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에게 배워라

   
오화석
ǻ
매일경제신문사
   
15000
2013�� 02��



■ 책 소개
대한민국 CEO, 위대한 기업가가 되는길

인도는 물론 세계적 귀감이 되고 있는타타그룹의 상생·신뢰경영과 실천·성장전략을 소개해 우리 기업들에게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한다. 구체적으로 타타그룹 창업주와 후손들의 경영철학,리더십, 비전, 성공전략, 윤리·신뢰·상생경영, 애국심, 사회적 책임 등을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에게 기업의 진정한 존재 이유가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타타는 최근 세계적으로각광받는 ‘깨어 있는 자본주의(Conscious Capitalism)’를 실천하는 생생한 사례다. ‘깨어 있는 자본주의’란 기업의이해당사자(Stakeholder)인 주주, 고객, 직원, 협력업체, 사회 등 모두를 배려하고 공존공영하는 경영을 말한다. 타타는 단순히 기업의사회적 책임(CSR) 수행을 넘어 ‘깨어 있는 자본주의’를 적극 실천하고 있다. 

■ 저자 오화석
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 원장과 산하기관 인도경제연구소 소장으로재직 중이다. 인도를 비롯해 서남아, 동남아, 중남미, 중동 등 유망 신흥시장을 국내에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이 공동 운영하는 ‘인도-미얀마 최고경영자과정’의 책임교수직도 맡고 있다. 
2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매일경제에 근무하던 2000년, 인도 IT산업발전상을 국내 언론 최초로 기획보도한 것이 계기가 돼 인도에 특별한 관심을 쏟게 됐다. 이후 수년간 인도 네루대학교(JNU) 국제학부에객원교수로 파견돼 한국경제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인도이야기-사리 속치마를벗기다』『Indian Billionaires’ Secrets of Wealth』『인도 비즈니스진출 가이드』『부자들만 아는 부의 법칙』『철강왕미탈 성공스토리』『슈퍼코끼리 인도가 온다』『인도-정치·경제·사회의 모든 것』(공저),『인도 진출 20인의 도전』(공저),『차이나쇼크』(공저)『국제뉴스로 세상을 잡아라』(공저) 등이 있다. 

이메일: hwaseokoh@naver.com 
홈페이지: www.indiafortune.net &

■ 차례
프롤로그

Part 01 100년을 이어온 ‘가장존경받는 기업’
경영 어렵다고 등 돌리지 않는다
검은 돈은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회사 위해 희생한 직원에게는 무한보상 
핵심가치가 ‘사회공헌’인 회사 
사회에서 얻은부(富)는 사회로 
위기에도 약속은 꼭 지킨다 
서민층 애정이 기업 혁신 동력 
시골 인력 활용해 최고가 되다

Part 02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잠셋지 타타
위대한 기업가의 탄생: 돈보다 조국의 산업화를 고민 
직원이 행복해야 기업이 성공한다 
시대를앞서간 철강산업 
‘민족사업’ 수력발전에 도전 
국민을 사랑한 민족주의 기업가 
과학 인재 육성에 사재를 털다
천민을대통령으로 만든 장학금 

Part 03‘국민기업’으로 도약하다 J.R.D. 타타
무보수 견습공에서 그룹 회장으로 
애국심에 불탄 최초 민간 항공사 설립
정부 규제 덫에 걸려 좌절과 도전 
사회적 책임 다하며 그룹 매출 54배로 키워 
‘직원과 함께 하는 경영’ 철학

Part 04 전설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라탄 타타
철강노동자와 부대끼며 경영수업 
핵심산업 위주의 철저한 구조조정 
최초 순수 토종 승용차 사업에 도전
재규어 등 글로벌 브랜드 인수 
100년 전부터 ‘깨어 있는 자본주의’ 실천 
‘깨어 있는 자본주의’ 실천장 잠셋푸르
20년 전 낡은 아파트에 사는 재벌 회장 
후계자, 핏줄도 국적도 안 따진다 

에필로그 
부록 1 타타가문 가계도 
부록 2 타타그룹의행동강령

 





타타에게 배워라


Part 01 100년을 이어온 ‘가장 존경받는 기업’

경영 어렵다고 등 돌리지 않는다

요즘 우리나라 기업의 여러 행태 중 정리해고가 큰 문제로 지적된다. 정리해고란 말 그대로 기업경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강제적으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말한다. 정리해고는 자살 등 심각한 개인·사회적 고통을 낳는다. 물론 정리해고는 기업 경영상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노동법도 기업의 정리해고를 인정하면서도 아래와 같이 제한하고 있다.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근로기준법 제24조)


따라서 정리해고를 하려면 ‘경영 악화’라는 객관적인 상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흑자를 내면서도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불법적인 정리해고를 일삼는 기업도 적지 않다. 이처럼 불법적인 정리해고는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가리지 않는다. 이에 따라 많은 사업장에서 정리해고자가 거리로 내몰린다. 여기서 특히 문제는 경영위기라면서도 경영진과 주주들이 고통을 분담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노동자들이 고통을 떠안는다. 애초부터 기업은 경영개선과 희생보다는 인원삭감을 통한 수익성 제고에만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이 어려울 때 타타는 어떻게 했을까. 타타 차(TaTa Tea)의 상생경영 사례를 살펴보자.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타타 차는 세계 제2의 복합 차(茶) 생산업체다. 세계 1위 차 업체는 유명한 유니레버의 립톤(Lipton) 차다. 타타 차는 2000년 당시 세계 2위를 자랑하던 영국의 테틀리(Tetley) 차 그룹을 4억 3,200만 달러에 인수해 세계 차 업계를 놀라게 했다.


타타 차는 오래 전부터 인도 남부 문나르 지역에 대규모 차 플랜테이션을 운영해왔다. 많은 노동력을 고용해 차를 재배한 다음 이를 판매상에게 내다팔았다. 그러나 2000년 들어 찻잎 매매 가격이 급격히 떨어졌고, 이는 차 생산 기업은 물론 차 생산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에게도 큰 위기로 다가왔다.


2003년 인도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총 4,819개의 등록된 차 플랜테이션 가운데 약 30%인 1,367개가 부도났다. 이에 따라 인도의 많은 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상당수의 플랜테이션은 노동자들에게 임금도 지불하지 못한 채 파산했다.


타타 차 플랜테이션도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타타 차가 운영하는 인도 남부 케랄라 지역의 많은 차 플랜테이션이 적자에 시달렸다. 타타 차는 중대한 결단이 필요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인력을 감원하거나 적자가 심한 플랜테이션을 남들처럼 부도내는 것이다. 아니면 적자 플랜테이션을 타 기업에 매각하는 것도 위기 타개의 한 방책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경영진은 2005년 3월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카난 데반 힐스 플랜테이션이란 새 회사를 설립한 후, 19개 플랜테이션 총 지분의 75%를 1만 2,000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단히 놀랍고 혁신적인 결정이었다. 노동자 소유의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드문 일이다.


경영진은 노동자 소유 기업 설립이라는 혁신적 결정을 이사회에 상정했고, 이사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남은 문제는 병원과 학교, 스포츠시설 등 타타 차가 그동안 자비로 운영해온 지역봉사시설의 매각 여부였다.


이에 대한 쿠마르 부회장의 답변은 아주 단호하고 분명했다. “아무리 큰돈이 들어도 주민 복지·레저시설을 유지하십시오. 타타가 주민들을 위해 시설들을 지었다면, 이를 유지·관리하는 것은 타타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타타는 경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의 사람들(Its own people)에게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후 종업원이 소유한 카난 데반 힐스 플랜테이션은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다. 노동자 1명당 생산성은 2005년 출범 직전 28킬로그램에서 4년 후인 2009년 68킬로그램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직원들은 자신들의 소유인 회사를 위해 대단히 열정적으로 일했다. 특히 타타가 새 회사와 완전히 연을 끊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자신감을 가졌다.


이 사례에서 무엇보다 감동을 주는 것은 “회사 경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사람들(직원, 지역주민)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는 경영진의 철학과 실천이다. 이 같은 타타의 경영철학은 놀라움을 넘어 존경과 경외감을 저절로 갖게 한다. 이처럼 회사가 자신들에게 신뢰를 주는데, 충성을 다해 일하지 않을 직원이 어디 있겠는가. 타타의 상생경영 사례는 회사 경영이 어렵지 않은데도 단지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직원 해고를 밥 먹듯이 하는 우리 기업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Part 02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 잠셋지 타타

위대한 기업가의 탄생: 돈보다 조국의 산업화를 고민

흘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다고 했던가. 위대한 기업 타타그룹의 탄생에는 잠셋지 타타라는 위대한 기업인이 있었다. 오늘날 타타그룹에 면면히 흐르는 존경할 만한 경영철학과 정신·실천은 이 회사 창업주인 잠셋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잠셋지는 부의 창출은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훌륭한 족적을 많이 남겼다.


타타그룹은 자동차와 철강, 정보기술(IT), 정보통신, 소비재, 호텔사업 등 분야에서 100여 개의 기업을 거느린 ‘인도의 국민기업’이다. 덩치와 비중으로 볼 때 인도 내 위상이 한국의 삼성그룹 못지않다. 타타그룹 총 기업가치는 2011년 기준 1,000억 달러(110조 원 규모), 고용인원 46만 명에, 인도 국내총생산(GDP)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인도의 간판 기업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인도의 최고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 기업의 역사를 보더라도 1세기 동안이나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는 기업은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타타그룹이 인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타타그룹은 외형으로 볼 때 영락없이 한국의 재벌기업을 빼닮았다. 그러나 타타는 한국 재벌들과는 달리 국민들에게 지탄받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타타그룹을 이처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창업주 잠셋지다. 그가 죽은 지 어언 100여 년. 잠셋지 만한 통찰력과 비전, 국민들에 대한 애정과 애국심을 가진 기업인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잠셋지 타타. 그는 누구이고, 어떻게 맨손으로 거대 기업을 일구었을까? 또 그는 어떻게 타타를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받는 회사로 키웠을까?


집안이 가난해 ‘가방 끈’이 짧았던 아버지 누세르완지는 외아들 잠셋지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 썼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아들만큼은 겪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잠셋지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붙여줘 교육시켰다.


잠셋지는 자신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의식(儀式)보다는 그 종교가 내세우는 내용에 관심이 많았다. 이 종교의 창시자인 짜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평생 그의 삶의 지침이 되었다. 즉, 짜라투스트라 가르침의 핵심인 곧은 생각, 좋은 언어, 바른 행동을 그는 평소 적극 실천했다. 이런 그의 철학과 생각, 행동은 이후 그의 비즈니스 성공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 졸업 후 몇 년간의 영국 체류도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잠셋지는 선진국 영국에서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 랭카셔를 자주 방문해 장차 일굴 면직업의 기초와 메커니즘을 익혔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섬유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인도의 섬유 시장은 영국 회사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잠셋지는 인도 회사를 만들어 운영만 잘한다면 영국 회사들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3년을 머물며 면직업을 연구한 그는 1873년 인도에 돌아온다. 야심만만한 30대 초반의 잠셋지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면직공장을 세웠다. 잘 나가던 무역 사업을 접은 후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방직업에 본격 뛰어든 것이다. 이는 혁신을 추구하는 그의 기업가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인도 비즈니스맨들은 대부분 고리대금업 같은 금융업이나 상품 교역에 종사했다. 생산이나 제조활동에 참여하는 기업인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셋지는 익숙한 무역 사업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방직업에 도전한 것이다.


이 회사 상호는 인도중앙직물제조회사라는 긴 이름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엠프레스 공장’으로 바꾼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1877년 빅토리아 영국 여왕이 자신을 인도의 황후로 선언한 해로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엠프레스 공장은 이후 주변에 방직공장들이 잇따라 세워지면서 공장복합단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는 엠프레스 공장단지라고 불렸다. 엠프레스 공장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직원을 보유한 대규모 산업단지로 부상했다. 이는 인도의 산업화와 자본화를 일깨운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잠셋지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유머가 풍부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호텔은 물론 버스정류장 근처의 누추한 가게 안에서도 친구들과 잡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검소하고 지적 호기심이 아주 많았다. 잠셋지는 기업인이면서도 지식에 매우 목말라 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책과 신문, 전문가 등 모든 채널을 통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서재에 틀어박혀 사색과 독서에 열중했다. 이를 위해 항상 이른 아침을 먹고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에 대한 태도 역시 매우 겸손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보려 했고, 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사업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식민지 당국 영국인 고위 관료에 대해서도 그는 나쁘게 얘기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고위 관료의 행위를 비난했지만 잠셋지는 “그가 인도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도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야”라며 좋게 이해했다.


잠셋지는 상당한 갑부였으나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옷도 늘 소박하게 입고 다녔다. 주로 파르시교도들이 입는 긴 하얀색 코트와 바지를 입었고 검정색 파르시교 모자를 즐겨 착용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천문학적인 재산에 대해 으스대지 않았고, 이를 악행에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 점은 그와 함께한 동시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다. 그에게 있어 부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지 결코 부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부를 추구한 그의 주된 인생 목적을 국가발전과 국민 복지향상이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잠셋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타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기업활동에 있어 지역사회와 국민은 비즈니스의 이해당사자인 동시에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 자체다.”



Part 03 ‘국민기업’으로 도약하다 J.R.D. 타타

‘직원과 함께 하는 경영’ 철학

타타그룹은 창업 이후 직원의 복지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노조 설립 이전부터 직원복지 향상에 최선을 다했다. 노조가 설립된 이후 한때 노사관계가 매우 악화되기도 했지만, 경영진은 노조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진정성을 갖고 노력했다. 그 결과 현재 타타그룹의 노사관계는 많은 기업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타타그룹의 창업주인 잠셋지 타타는 직원들에 대해 ‘전인적(全人的, Holistic)’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직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보상을 받으면 사기가 올라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고, 생산성이 증가돼 보다 많은 부를 산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해당 기업과 직원들은 물론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기업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책임 간 구별이 사라졌다. 직원을 위하는 일이 기업을 위하는 일이고, 사회와 국가를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잠셋지와 그의 뒤를 이은 아들들은 직원들의 복리후생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매우 중시했다. 이에 따라 타타그룹은 8시간 노동제(1912년)와 유급휴가제(1920년), 임신 휴가(1928년), 성과급제(1934년), 퇴직금제(1937년) 등을 모두 인도 역사상 최초로 도입했다. 이는 인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선구적인 조치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타타그룹의 노사관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1910년대 말부터 미국인들이 회사 경영을 담당하면서 타타 스틸에서의 노사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 결과는 파업으로 나타났다. 1920년 파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때 노동자들은 사측에 대항해 폭력성을 보였다. 1920년 폭력 파업의 후유증은 컸다. 1922년에 다시금 파업이 발생했다. 타타 가족이 경영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노사관계가 크게 악화됐고 점점 더 대립적이 되어 갔다. 1930년대 들어서도 노사 간 대립관계는 해결되지 못했다. 1938년 초에도 단기 파업이 발생했다. 사측이 업무태만인 3명의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 불씨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이 파업 동안 미국인 경영진이 파업 노동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깡패를 동원한 것이 알려졌다. 노사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1938년 중반 J.R.D.타타가 그룹 회장에 취임하면서 노사관계는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회장직에 오른 J.R.D.는 당시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높고 노동자에 우호적이던 자와할랄 네루를 초청해 중재를 요청했다. 네루는 1947년 인도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초대 총리에 오르는 인물이다. 네루는 J.R.D.에 타타 스틸의 기업 경영문화에 문제가 있다며 이를 바꿀 것을 요청했다. 네루는 미국인 경영진과 인도인 직원 간 생각과 문화 격차가 커 서로 융합하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J.R.D.는 네루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국인 경영진과 매니저들을 인도인으로 교체했다. 노사 간 우호적인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상황은 급변해 원만하게 해결된다.


이 파업 사태를 거치면서 J.R.D.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네루와 유사함을 확인했다. 즉, 최대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솔직하게 소통하며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생각이었다. J.R.D.의 이런 생각은 네루의 정신적 스승인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간디는 J.R.D.에게 노동자와 노동조합과 관련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간디는 노조 지도자와 비즈니스맨들에게 서로 간 대결을 끝내고 협상과 화해 정책을 채택하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이는 비단 간디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J.R.D. 본인의 신념과 철학이기도 했다. 그는 창업주인 잠셋지처럼 ‘좋은 인간관계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보답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공에도 필수’라고 믿었다.


J.R.D.가 좋은 인간관계를 달성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첫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문제점에 대해 듣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둘째, 대립 대신 합의하는 것이다. J.R.D.는 종종 “나는 확고하게 합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른 회사의 경영자를 비롯해 자신의 회사 중역이나 중간관리자, 노조간부, 또는 평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늘 합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룹 회장으로서 이런 생각과 자세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로선 매우 드물었다.


J.R.D.의 이 같은 ‘합의 경영’ 정신은 타타그룹에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J.R.D.는 타타그룹의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고, 철저히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노동자를 적이 아닌 기업운영의 동반자로 생각한 J.R.D.는 이를 체계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이의 결과가 인력자원부의 설립이다. 타타는 인력자원부를 설립해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일일이 도와주는 한편 노조와의 협력으로 노사 간 평화관계를 추구했다. 이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58년 파업 이후 2012년 현재까지 50년이 넘도록 타타 스틸에선 파업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노조를 파트너로 생각하는 J.R.D.의 철학이 타타그룹 내 우호적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은 종업원들을 존경심으로 대하는 회사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더 잘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조와의 협력은 노사 평화를 달성하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다. 이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Part 04 전설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라탄 타타

핵심산업 위주의 철저한 구조조정

라탄 타타의 성공 비결은 ‘크게 생각하는 동시에 작게 생각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그가 뉴욕에 위치한 호화스러운 피에르 호텔을 인수하면서, 인도에 값싼 진저 호텔들을 오픈한 것은 그 좋은 예다. 또한 그는 한편으로는 값비싼 자동차 브랜드인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사들여 경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노와 같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차를 출시했다. 그 사이에는 타타그룹의 전통적 자동차 사업인 울퉁불퉁한 길 전용 트럭도 있다.


라탄 회장의 큰 장점은 경제와 정부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예지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가 과감히 대형 기업합병을 하고 그룹 사업을 크게 도약시킨 것도 바로 이 덕택이 크다.


1991년은 수십 년간 폐쇄적 경제정책을 고수했던 인도 경제가 빗장을 열어젖힌 해다. 바로 그해에 라탄은 그룹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타타그룹은 갑자기 맞이한 개방과 자유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라탄은 달랐다. 그는 그룹 사람들이 사고의 틀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다.


그는 몇몇 회사를 매각해 조직을 간소화시키는 한편 그룹의 역할과 일 진행 절차를 합리적·효율적으로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 경제의 개방 이후 다른 많은 회사들이 낙오 혹은 추락하는 상황에서도 타타가 여전히 인도 최대 그룹으로 남아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탄은 이 같은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직원들의 사기를 꺾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다양한 직원들의 퇴직연령을 조정하거나, 그룹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탄탄한 새 조직을 만들어 대응했다. 만약 구조조정의 대상자가 생기면 정년인 60세까지의 임금을 모두 지불했다.


요즘 우리사회에선 ‘3.8선’이나 ‘사오정’, ‘오륙도’ 등의 말이 회자된다. 3.8선은 ‘38세까지만 직장에서 근무해도 선방한 것’이란 뜻이다. 사오정은 ‘45세가 정년’, 오륙도는 ‘56세까지 근무하면 도둑놈’이란 의미다. 그만큼 우리 기업에서 정리해고가 일반화되면서 고용이 매우 불안해진 것이다.


그런데 정리해고를 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의 경우 명예퇴직금을 지급하나 많아야 수차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타그룹은 남은 정년까지의 월급을 모두 지급한다. 한국 기업으로선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 대우다. 회사의 필요에 의해 구조조정을 하긴 하지만 그 어려움을 직원들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다. 직원을 기업운영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타타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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