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평생 최강

   
고바야시 사요코 (지은이), 김지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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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북스
   
17800
2025�� 04��



■ 책 소개


“사랑이 아닌 우정으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한 지붕 아래 여자 넷이 모여 신나게 웃고 떠드는 연작 소설

이 책은 십년지기 여자 넷이 ‘우리끼리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말장난도 많고, 게임도 하고, 대화는 언제나 코믹하다. 아키가 아이를 낳고, 네 사람이 함께 아이를 키워 가는 전개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기존 통념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안겨 준다. 저마다 알게 모르게 사회가 주입한 사랑이란, 섹스란, 가족이란, 육아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네 여자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의 방식에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혼자가 너무 익숙해진 사람들, 그리고 ‘같이’라는 말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 가볍고 명랑하게, 그리고 놀랍도록 깊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갇히지 말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자기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도 괜찮다고.

■ 저자 고바야시 사요코
저자 고바야시 사요코는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문화구상학부를 졸업한 뒤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2015년 ‘망해라 지하 아이돌’로 제14회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 독자상을 받으며 데뷔하였다. 2021년 발간된 ‘Paradox Live Official Fan Book’에 소설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잡지 ‘소설신조’에 연재하던 소설이 ‘어쩌면 우리는 평생 최강’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 역자 김지혜
역자 김지혜는 일본 문화복장학원에서 인더스트리얼 머천다이징을 전공,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일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보름달이 뜬 밤에 너를 찾다’, ‘무서운 방’, ‘살아있는 회사 죽어있는 회사’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prologue_우리의 시대는 끝났다

1.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최강이고 싶다
2. 멋진 우리
3. 니나는 생각 중
4. 흔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5. 멋대로 춤추지 마
6.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

 




어쩌면 우리는 평생 최강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최강이고 싶다

“요즘은 그냥 여자 친구들이랑 평생 살고 싶어!”


이때를 위해 일주일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요일 밤이었다. 카노코가 진한 하이볼이 든 큰 잔을 쿵 내려치듯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10년을 사귄 유타와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약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쌩쌩하게 감정이 널뛰는 카노코의 말에 미오, 아키, 유리코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고기를 먹었다.


핀볼처럼 온갖 모서리에 부딪히며 화장실에서 돌아온 카노코를 보며 유리코가 웃었다.


“카노코, 너는 남자가 없을 때가 더 재미있으니까 평생 남자 친구 만들지 마.”

“응? 그러니까 남자 없이 평생 같이 살자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얘기 좀 똑바로 들어. 나랑 같이 살면 평생 재미있게 해 줄게. 두고 봐. 나랑 같이 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똑똑히 느끼게 해 준다니까.”

“그런데 진짜로 우리 넷이 같이 살면 매일 엄청 재미있겠다.”


혼자 집에 있으면 온라인 동영상만 보게 되지만, 친구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은 유난히 재미있어서 새삼스럽게 ‘어라? 텔레비전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었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매일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거잖아. 최고 아니야? 다 같이 모여서 실시간으로 음악 방송이나 예능 방송을 보자. 재미없는 회사 회식은 전부 제치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카노코 안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넷이 같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러면 일단 2년 정도 같이 살아 볼래?”


그 제안에 아키와 유리코는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나쁘지 않은데? 혼자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지금 아니면 못 하는 거니까 괜찮을 것 같아.”


이직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아키의 다음 회사가 결정되면 네 명의 근무지를 고려해서 구체적인 집을 찾자고 의장인 미오가 선언했다.


미오의 집에 와서는 큰 소리로 떠들 수가 없어서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고, 번갈아 가며 몸을 씻었다. 침대와 그 옆 바닥에 깔린 이불에 둘씩 나눠 눕고 30분쯤 지나자 겨우 대화가 조금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웃긴 얘기를 하며 깔깔대는 넷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바짝 붙어 누워 있을 때면 몽롱한 잠기운과 속에서 달콤해진 공기 때문에 평소에 꺼내지 못한 중요한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우리 진짜로 가족이 되기로 할까? 평생 같이 사는 거야. 그런 인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아?”


카노코의 말에 바닥에 누워 있던 아키와 유리코가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카노코와 미오도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네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그것은 네 사람에게 있어 아직 만나지 못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는 일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고 확실한 행복이 보장된 계획처럼 느껴졌다.


“2년이 아니라 그냥 넷이 계속 같이 살자. 누가 적당히 만들어 온 아이를 같이 키우는 것도 좋겠다.”


카노코가 말하자 미오도 동의했다.


“애초에 나이랑 성별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로 가족이 되는 것보다, 나이가 비슷한 동성이 모여서 같이 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잖아.”

“나왔다! 미오의 합리성 지상주의.”

“가족한테 효율을 따지면 어떡해.”

“카노코가 ‘역시 남자가 좋으니까 빠지겠다.’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때는 3일 밤낮으로 송별회를 하자. 이름하여 ‘탈출 같은 소리 하네.’ 파티!”

“그건 탈출이 아니지! 탈락이야, 탈락!”

“웃기지 마! 나는 절대로 탈락할 일 없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 다 먼저 저세상에 간 다음에 갈 거니까 부끄러운 데이터는 다 지워 둬라!”


아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으며 또 다 같이 이불에 파고들었다. 마침내 네 사람에게 본격적으로 졸음이 쏟아져서 모두 비슷한 꿈을 꾸며 잠이 들었다.



멋대로 춤추지 마

단골 러브호텔과는 완전히 딴판인 간소한 비즈니스호텔의 한 방에서 아키는 격리 기간 열흘 중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자마자 호텔 요양 허가가 떨어진 점은 다행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여자 친구들과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에 계속 머물렀다면 아무리 조심해도 내부 감염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키는 가져온 노트북으로 줌(Zoom)을 열고 화면 너머로 오랜만에 동거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몸은 어때? 후유증은 괜찮아? 등 가벼운 안부 인사가 오간 후, 아키는 ‘우리 셰어하우스의 새 멤버 영입 제안’이라는 제목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우선 보고부터 드리겠습니다. 저, 이번에 임신했습니다.”


화면 중앙에 ‘보고 사항’이라는 큰 글씨가 적힌 슬라이드를 띄우고 선언하자 모두 순식간에 웃음을 멈췄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이는 원하지만 남편은 원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남성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주사기 요법을 여러 차례 시도한 결과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습니다.”


주사기 요법이란 바늘 없는 주사기와 비슷한 기구에 정액을 넣고 질에 주입해 수정을 시도하는, 성관계를 수반하지 않는 임신 방법이다.


“저는 가능하다면 우리가 넷이 함께 사는 이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제 아이의 부모가 되어 줬으면 합니다.”


한 박자 쉬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의 저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습니다. 애초에 레이와 시대의 이 ‘헬(Hell) 도쿄’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남편이 있어도 상당히 버겁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네 명이라면 어떨까요? 네 명이 부모 역할을 나누어 맡으면 아이를 무리 없이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엔터키를 눌러서 슬라이드를 넘겼다. 코로나 확진자만 머무는 이 건물은 매우 조용해서 타자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학생 지원 기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교육비를 제외한 아이 양육에 드는 비용은 대략 연간 100만 엔 정도입니다. 단순히 계산하면 100만 엔을 넷이 나누면 25만 엔, 이를 월 단위로 나누면 한 사람당 2만 엔 조금 넘습니다.”


넷이 나눈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오른쪽 상단의 작은 화면 속 미오가 크게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즉 매달 2만 엔씩, 여러분이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아이 양육에 투자해 주셨으면 합니다. 펀딩 상품은 결혼과 출산 없이 4분의 1만 부모가 되어 아이를 가지는 삶입니다. 물론 앞으로 여러분 중 누군가가 이 집에서 출산한다면 저도 똑같이 부모가 되어 자금을 제공하고 육아에 전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줌의 화면 공유를 종료하자 축소되어 있던 동거인들의 얼굴이 화면에 다시 나타났다. 4분할로 표시된 동거인들을 향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오늘 회의는 거실이 아니라 각자의 방에서 개별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미리 요청했다. 세 사람이 거실에서 같은 분위기를 공유하면 이쪽이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화면을 통해 서로 마주하니 쓸데없는 대화가 사라져서 오히려 회의라는 형태를 갖출 수 있다는 장점을 새롭게 발견했다.


카노코와 유리코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는 가운데 미오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있잖아, 다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을 테니 내가 대표로 말할게.]


“응.”이라고 대답하며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려면 말이야, 임신 계획을 세우기 전에 제안하는 게 순서잖아. 이미 생겨 버렸으니 말 그대로 프로젝트가 시작돼 버린 상황이라고. 진짜 너무 치사해. 게다가 우리는 동료도 아니고, 거래처도 아니고 친구잖아. 못 하겠으니까 나가 주세요, 혼자 열심히 키우세요, 그래도 가끔 안아 보게는 해 주세요... 같은 말을 어떻게 해. 월 2만 엔의 지원이 부담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낼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도 알잖아. 우리 꽤 오래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뻔뻔하다.]


“응, 미안.”


[아니, 사과하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늦어져서 미안해. 하지만 축하해.]

[난 그 계획에 찬성할게. 나도 부모가 되고 싶어.]


유리코가 한 손을 들고 선언했다.


[나는 아이가 있는 삶에 관심은 있지만, 커리어나 심신의 부담을 생각하면 출산이라는 행위 자체는 너무 싫었거든. 그런데 아키가 대신 해 준다면 딱 좋지. 돈이라면 낼게. 물론 무통 분만으로 낳아 줘. 나는 우리 넷 중에서 부모로서의 자질이 제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무신경하고 배려심도 없고 윤리관이 박살 나서 바람이나 피우는 최악의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4분의 1만 부모가 되면 왠지 괜찮을 것 같아. 월 2만 엔이 아니라 4만 엔을 낼 테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책임지게 해 줘. 그러면 조금은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유리코, 고마워.”


유리코의 말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화면으로 들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직접 들었다면 이 감정의 고조를 억누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수입도 있고 남자에게 집착하지 않는 여자는 강하네.]


씁쓸하게 웃는 카노코의 중얼거림을 유리코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겁먹었어?]

[나는 카노코가 제일 먼저 찬성할 줄 알았는데. 예전에 말했잖아.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느니, 다 같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느니. 오히려 이런 얘기는 카노코가 먼저 꺼낼 줄 알았어.]

[아니, 물론 넷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멋진 일이지. 그건 그렇지만....]

카노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우리는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너무 앞서 가면서 많은 걸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아....]


‘카노코는 내가 뭔가를 포기했다고 느끼나?’


강렬한 위화감에 압도당했다. 나는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이야기는 전혀 원하지 않고 나와 맞지 않는 가치관이라고 충분히 설명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전혀 전해지지 않았나?


[그래? 나는 오히려 많은 걸 손에 쥐는 것 같은데.]


힘없이 고개를 떨군 카노코에게 미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들과의 생활. 아이. 일. 전부잖아! 우리 엄청난 욕심쟁이 아니야? 난 지금 진심으로 신나. 우리 넷이 아이를 가진다니... 드디어 진짜 가족이 되는 거잖아.]


그동안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미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카노코를 설득했다. 아키는 당사자면서도 제삼자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교활하게도 미오가 카노코를 설득하려 애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카노코는 한번 흐름에 휩쓸리면 결국 기분 좋게 이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 괜히 찬물을 끼얹어서 카노코가 빠지면 미오까지 이 계획에서 손을 뗄 것만 같았다.


미오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카노코는 당황한 눈치를 보였지만 결국 그리 나쁘지 않다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우리가 키우는 아이는 분명히 최고로 재미있는 아이가 될 거야.]

[맞아.... 아키의 육아가 잘되는 것 같으면, 나도 아이를 낳아 볼까 싶네?]


“그래. 카노코도 낳고 싶어지면 낳으면 돼. 카노코가 만화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힘낼 테니까.”


카노코를 부추기면서도 아키의 마음은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고요했다. 이제야 겨우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여전히 춤추며 무대 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책상 아래에서 조용히 배를 쓰다듬으며 아키는 사랑스러운 배 속 아이에게 속삭였다.


‘최고로 재미있는 아이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

에마에게는 네 명의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들은 20대 후반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는 언니 아사가 태어났으며 또 몇 년이 뒤에 에마가 태어났다.


네 명의 어머니 중 한 명이자 에마의 생모인 카노코는 꽤 이름이 알려진 만화가다. 그녀는 3년 전 아사를 데리고 연인이 사는 파리로 이주했다. 에마도 함께 가겠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갓 입학한 중고등 통합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참이라 일본에 남기로 했다.


순정 만화가였던 카노코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여성 네 명의 룸 셰어를 그린 에세이 만화 덕분이었다. 네 명의 여성이 함께 살게 된 계기부터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두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까지 적나라하게 담은 이 시리즈는 새로운 가정의 형태를 제시하는 획기적인 작품으로 주목받았고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영화는 망했지만 어째서인지 핀란드에서 리메이크되어 꽤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라는 제목의 그 만화를 에마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이나 읽었다.


자신과 언니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어머니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만화로 알게 됐다. 친한 남자 친구로부터 정자 기증을 받은 아키가 아사를 낳았고, 해외의 정자 은행에서 정자를 구입한 카노코가 에마를 낳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의 에마는 자신의 출생이 얼마나 독특한지 잘 몰랐다. 자신처럼 옅은 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에게 너도 정자은행으로 태어났냐고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들이 상대 부모로부터 돈으로 산 당신네 아이와 우리 아이를 비교하지 말라며 심하게 항의를 들었다고 한다.


아키는 아사를 출산한 뒤에도 한동안 회사에 다녔지만 에마의 탄생을 계기로 퇴직하고 가사 노동을 주로 맡게 됐다. 덕분에 카노코는 곧바로 본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키에게 수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키의 가사 노동에 대해 나머지 세 명의 어머니가 매달 대가를 지급한다. 더불어 카노코의 작가 활동과 관련된 경리 업무나 일정 관리 등의 비서 업무를 담당하며 추가적인 보수를 받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전업주부처럼 가사 노동의 대가로 생활비가 면제되는 방식은 수입이 없으면 용돈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 모든 정보는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카노코의 에세이 만화에 그려져 있던 내용이다.


‘앞으로 어머니들이 각각 결혼하고 싶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에마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 졸업 후에 어떤 일을 하고 몇 살쯤 결혼해서 몇 명의 아이를 가질지 따위의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진학률이 높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들 자신이 항상 좋은 선택을 하고 적당한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에마에게 그런 미래의 계획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마도 대학은 졸업하고 취직도 하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네 명인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인지 혈연관계나 연애결혼 등에 대한 집착이 거의 없었다. 에마는 그것을 항상 자신이 누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얽매는 것은 적을수록 좋고 자신은 자유로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 집에서는 미오와 유리코가 아이를 낳지 않았지만 둘 다 에마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자신도 강렬히 바라지 않는다면 남자와 결혼하거나 출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강렬히 바라는 일이 있을까?


‘나답게’, ‘있는 그대로의 나’,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말들에 모두 공감하고, 지금까지는 어떤 억압도 느낀 적이 없다.


에마는 미래를 생각할 때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거대한 가전 양판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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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