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

   
유즈키 아사코 (지은이), 김진환 (옮긴이)
ǻ
알토북스
   
17800
2025�� 05��



■ 책 소개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존엄은 스스로 되찾아야 해!”
참는 대신, 웃으며 되갚아 주는 여자들의 이야기

이 책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소통의 단절 속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여섯 편을 모은 단편집이다. ‘진상’ 라멘 평론가를 상대로 한 SNS 복수극, 시골 소녀가 꿈꾸는 베이커리,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혼자 버텨야 했던 임산부, 공동 주택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섯 여자의 반격 작전까지, 모두가 가슴속에 꾹꾹 눌러 참았던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복수는 통쾌하기보단 따뜻하고, 격렬하기보단 담담하며, 무겁기보단 감동적이고, 묘하게도 경쾌하다. 작가는 ‘복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존엄을 되찾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작고 단단한 걸음을 내디딘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넨다.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나답게 지켜도 괜찮다고.

■ 저자 유즈키 아사코
저자 유즈키 아사코는 1981년 도쿄에서 태어나 릿쿄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드라마 작가로 일하다가 2008년 단편 소설 ‘포겟 미, 낫 블루’로 제88회 올요미모노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이토군 A TO E’로 150회 나오키상 후보에, ‘서점의 다이아나’로 151회 나오키상 후보에, ‘버터’로 157회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15년 ‘나일 퍼치의 여자들’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하고, ‘달콤 쌉싸름 사중주’, ‘짝사랑은 시계태엽처럼’, ‘종점의 그 아이’ 그리고 세계 35개국 이상에서 번역이 결정된 ‘버터’ 등 다양한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출간 2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하고, 드라마화 된 런치의 ‘아코짱’은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로, ‘나에게 어울리는 호텔’은 2024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저자는 특히 여성 캐릭터 창조에 탁월한 능력이 있으며 여성의 삶과 연대, 사회의 편견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국내에 인기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차분하면서도 유쾌하고, 따뜻하지만 절대 순진하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우리가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꾼이다.

■ 역자 김진환
역자 김진환은 단국대학교 일본어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A하라 죽이기’, ‘이브의 대관람차’, ‘모성’,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라멘 평론가 사절
BAKESHOP MIREY’S
트리아지 2020
파티오 8
상점가 마담 숍은 왜 망하지 않을까
스타 탄생

 




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


라멘 평론가 사절

“‘만인을 위한 담백함’으로 라멘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를 받는 ‘중화 국수 노조미’는 한때 이에케 라멘의 격전지였던 산겐자야역 남쪽 출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메뉴는 중화 국수와 만두, 밥류뿐. 하지만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두 개를 받은 2년 전부터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점심시간부터 저녁 9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가게 앞에 늘 긴 행렬이 이어진다.


50년 전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때부터 사용해 온 입구의 포렴은 색이 바래서 ‘노조미’라는 글자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나무틀에 불투명 유리를 끼워 넣은 문에서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지만,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지금이 2023년이라는 걸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건축가 카타야마 아사히의 디자인과 몰텍스 시공으로 완성된 일본식의 모던한 내부는, 무광택 진회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철저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추구하며 업계 최초로 기저귀 교환대를 설치하고 성 중립 화장실을 도입하기도 했다.


인기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여러 종류의 토종닭에 가쓰오 등의 해산물을 조합한 화학조미료 없는 맑은 국물에 있다. 국물에 담긴 노란 면발과 건더기로 들어간 소용돌이 맛살, 달걀조림, 챠슈, 발효 죽순. 다소 전형적인 비주얼에 철저히 기본에 충실한 모습이 젊은 여성들에게 오히려 매력적이었는지, 유명 인플루언서의 SNS 게시물을 계기로 새로운 세대의 팬을 끌어모았다.


겸손함을 절대 잃지 않는 노조미지만 그 강점은 어머니 대부터 찾아 준 단골과 마니아층을 붙잡아 두면서도 가족 손님이나 라이트한 팬층까지 포용한다는 점이다. 현재는 웰빙 추세에 부합하기 위해 밀기울을 활용한 저칼로리면 개발에도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에모토 씨의 통찰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절대 피해 갈 수 없을 ‘라멘 평론가 방문 사절’에 관한 소문을 언급하자 에모토 씨는 이렇게 받아넘겼다

.

“저희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방문을 막지 않습니다. 극히 일부, 주변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는 분들만 가게에서 나가 달라고 부탁드리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다른 손님을 멋대로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다거나, 불필요하게 말을 건다거나, 점원에게 성희롱적인 말을 하거나 영업에 방해가 될 만한 질문을 하는 등의 행위가 확인되면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분 중에 저명한 라멘 애호가와 평론가가 많았던 것일 뿐, 누구나 저희 가게에 방문할 수 있고 그 어떤 엄격한 평가든 겸허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애호가들의 매너에 관해 조용히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노조미의 변화는 멈추지 않지만, 진정 변화해야 할 것은 우리 애호가들의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글: 하라다 모에미”


한 라멘 정보지의 소개 기사가 뉴스 사이트에 올라온 지 11시간이 지났다. “여기서 까는 사람, 사하시 라유 아냐?”라는 댓글이 끊이지 않자, 가만히 있던 사하시가 또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며 자연스레 ‘노조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까지 여덟 권의 책을 냈다. 한때는 포동포동한 체격에 여자한테 인기 없는 독신 자학 캐릭터가 마스코트 같아서 귀엽다는 반응을 얻어 지상파 방송의 정규 프로그램에 출연도 했고 거리에서 사인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다. SNS에서 그의 팬이라고 공언하는 젊은 여성과 DM을 주고받다가 사귀기도 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 건, 미디어에 이 노조미라는 가게가 자주 등장하면서다.


2년 전,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할 겸 오랜만에 노조미를 방문했다. 하지만 손목에 돼지 문신이 있고 운동선수처럼 힘이 세 보이는 직원이 “돌아가 주시죠.” 하고 무섭게 노려보며 쫓아냈다.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남자들 모임에서도 그런 식으로 쫓겨난 사람이 제법 많아서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단당한 동료들과 인터넷에서 노조미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면서 오히려 똘똘 뭉칠 수 있었다.


처음엔 ‘노조미 측이 안 좋은 평가를 받을까 봐 겁을 먹고 라멘 평론가의 출입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남성 차별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이내 사하시와 그 동료들이 과거에 블로그, 트위터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그들에게 비난이 쏠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라멘 무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는데, 어느새 10년도 더 된 일이다. 정보지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블로그에선 독설을 쏟아 내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책을 출간하며 그때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블로그는 폐쇄했다. 그런데 그걸 미리 스크랩해 둔 녀석들이 의기양양하게 내용을 공개하면서 사하라와 동료들은 입점 거부를 당해도 싸다는 쪽으로 여론이 바뀌어 갔다. 칼럼 연재는 물론이고 TV와 라디오에서 하나둘 하차당했다. 그리고 노조미를 따라 하듯이 지로케, 이에케 유명 라멘집에서도 문전 박대당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노조미의 팬이라고 공언하는 신진 평론가와 유튜버가 그 맛을 요란하게 찬양하자 그들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주변 사람들도 순식간에 떠나갔다.


그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연락이 온 건 한밤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테지만 지금의 사하시에게는 한 명뿐인 아군이 너무나 소중했다.


“카에다마 타로입니다. 처음으로 DM 보내네요. 오래전부터 사하시 라유 씨의 글이 좋아서 라유 씨처럼 논리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였습니다. 멋진 사과문이었어요. 굉장히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미 측과 친한데, 괜찮으시다면 사장님께 이 사과문에 대해 알려드려도 될까요?


노조미 측에서 사과문을 읽어 보셨대요. 라유 씨의 마음이 잘 전해졌다네요. ‘언제든 가게에 다시 방문해 주세요. 돌아가신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라고 전해 달라셨어요. 잘됐네요. 방문하실 날짜와 시간을 알려 주시면 반드시 자리를 비워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방문하고 싶네요. 한 번 직접 인사드리고 싶었으니까요. 언제가 좋으세요?”


신문 기사에서는 폐점 시간까지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저녁 8시 반, 산겐자야역에서 제법 걸어서야 도착한 노조미는 뜻밖에도 한산했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지난번에 본 돼지 문신의 험상궂은 점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사하시를 그대로 스쳐 지나가더니 ‘영업 중’이라고 적힌 간판을 뒤집고 주렴을 걷어 냈다. 자신 때문에 손님들 출입을 제한하는 것 같았다.


점원이 안내하는 대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 테이블에는 유명 사립 중학교 교복을 입은 가냘픈 소녀와 그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마주 앉아 역시나 중화 국수를 먹고 있었다. 잘 손질된 갈색 머리에 고급스러운 트위드 재킷을 걸친 엄마는 사하시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았다. 옆에는 커다란 명품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거야 원.’ 하고 사하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모녀가 이런 늦은 시간에 외식을, 그것도 라멘을 먹으러 오다니.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하다못해 패밀리 레스토랑 정도는 갈 줄 아는 상식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아주 짧은 머리에 코 피어싱을 한 다른 점원이 “어서 오세요.”하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별로 젊어 보이지 않고 화장기도 없지만 하얀 피부에 점이 많은 모습이 사하시의 취향이었다. 목소리도 저음이고 외모가 너무 남자 같아서 머리를 길게 기르고 화장도 하고 치마를 입으면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사하시는 에모토의 살벌한 시선을 느끼고 다급히 점원의 몸에서 눈을 뗀 뒤 “중화 국수 하나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짧은 머리의 점원은 청바지 속에 감춰 놓은 골반을 좌우로 흔들며 가버렸다.


짧은 머리의 점원이 카운터 너머에서 사하시의 주문을 전달하자마자, 에모토 노조미가 갑자기 손뼉을 한 번 크게 쳤다.


“사하시 라유 씨가 중화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습니다.”


그 순간 중학생 모녀를 제외하고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사하시 라유 씨, 제가 중화 국수를 만들기 전에 먼저 주변에 계신 분들을 자세히 봐 주시겠어요?”


에모토 노조미는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말투로 말했다.


모녀를 제외한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일손을 멈추고 사하시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사하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모른다고요? 저희 모두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가게 안의 일곱 사람이 잡아먹을 듯이 이쪽을 바라봤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던 사하시는 “아!” 하고 외치며 손에 든 컵을 떨어뜨렸다. 광택이라고는 없는 거친 질감의 돌바닥 위로 물이 떨어지며 물방울이 구슬처럼 튀어 올랐다.


아카야마 미카가 이케부쿠로역 서쪽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유명 돈코츠 라멘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2010년쯤이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후였으니 아직 X젠더라는 단어를 자신도, 세상도 모르던 시절이다. 그때는 아르바이트 이력서의 성별 칸에 일단 ‘여자’라고 적긴 했지만 마음속으론 영 석연치가 않았다.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늘 고용주나 동료들을 속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여자 교복을 입으면 영 불편했다. 굳이 따지자면 남자 교복 쪽이 편해 보였는데, 그걸 실제로 입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무척 소극적으로, 치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학생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던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어도 책임감이 강하고 어떤 행사든 즐겁게 참여하는 미카를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했고, 전반적으로 충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사장이 짧게 말했다.


“국물 만드는 거, 내일부터 도와주지 않을래?”


미카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미카답지 않게도 접객 중에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탓에 그 남자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식권을 받아 든 순간부터 남자의 태도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저기, 알바생. 남자야, 여자야?”


카운터 너머로 라멘 그릇을 받자마자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그때 적당히 받아넘기지 못했던 걸까? 미카는 잔뜩 당황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야, 여자야? 응? 어느 쪽이냐니까? 아니지, 어느 쪽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미안하지만 우리 직원한테 그만 찝쩍거려 주겠나? 음식값은 돌려줄 테니까 그냥 나가 줬으면 하는데.”


사장의 단호한 한마디 덕분에 다른 손님들도 평소처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음식에만 집중하는 군대 같은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남자는 가게 안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실실 웃더니 돌연 사라졌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유명 블로거 ‘라멘 무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신 게시물에서는 타루호의 폭력적인 접객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느니, 맛이 하드보일드하다고 들었는데 실은 사람이 그랬다느니 하며 사장을 제멋대로 비하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카를 몰래 촬영한 사진까지 첨부하면서, 성별이 모호한 종업원은 정말 비열하고 비겁할 뿐 아니라 손님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규탄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미카는 스스로 일을 그만두었다. 사장은 나름 진지하게 설득했지만, 자신에게 잘 대해 준 그에게 오히려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손님들이 얼굴과 몸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고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꺼낼까 봐 한동안은 외출도 하지 못했다. 두 달 반이 지나고서야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서 해가 지고 난 다음에만 조심스레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시부야에서 심야 공연을 보느라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피시방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때 어릴 적 좋아했던, 푸드코트의 하카타 돈코츠 라멘 가맹점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모리 씨의 라멘 같은 개성이나 장점은 없어도 더욱 대중적인, 무난하면서도 걸쭉하며 단맛이 강한 하얀 국물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런 꼴을 당했는데도 자신이 아직 라멘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했다. 식권을 구입한 다음 카운터 구석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파카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머리를 길게 땋은 여자가 물어왔다. 사실 아까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인터넷에서 그쪽 사진을 봤거든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메구미 씨가 마치 닫히기 직전의 지하철 문으로 뛰어들 듯이 막아섰다.


“저기, 오해하지 말아요. 저도 같은 처지거든요. 라멘 무사한테 멋대로 사진을 찍혔어요.”


미카는 수려한 얼굴과 선해 보이는 눈매, 커다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메구미 씨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일본에서 가장 귀여운 왕가슴 종업원’이라는 문구와 함께 라멘 무사의 블로그에 사진이 올라왔던 사람이었다. 라멘 무사의 블로그 같은 건 절대 들어가지 않지만, 당시 엄청난 화제였기에 무심코 클릭하고 말았다.


정면에서 보고도 얼굴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건, 당시의 사진이 가슴 아래쪽에서 특정 부위만 강조하듯 찍힌 탓이다. 미카의 것과 동시에 나온 라멘을 앞에 두고 메구미 씨는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그리고 붉은 생강 절임을 듬뿍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꼭 촬영에 동의한 것처럼 올려놔서 관종이라느니 변태녀라느니, 인터넷에서 엄청 욕을 먹었어요. 스토커 같은 인간들이 몇 명이나 가게를 찾아오기도 했지요. 사장한테 말했더니, 가게 홍보도 됐고 너도 외모를 칭찬받았으니까 좋은 거 아니냐면서 웃어넘기더라고요. 그래서 일은 관뒀어요.”

“그 사진, 허락도 없이 찍은 거예요?”

“네, 그 자식은 ‘점원분, 라멘 들고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라면서 말을 걸어왔어요. 라멘이 메인인 사진인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수줍게 웃기까지 했단 말이죠. 좋아했거든요. 제가 일했던, 고탄다에 있는 요코하마 이에케 라멘을요. 그날은 제가 처음으로 라멘에 김을 올려 장식했던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연락처를 교환했다. 메구미 씨는 그날 밤 바로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한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만난 날, 메구미 씨는 머리도 쇼트커트에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신주쿠, 하라주쿠, 시부야에서 만나 둘이서 가 보고 싶은 라멘집을 탐방하고 스타벅스에서 느긋하게 수다를 떨며 관계를 이어 갔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는 많았지만 대부분 무리 지어 다녔기에 이런 식으로 일대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만큼이나 잘 먹는 메구미 씨와 함께 다니는 게 즐거웠다. 쇼핑 가자고 불러내지 않는 것도 딱 좋았다. 어릴 때부터 특별히 어떤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어서 자기 취향이 어떤지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유명한 라멘집은 남자만 득실거리고, 사장님도 꼭 남자잖아?”

“아, 잠깐. 한 사람 있긴 해. 여자 사장님이 하는 가게. 내가 팔로우한 라멘 애호가가 추천해 준 곳이긴 한데....”


메구미 씨는 그렇게 말하고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눈을 반짝이며 들여다보았다. 라멘을 귀엽게 의인화시킨 캐릭터 아이콘이 얼핏 보였다.


그동안 사하시는 몇 번이고 도망치려 했지만, 힘이 센 점원에게 붙잡혀 억지로 의자에 앉았다가 결국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운터 안쪽의 에모토 노조미는 일어선 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의논했어. 그리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최고의 가게를 만들어 내고, 애호가들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성공 모델이 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았지. 우리는 만인을 위한 담백한 중화 국수를 만들어 내기로 했어. 왜냐하면 당신에겐 맑은 국물의 맛을 표현하는 어휘력이 전무하니까. 미카 씨, 메구미 씨와 국물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철저한 연구를 거듭했고, 다 함께 의논한 결과 사하시 라유가 이곳에 오는 그날까지는 담배와 커피도 끊기로 했어. 그렇지?”


에모토 노조미는 면을 풀어 냄비에 넣으며 입구 쪽에 서 있던 그 우람한 체구의 점원을 바라보았다.


“응! 드디어 오늘 밤부터 캐러멜 라테를 마실 수 있어.”


목소리를 듣고서야 사하시는 그 점원이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하게 단련된 육체에만 눈이 가서 성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카운터 앞까지 다가왔다.


“요리는 대부분 노조미 씨가 담당하니까 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 그러다 손님들이 안심하고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가게를 만들기로 한 거야. 성희롱을 일삼는 놈들은 힘으로 제압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격투기와 근력 운동을 하면서 몸을 단련했어. 그랬더니 이제 아무도 날 ‘일본에서 제일 귀여운 왕가슴 점원’이라고 부르지 못하던데.”


그 틈에도 에모토 노조미가 삶은 면의 물기를 빠르게 제거하고 국물을 붓는 모습이 짧은 머리에 코 피어싱을 한 점원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메구미가 노력하는 걸 보면서 나도 뭐든 하고 싶었어. 난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영어를 배웠어. 여기 있는 모두가 조금씩 돈을 내준 덕분에 1년 동안 뉴욕에 유학 가서 그곳의 라멘 붐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어. 단과 대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도시 설계에 관해 배웠어. 그게 가게 리뉴얼에 큰 도움이 됐지.”


“너희는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왜 자기 인생을 걸고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럴 시간에 다른 건설적인 일을 하라고!!”


아카야마 미카가 이쪽 테이블에 중화 국수를 툭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계속 식욕을 자극하던, 닭고기와 해산물 외에는 잡내가 느껴지지 않는 향이 한층 강해졌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꼭 먹고 싶은 마음이 서로 충돌하며 사하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사와타리 메구미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의자에 앉아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온갖 매체에서 다뤄진 노조미의 중화 국수는 황금색 국물 안에 구불구불한 면발이 담겼고 파, 발효 죽순, 챠슈, 소용돌이 맛살, 달걀조림이 절묘하게 배치되었다. 지극히 전형적인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맑은 국물의 아름다움에 사하시는 심상치 않은 박력을 느꼈다. 떨리는 손으로 구불구불한 면을 입에 넣자 기분 좋은 물결이 혀와 목구멍을 휩쓸 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고 면발의 탄력과 구수함, 좋은 식감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당신 때문에 멋대로 규정당한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예요. 우리 손으로 직접.”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