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능숙한 삶

   
이춘해
ǻ
창해
   
18000
2024�� 06��



책 소개


모든 가정의 화평을 소망하는 가족 처세서!

《변화에 능숙한 삶》은 과도기 중심에 선 가족관계를 짚어보고 건강한 가정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가족 처세서다. 가족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가슴을 열고 시대 흐름에 의식을 맞추라는 것이다. 가장(家長) 중심 가정경제에서 맞벌이 시대가 본격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한 현실에서 전통만을 고집하면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문제로 대두된 가족 갈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고부갈등의 난제 앞에서 남편과 아들 위치의 남자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외도라는 불협화음이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여 일침을 놓는다. 또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혼 뒤의 삶과 재혼, 죽음과 장례절차까지를 살폈다. 

익히 잘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 주제인 결혼문화, 맞벌이 부부, 태교와 육아, 전업주부, 고부갈등, 외도(外道), 이혼, 재혼, 고령사회 적응기,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와 장례 등을 망라해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자신과 주변의 사례를 솔직 담백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단편 실화소설을 읽는 것처럼 리얼하게 전개되어, 재미와 교훈을 함께 주는 가족 처세서이자 한 권의 ‘가정보감’으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 저자 이춘해
전남 해남 출생이다.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후 짧은 교직 생활을 거쳐 전업주부로 살아오다가 장편소설 『나의 날개로 날고 싶다』와 함께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지리산 외딴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미인은 과속하지 않는다』, 장편소설 『마침표 없는 편지』, 『가슴에 핀 꽃』, 『나의 날개로 날고 싶다』, 동화 『눈이 초승달 닮은 아이』, 『독도에서 개굴개굴』, 『러블리 봉봉 1, 2』, 가족 처세서 『변화에 능숙한 삶』 등이 있다. 

■ 차례
여는 글 『변화에 능숙한 삶』을 올리며

1장. 바람직한 결혼문화

결혼문화, 이대로 좋은가?
아들 선호사상이 자녀에게 미치는 폐단
결혼식은 축제

2장.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면?

결혼생활에 필요한 자세
바람직한 맞벌이 부부
부부갈등 예방차원의 태교와 육아
전업주부도 깨어나야 할 때다

3장. 고부갈등을 예방하려면?

고부갈등은 불가피한 것인가?
좋은 시어머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부갈등 예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사람은?

4장. 외도(外道)

외도의 징후
외도는 내면(자신)의 문제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
여자의 외도는 왜 무서울까?
외도가 드러났다면?

5장. 이혼

이혼은 먼 이야기인가?
이혼 당사자와 주변 사람이 취할 태도
늘어나는 황혼이혼

6장. 용서와 화해

7장. 재혼

결혼정보회사를 맹신하지 않는다
선볼 때 명심해야 할 일
재혼은 환상이 아니다

8장. 아름다운 마무리

고령사회 적응기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와 장례에 대한 소견
긍정을 말하자 

 




변화에 능숙한 삶


바람직한 결혼문화

결혼문화, 이대로 좋은가?

결혼 대상은 어떤 사람이 좋을까? 취미, 학력, 아이디어, 생활 환경 등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좋다. 공통분모는 현재 환경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에 따라 후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사람의 기질로 볼 수 있는 인성(人性)이 유아기 이전에 거의 다 형성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과 농어촌에서 자란 사람, 도시 빈민으로 살아온 사람과 재벌가에서 자란 사람, 서양문화에 익숙한 사람과 유교 사상에 젖은 사람, 지나치게 학력차가 많은 사람이 가정을 이뤘다고 가정해 보자. 비슷한 환경을 거친 부부보다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한 사람에게 일상적인 것들이 다른 한 사람에겐 지나쳐 보일 수도 있고, 궁상맞아 보일 수도 있고, 정서 형태와 대화의 결이 달라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았지만 아주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른 환경에서 자란 부부가 다 힘들다거나 비슷한 환경의 부부가 다 잘산다는 건 아니다. 로열패밀리 부부도 깨어지고 재벌과 빈민이 만나 잘사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생각으로 결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무엇보다 콤플렉스 많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피하는 게 좋다. 의기소침하여 자신을 학대하거나, 시기 질투로 인한 적대적 성향을 드러낼 확률이 높은 탓이다.


결혼식은 축제

1990년, 미국에서의 일이다. 주례를 맡은 신부님이 코미디 같은 결혼식을 진행하여 많이도 웃었다. 신부님은 잠시 주례를 멈추고 사라지더니 희한한 여행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거기에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내 폭소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시 마이크 앞에 선 신부님이 말했다. 신랑 신부가 빨리 신혼여행 가고 싶어 한다며 주례사를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신랑, 신부, 주례, 하객이 어울려 1분쯤 춤을 췄다. 일반 예식장도 아닌 성당이라서 더 의아하고 낯설었지만 그렇게 웃어본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어느 틈에 우리 결혼식도 많이 달라졌다. 신부가 브레이크댄스도 하고, 혼주가 노래하고 춤추는 결혼식! 유튜브에서 가끔 보게 되는데 익숙하지 않아도 축제다운 축제는 그런 모양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결혼식은 나날이 변화할 것이고, 젊으나 늙으나 언젠가는 그런 결혼식을 더 좋아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이쪽저쪽 혼주가, 아이와 어른이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는 결혼식을 그려 본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면

결혼생활에 필요한 자세

기념일에 대한 남녀의 성향은 다르다. 남자는 무디고 여자는 지나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이 알아서 챙겨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신상에 좋다는 말이다. ‘알고 있나 보자!’, ‘뭘 사 오나 보자!’ 하고 벼르는 것은 바보짓이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의 선물을 기대했는데 빈손으로 들어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거나하게 술까지 취해 들어왔다면 또 어떨까? 보나 마나 분위기는 살벌해질 것이다.


얼마 전에 환갑을 맞은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편의 선물이 없었다며 섭섭해하고 화를 냈다. 누구라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환갑에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게 의아해서 남편 환갑 때 선물을 했는지를 물었다.


“지가 나한테 한 거 있어? 선물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하지.”


여자는 뚱하니 말하고, 선물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려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면 불만이 가중되어 부부관계는 험한 단계를 맞을 수 있다.


부부로 살아가는 그대들이여! 꼭 받고 싶으면 처음부터 길을 들이시라!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여남은 개 쳐놓고 날이면 날마다 상기시켜라! 유치한 것 같지만 속상해하고 싸우는 것보다 백배 낫다. 받고 싶은 선물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선물 선택이 쉽지 않은 일인 만큼, 감각 무딘 사람은 더 힘들 것이므로 미리 알려주면 고민을 덜어준 셈이 된다.


바람직한 맞벌이 부부

맞벌이가 보편화된 세상을 살아가려면 받아들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남자 일과 여자 일을 구별하지 않아야 한다. 전업주부 가사전담이 당연한 것이라면, 맞벌이 부부에게 가사는 두 사람 몫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아내가 남편을 돕고, 남편이 아내를 돕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몇 년 전, 지인들과 맞벌이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현직에 계신 분들이라 그들 사고가 진취적인 것으로 믿었는데 예상과 달리 비판적이었다. 자신들은 맞벌이하면서 가사를 전담했는데 젊은이들은 남편을 너무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가사가 여자 몫이라는 사고를 반증한 것 같아서 맞벌이 여성의 턱이 아직 높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사분담에 대한 내 견해는 그들과 조금 다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남자가 더 분담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부모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기사분담에 대한 조언을 하고 훈련을 쌓도록 지도해야 한다. 며느리가 똑같이 경제활동하는 직장인이며 아들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들 스스로 가사에 동참하도록 조언해야 된다.


우리 아들을 예로 들어보겠다. 아들은 결혼 전까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기보다 시키지 않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하물며 방 청소까지 대신해 준 것은 호흡기질환과 피부질환 탓이었는데 훗날 가정생활에 미칠 영향을 염려해 가사분담에 대한 충고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결혼을 했고, 아들의 가사분담 내막은 며느리를 통해 듣곤 하는데 요리뿐 아니라 다른 일까지 잘한다는 칭찬이었다. 가사분담에 대한 부모의 충고만으로도 웬만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고부갈등을 예방하려면?

고부갈등은 불가피한 것인가?

귀한 자식이라도 때가 되면 놓아줘야 한다. 새들도 새 둥지를 틀면 낡은 둥지에 연연하지 않는 법, 아들이 가정을 이루면 며느리 남편으로 인정하고 마음에서 털어 내야 된다. 그 원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아들 가정은 평온을 유지하기 어렵다. 아들을 빼앗겼다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불행의 싹이 트고, 키가 자라, 거대한 폭탄의 열매로 두 가정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13년 동안 병든 시어머니를 돌봐 드린 지인이 있다. 누군가 그녀의 수고에 동정을 표하면 그녀는 토를 달았다. 시어머니 은공에 비해 약소하다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밥을 지으셨던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시려고, 수도꼭지에 바가지를 살짝 대고 물을 받으실 정도였었다. 젊고 건강한 며느리는 늦잠을 자고 시어머니가 밥을 지으셨다는 얘기다.


며느리 밥이나 해주는 시어머니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시어머니의 사랑은 지나친 면이 있으나, 며느리에게 사랑을 베풀면 작게나마 알아준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보다 큰 공로는 없다.


죽음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자식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자식과 살거나 시설에 살거나, 숙명처럼 거쳐 가는 과정이다. 다만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를 뿐이다. 비록 그 기간이 짧은 순간이 될지라도 마지막 길에 미안하지 않도록 부모는 자식들 가슴에 사랑을 저축해 둬야 한다. 그것은 꼭 이자가 더해져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금은보화 쏟아내는 복바가지가 아니라 깨진 쪽박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쪽박 한 조각으로도 한 입 물을 축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건 없이 사랑을 담아주면 그뿐이다.


고부갈등 예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사람은?

고부갈등 발화점을 들여다보면 아들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구시대 남성들은 갈등의 원인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가족의 불필요한 요구가 갈등의 도화선이 되어도 아내만 다그쳤다. 남편의 편파적 행위가 가족의 횡포를 부추긴다는 걸 몰라서는 아니었다. 잘잘못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양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관습에 딱지가 앉은 탓이었다. 그런 행위가 부모를 존중하고 가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며, 아내의 입을 막는 무기로 여겼을 뿐, 아내 가슴에 피멍이 든다는 건 몰랐다. 가족 전체와 결혼한 듯한 혼란에 빠져 남편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고, 심지어 남편이란 존재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남편은 낯선 환경에 들어온 아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보듬고, 불필요한 요구와 간섭을 차단할 줄 알아야 한다. 엄마의 아들, 남매들의 형과 동생과 오빠에 앞서,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고 부부 중심의 삶을 끌어가야 한다.


아내는 시부모와 자신이 물에 빠졌을 때 남편이 자신을 먼저 구해줄 것으로 믿는다. 죽음 앞에서도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인데 남편이 무조건 부모를 옹호하면 아내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자 마음이 그러하니 여편네 치마폭에 빠져 사족 못 쓴다는 오명을 덮어쓰더라도 아내를 잘 방어해 줘야 한다. 관심 없이 지나쳤을지 모르겠으나, 주변에서 일어난 분쟁을 살펴보면 그 말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남자의 가정보다 아내 손을 들어준 가정이 훨씬 탄탄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부갈등을 겪지 않으려면 부모 스스로 자식과 선을 그어야 한다. 아들이 새 가정의 가장으로 승급했음을 인정하고 목적지를 향해 출항하는 아들에게 멋진 항해사가 되도록 응원해 줘야 한다. 길고 긴 항로에 두려움인들 없겠는가! 두려운 길 떠나는 귀한 자식이 거친 풍랑에 시달리지 않도록 빌고 또 빌어주는 부모가 되자.


가족을 싣고 떠난 그 배가 고향으로 돌아오길 바라지도 말자. 내 자식이 좋아하는 곳에 터를 잡고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기를 빌어주는 부모, 잘살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만족하는 부모가 되자. 내가 낳았고, 내가 키웠으니, 내 것이라는 망상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감싸주는 부모가 되자.


며느리에게 시가는 어려운 곳이 아니라, 웃고 까불고 놀 수 있는 곳, 눕고 싶을 때 눕고 남편과 애정표현도 할 수 있는 곳, 시어머니와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먹고 싶은 것도 부탁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며느리에게 음식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시기가 돌아올 것인즉,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성으로 음식도 해주고, 명절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줘야 한다.



이혼

이혼 당사자와 주변 사람이 취할 태도

이혼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면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권한다. 경위가 어떻든 간에 당사자의 아픔을 가볍게 여셔서는 안 된다. 성인군자 같은 충고도 말아야 한다. 문제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네게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모든 문제는 자기 안에 있다.’ 그런 말은 삼가야 한다. 자기 안에 문제가 있건 없건 사건의 본질을 떠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받으면 작은 충격에도 아픔이 가중되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용서하라는 말도 말아야 한다. 대가를 받고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도 섣불리 충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단, 외도, 폭력, 도박 같은 사음에는 긴말이 필요 없다. 그 세 가지는 난치병이거나 불치병일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이별은 어떤 모양이든 상처를 동반한다. 상대에게 미련이 있건 없건 가족의 자리가 빈 것만도 상처가 된다. 그러므로 상대의 잘못으로 이혼한 사람은 무조건 사랑으로 다독여줘야 한다.


늘어나는 황혼이혼

황혼이혼은 1980년대 일본에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며 사회문제로 부상했었다. 떼로 몰려다니며 기생관광을 즐기던, 문란한 성문화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여자들은 수모를 견디며 차곡차곡 앙심을 쌓아뒀다가 남편 퇴직에 맞춰 이혼을 요구했다.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다는 야심찬 보복이었다.


그 현상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로 훌쩍 건너왔다. 그리고 매년 놀라운 추세로 증가하고 있다. 쉽게 지나갈 바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일본을 따른 유행이 아니라 남성들의 젊은 날 행태가 당시 일본을 닮았다는 것이다.


황혼이혼 당사자 시각은 남녀 각각 다르다. 여성 측은 자신이 기여한 만큼 재산을 챙겼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남성 측은 수입이 끊기자 아내가 변심했다고 주장한다. 약아빠진 아내가 평생 남편을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자 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황혼이혼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남편의 귀책 사유로 빚어진 보복이혼이 많다. 남편의 외도, 폭음, 폭력 등 갑질행각을 참고 견디다, 최대한 몫을 챙길 수 있을 때 이혼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와 장례에 대한 소견

1990년대, 40대 중반인 내가 유서를 쓴 것에 사람들은 놀랐다. 남편 해외 출장이 잦아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유서 쓴 것에 놀라고 재산이 많을 것으로 여기고 놀랐다. 유서 말만 들어도 불쾌해하고, 부자들이나 쓰는 것으로 여겼던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르고 보니 유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유서가 생활화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죽음이 가까울 때나 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은 편이다.


내 자신이 암판정을 받게 되면 항암치료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몇 개월, 몇 년 더 사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서다. 어차피 죽음이 다가오면 또 한 번 고통당할 게 빤한데, 굳이 두 번의 고통은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현재 나이 70세, 평균수명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자식에 대한 의무도 마쳤고, 다른 어떤 것에 미련도 없다. 몸이 허락하는 한 여행도 하고 먹고 싶은 것 가리지 않고 먹으면서 자연스레 생을 마치고 싶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게 순리라는 것을 기억하며 스스로 존엄하다고 여겨지는 길을 진심으로 가고 싶을 뿐이다. 가족들을 지치게 하거나 경제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을 뿐더러,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삶을 사는 것도, 그러한 삶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도 소름 끼치게 싫은 걸 어쩌겠나?


생명의 존엄성은 무엇인가?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지켜보는 것이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인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초고령 노인을 살려내 잠깐 더 살게 하는 것이 효도일까? 암만 생각해 봐도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꽁꽁 숨은 혈관을 찾겠다고 바늘로 살을 헤집고 기능을 상실한 소화기관에 콧줄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환자, 가족, 의료진,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로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소모하는 일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는 일이다. 살릴 수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당사자에게는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연명치료 거부 의사는 밝히는 게 좋을 성싶다. 자식들이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체면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며느리와 사위는 더 운을 떼기 어렵고, 자칫 말 한마디가 오해와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 시선이 어떻든 가족에게 연명치료 권한이 주어지면 환자와 가족에게 어떤 것이 최선인지 잘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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