서 소리쳤다.


“모태일은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구나. 이런 이벤트 한 번으로 모든 단골손님들이 당장 돌아오지는 않을 거야. 여전히 민원관리국에도, 또 세탁소에도 사람들이 많겠지. 하지만 우리는 갖가지 꿈을 마련해놓고 그저 기다리면 된단다. 그런...”


“다들 그럴 때가 있기 때문이죠. 그렇죠?”


그때, 프런트에 다가온 손님이 페니와 달러구트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가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손님은 빈손이었다.


“손님, 마음에 드는 꿈을 찾지 못하셨나요?”

“네, 오늘은 어쩐지 꿈을 안 꾸고 자도 좋을 것 같아서요.”


손님이 겸연쩍게 씨익 웃었다.


“맞아요. 그런 날도 있죠.”

페니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가게 점원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의외네요. 저를 붙잡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손님이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페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급할 거 없죠. 우린 매일 만날 거잖아요.”


페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 표정이 옆에 있는 달러구트의 표정과 제법 닮아 있었다.


“손님, 꿈 백화점은 항상 여기 있을 거예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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