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제1부 화폐의 유형
양화와 안정 화폐 - 사람들이 통화 협력을 통해 살아가는 생존방식
인간이란 동물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좀 더 생산성을 높이고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도구와 기술, 조직을 만들어낸다. 생산의 목적과 수단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산성은 당연히 미미한 수준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각기 제 짝을 찾아 자식을 낳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게 된다.
아주 원시적인 수준의 인간이라 해도 생존을 위해서는 도구를 만들고, 지식을 축적하고(자본 투자), 전문화 혹은 분업화를 통해 거래 행위에 참여하며 생산적인 시도를 하고(주식 투자),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거나 계약을 체결하는(채권) 등의 행위를 해야 한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핵심적 특징을 원시적 가족 단위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지역이나 활동 영역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거래를 하다가 점차 연관성이나 관련성이 낮은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것으로 대상 범위가 넓어지면서 거래의 형태와 속성이 더욱 추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화폐는 서서히 그리고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진다. 물물교환에서 교환의 수단으로 특정 물품이 사용될 때 화폐라는 것이 탄생한다. 화폐 혹은 간접적 효관 방식을 통해 인류는 자본을 창출하고, 분업화와 거래 행위에 참여하고, 특히나 잘 모르는 사람과의 공동 소유(주식) 혹은 의무(채권)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능력이 급격히 신장되었다.
화폐는 특정인의 발명품이 아니다. 정부가 존재해야만 화폐가 창조되는 것도 아니다. 조개껍데기를 비롯하여 소금, 정교하게 만든 구슬 띠(조가비 구슬), 거대한 돌 바퀴, 담배, 기타 등등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현시대에도 딱히 좋은 교환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람들은 이 용도에 가장 적합한 물품을 새로운 화폐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이히스마르크가 휴짓조각이 되자 독일인들은 담배를 화폐처럼 사용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사탕을 잔돈 대신에 사용했다. 머지않은 장래에 지폐와 주화는 모두 사라지고 모든 거래에 신용카드나 직불카드를 사용하는 시절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시절이 온다 해도 가치 척도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여전할 것이다.
화폐 경제 하에서 채권 축적의 주요 매개체는 은행이었고, 최초로 이러한 채권을 자금 조달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조직은 정부였다. 그리고 이들 뒤를 따른 것이 바로 기업이다. 주식회사가 등장하자 자금의 조직화 원칙이 없었던 때보다 더 큰 규모와 더 복잡한 수준에서 자본출자가 가능해졌다.
화폐는 곧 정보다. 수십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화폐 경제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를 강력하고도 분명한 행동 지침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의 순수성과 정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일에 주력해 왔다. 화폐 체계를 왜곡하고 조작하면 확장된 체계 전체가 오작동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화폐 제도의 불안정성이나 가치 하락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질서나 체제의 최대 훼방꾼은 다름 아니라 그러한 일을 할 동기와 능력을 모두 갖춘 정부였다. 그리고 수많은 산업과 사회 집단은 저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통화를 조작하도록 정부를 꼬드길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현재는 안정된 통화의 힘이 다시 우세해지는 형국이다. 특히나 몇 차례의 통화 대란을 겪은 후 이것이 심각한 경제난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같은 통화난의 사례로는 1994년의 멕시코와 1997년의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들 수 있다. 또한 1998년의 러시아와 브라질, 1990년대 일본, 2001년 터키, 2002년 아르헨티나 등도 이런 위기를 겪었다. 정부와 국민은 한목소리로 ??좋은?? 화폐, 즉 양화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나섰다.
지난 역사를 대충만 살펴봐도 변동환율제 통화에 관한 오늘날의 상환 조건은 매우 새로운 현상이다. 오늘날과 같은 변동환율제 통화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8월 15일부터였다. 이 날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와 금과의 연결고리를 끊고(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 형성된 기존의 세계 통화 체제를 갈아엎은 날이다. 1971년 이전 약 300년 동안은 안정 통화가 주도했던 시기였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금본위제로의 환원을 꿈꾸며 1980년대를 열었고, 빌 클린턴 역시 레이건의 이러한 경제 기조의 맥을 그대로 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근 100년 동안 유지되었던 약한 달러 정책을 포기하고 강한 달러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경제 호황을 이끌어냈다.
금본위제 - 안정된 통화 가치를 창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지난 3000년 동안 세계의 상업 중심지라 일컬어지던 곳에서는 대개 금본위제 혹은 이와 유사한 형태의 통화 체제를 채택했다. 금본위제의 본질적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통화의 가치를 정해진 금의 양에 고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통화 가치를 금에 고정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실제로 금이나 은을 통화로 사용하는 것이다.
금본위제는 양에 고정하는 것(양 페그)이 아니라 가치에 고정하는 것(가치 페그)이다. 금본위제는 통화 당국이 보유한 금의 양에 따라 본원통화의 양이 결정되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따라서 금이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한다고 해서 금의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금을 수입 또는 수출하거나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도난이나 기타 위험을 우려하여 금을 사적으로 보관하는 대신 민간조직에 금을 예치하고 상환증을 수령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하면서부터 태환할 수 있는 지폐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인 금본위제가 본격화되었다. 말하자면 금 1온스를 맡기고 대신에 1온스짜리 상환증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증표는 어떤 형식이든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은 차츰 자신들이 예치한 금은괴 대신 이 상환증을 유통해도 무리가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금은보다 오히려 유통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래 당사자 간에 직접 주고받아야 하는 금속 화폐에는 단점이 많았다. 우선은 금속의 중량과 순도에 대한 신뢰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금속 주화는 시간이 갈수록 마멸되어 가치가 상실된다. 이러한 자연적 가치 하락 때문에 주기적으로 다시 주조하여 원래의 중량과 순도를 유지해 줘야 한다. 또 주화는 무거워서 대규모 거래에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 실질적으로 금화보다는 오히려 금과 연계된 지폐가 더 안정적이고 신뢰도가 높은 화폐다. 또한 금과 은은 지하에 매장된 것을 어렵게 파내야 하지만 지폐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은행권은 요구가 있으면 금이나 은으로 상환할 수 있는 태환화폐이기 때문에 은행권의 가치는 표시되는 금속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수가 없다. 은행이 화폐를 과잉 발행하는 경우 이것은 금이나 은으로 태환되어 다시 은행으로 회수된다.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지폐의 가치가 금과 은의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므로 사람들은 금과 은을 가지고 다투어 은행으로 달려가 이를 지폐와 바꾸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은행은 지폐 발행을 통해 이득을 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지폐의 공급을 증가시키려는 동기는 항상 존재하므로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지폐를 받아가는 상황 조건이 흔히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자유 시장의 작동 기제다. 금본위제는 자유 시장과 시민이 만들어낸 제도이며 이는 자기 조절적 시장 체제 하에서 지폐의 공급을 관리하는 기제다. 여기에는 중앙은행도 없고 은밀하게 활동하는 정책위원회 같은 것도 없고 그럴듯한 지수와 총계 등을 산출해내는 통계학자 군단도 없다. 그리고 사실상 재량적 혹은 임의적 통화 정책이라는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통화 체제 하에서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은행이 지폐를 태환해 주겠다는 약속을 준수하도록 이를 보증하는 것이 고작이다.
다수 국가에서 채택되었던 금본위제의 본질은 하나의 세계통화 체제다. 중앙 통제 기관도 필요 없고 어떠한 유형의 재정 규칙이나 제한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이 제도를 채택한 국가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각 국가의 국민이 선택한 세계통화 체제인 셈이다. 달러화는 금과의 태환성이 보장된 하나의 계약서이며 약정서이고 파운드화나 유로화, 엔화 역시 금과의 태환성을 보장하는 계약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상품과는 달리 금 선물시장은 백워데이션(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보다 낮게 형성되는 것)이 없다. 요컨대 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 이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해, 금 대출금리는 항상 플러스를 나타낸다. 금 선물은 통화 선물과 동일하게 거래된다. 금은 곧 화폐이고 돈이다.
우리가 금을 화폐로 채택한 것은 금이 화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을 기준으로 한 통화 체제가 여러 차례 퇴짜를 맞기도 했지만, 이것은 금이 가치 척도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안전한 통화 체제를 구상하고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400년 동안, 아니 사실상 4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통화 체제였던 금본위제가 향후 400년 안에 다시 부활하지 못하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제2부 미국 화폐의 역사
미국의 화폐 - 식민지 시절의 은과 지폐 시대부터 1929년의 경제 대란까지
미국 식민주에 정부의 불환 지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90년 매사추세츠 주에서였다.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퀘벡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했고 이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군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당장은 아니고 몇 년 후에 정화로 바꿀 수 있는 증서(지폐)를 대신 지급했다. 물론 정화와 태환해 주겠다는 날짜는 계속해서 미뤄졌지만 이 방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정부의 모든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지폐를 발행했고 이 결과는 지폐의 평가절하로 나타났다.
사태가 이쯤 되자 영국 정부가 개입해 제멋대로 제도를 바꾼 식민주들을 밀어붙이면서 경화(특정한 금의 양을 기준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통화처럼 확정적이고 취소될 수 없으며 상호 합의된 계약으로서의 의미, 법의 지배를 받는 화폐. 반대로 연화는 단기적 정책 목표나 관리자의 의지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율되는 화폐) 체제로 환원시키는 법을 제정했다. 1751년에 영국은 뉴잉글랜드 지역 식민주에서 법정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했고, 1764년에는 이러한 금지 규정을 확대하고 전체 식민주에서 유통되고 있는 지폐를 모두 회수했다.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뉴잉글랜드 지역 식민주들은 유통된 지폐를 시장 비율로 태환해 주면서 이를 전량 회수하고 정화(正貨, 소재가치가 액면가치와 동일한 화폐) 체제로 복귀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에 따라 지역의 경제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믿을 수 있는 안정된 가치 측정 단위 덕에 거래와 투자, 생산 활동이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1775년에 시작된 미국 독립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륙회의는 곧바로 대량의 불환화폐 발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온갖 수단의 가격 통제와 강제적 액면가 관련 법규에도 불구하고 불환화폐의 가치는 처음에 은과 액면가 대비 1:1이었던 것이 1781년에는 168:1로 떨어졌다. 결국 미국은 자국 역사상 최초의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 정부는 전쟁 기간에 총 6억 달러 규모의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 또한 공개시장에서 가치가 하락했다. 일부는 할인된 비율로 처분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새로 출범한 미 연방 정부의 채무 그대로 남았다.
불환화폐와 관련한 좋지 않은 경험으로 단단히 혼쭐이 난 미국에서는 1789년에 시작된 헌법 제정 작업 당시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위시한 헌법 제정 담당자들이 금과 은을 신생독립국 미국의 유일한 화폐로 못을 박았다. 금과 은만을 화폐로 인정했다고 해서 오로지 금속 화폐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태환 지폐는 그 자체가 화폐는 아니지만 지금의 은행 수표처럼 화폐(정화)와의 태환성이 보장된 일종의 계약서 혹은 보증서라고 볼 수 있다. 서명과 액수가 표기된 전표 역시 지금의 어음과 유사하게 기초 통화와 태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거래 시에 일종의 화폐로 사용할 수 있다.
1812년 전쟁은 1789년에 미국이 금본위제를 시행한 이후 최초로 경험하게 된 인플레이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국가 통화라는 것이 없었고 지역의 상업은행들이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예금인출 쇄도를 우려한 동시에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남부 소재 은행들은 자사 은행권의 정화 태환을 중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변동환율제 통화 체제로 돌입했다. 물론 이러한 태환 중지는 계약의 불법적 파기 행위였지만 당국은 은행들의 이러한 행태를 못 본 척 방조했다. 반대로 북부 소재 은행들이 자사 은행권과 금의 태환성을 유지한 결과, 북부 은행권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었다. 그러나 연방 정부는 북부의 상품 대금을 남부 은행권으로 지불하려 했고 북부 은행들은 남부 은행권을 금과 태환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남부 지역의 통화 팽창은 또 다른 전국은행인 미합중국 제2은행에 대한 설립 요구를 촉발시켰다. 이 은행의 주요 목적은 전국적인 효력을 지니는 태환 정책을 통해 남부 은행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제2은행은 법에 따라 1816년 4월 10일에 역시 20년짜리 면허를 지닌 전국은행으로 설립되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제2은행은 이른바 ‘혐오관세’로 불렸던 1828년의 관세법 제정과 함께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정부는 흑자 재정을 운영하고 있었고 잔존 채무도 적정한 수준이었다. 보호 관세는 보호 무역을 통해 외국과의 경쟁을 피하려 했던 북동부 지역 제조업자들의 강력한 입김으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수출용 면화 생산을 주축으로 한 남부 경제의 특성상 공산품 대다수가 남부에서 소비되었다. 따라서 관세 정책은 공업 지역인 북부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농업 지역인 남부는 가격은 오르고 품질은 떨어지는 상품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높아진 무역 장벽 때문에 면화 수출이 감소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관세법 시행을 거부함으로써 북부의 보호 관세를 무효화시켰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부 주정부들 간의 회담이 연이어 지속되었다. 이후 30여 년간 북부와 남부는 보호무역주의와 자유무역주의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이 문제는 노예제도 반대 논쟁과 맞물리면서 급기야 남북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무역 장벽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1828년에 미국 경제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관세법 제정 이전에 수입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수입 자금은 은행들의 신용 거래 확대를 통해 조달했다. 외국인들의 미국 은행권 보유량이 감소하면서 그 가치가 떨어지자 너도나도 미국 은행권을 들고 들어와 정화와의 태환을 요청했다. 이 같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2은행은 은행권의 가치가 금 평가 수준으로 회복하게끔 각 은행에 대해 은행권 발행을 제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861년에 전쟁이 터지자 정부와 은행은 정화와 은행권의 태환을 중지했고 달러는 변동환율제 통화가 되었다. 1875년에 의회는 태환법(정화지불재개법이라고도 함)을 통과시켰고 이를 통해 달러는 전쟁 전의 평가 수준으로 복귀해 정화와의 태환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달러의 수축과 경기 쇠퇴는 지속되었으며 달러 가치는 18년 동안 등락을 계속한 후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했다. 이후 그 형태에는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1971년까지는 본질적으로 금본위제가 유지되었다.
1920년대를 주름잡던 경제 성장세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성장세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발목이 잡혔고 결국 전 세계가 줄줄이 세금 인상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세계 경제가 경기 침체와 통화 대란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미래 전망은 감세와 경제 성장이라는 장밋빛 그림에서 세금 인상, 국제적 무역 마찰, 법인 소득의 감소, 하향적 성장 예측 등으로 채워진 암울한 그림으로 바뀌어 버렸다.
1789년부터 1913년까지 발생했던 경제 및 금융 위기는 금본위제에서 이탈 혹은 이탈 위협이 있었거나 일시적으로 이탈했거나 혹은 미숙하게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유동성 부족에서 비롯된 위기였다는 점에서 볼 때 그 본질상 통화적인 것이었다.
그린스펀 시대 - 1987년의 주식시장 붕괴, 경기 침체, 경기 회복, 통화 디플레이션
우리는 1990년대를 경제가 호황을 누렸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지만 1996년은 사실 그렇지가 못했다. 1990년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1990년부터 1994년은 경기 후퇴와 더딘 경기 회복으로 대표되는 시기였다. 1995~1996년에는 경제 성장률이 연간 2.5%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1996년 말과 1997년에 감세안이 통과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호황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미국 경제는 고속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달러 가치는 더욱 상승했다. 이 때문에 세계 경제는 위기에 몰렸고 달러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이 심해졌다.
1993년 이후로 달러 가치가 그렇게 높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1995년 초에 온스당 395달러였던 달러 가치가 1997년 7월에 온스당 330달러로 상승한 것은 분명히 큰 폭의 변동이기는 하지만 미국과 세계 각국이 지난 15년 동안 유지해 왔던 플라자-루브르 합의의 범위를 벗어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1997년 11월에 달러 가치가 온스당 300달러까지 치솟자 달러 가치 상승의 디플레이션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났다. 볼커가 1982년에 달러 가치를 온스당 3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세계 각국이 자국 통화의 달러 페그를 폐지함에 따라 극심한 채무 위기와 통화 가치 붕괴를 경험해야 했다. 적어도 연방준비위원회의 전 의장인 볼커는 더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달러 가치를 원래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1985년 초에 달러 가치가 다시 온스당 300달러로 상승하자 달러 강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플라자 합의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달랐다. 그린스펀은 항상 금이 인플레이션 혹은 디플레이션을 나타내는 가치 기준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의 지표로 생각했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시장 소식통의 입장에서 쓴 저서에서 1982년과 1985년의 디플레이션 달러 상황에 매우 흡족해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97년에 달러 가치는 온스당 290달러로 마감되었으며 이는 몇 차례 일시적으로 천장을 찍은 경우를 제외하고 지난 18년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에 자국 통화의 가치를 달러에 고정했던 개발도상국은 달러를 과도하게 차입한 것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1990년대에 외국인 투자가 아시아 국가에 집중되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경제난을 ??아시아의 위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금 인하 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 때문에 미국의 디플레이션은 처음에는 경기 침체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7~1998년에는 상품 가격이 하락했고 1982년과 1985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 내 제철, 석유, 농업 등 상품 관련 산업이 어려움을 겪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경제는 두 분야로 갈렸다. 한쪽은 통화 수축과 달러의 높은 환율 가치의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는 제조 및 원료 산업 등 2차 산업 부문이다. 또 한쪽은 자본이득세 인하 정책에서 혜택을 볼 수 있으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디플레이션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는 기술 관련 부문이다.
인플레이션은 전체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만 상품 생산업자와 같이 개중에는 인플레이션의 덕을 보는 사람들도 있듯이 디플레이션 역시 전체 경제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적어도 제한된 기간 동안 특정 부문에 득이 될 수도 있다. 디플레이션의 어떤 이점 때문에 기술 관련 사업과 관련 주식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기도 한다.
주요 시장 지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1997년과 2000년까지 주식시장은 최고 활황세를 나타냈지만 실제로는 대다수 주식의 가격이 떨어졌고 대부분의 사업 부문이 정체 상태를 나타냈다. S&P 500지수가 19.5%, 나스닥 종합지수가 85.6% 상승했던 1999년 말에 NYSE 등록 주식의 70% 정도가 전년도보다 가격이 하락했다. 공식적인 S&P 500 경영자본이득은 2000년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법인세 납세신고서를 기준으로 표준화된 기업 소득 자료, 즉 국민소득과 소득 계정 자료를 보면 미국 기업의 이익 수준은 1997년에 최고치에 달했다가 이후 몇 년 동안 그 수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그 수준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업들은 꾸준히 수익이 증가한 것처럼 보이도록 회계 장부를 조작했다.
1999~2000년은 연준의 "통화 창조"로 인한 "인플레이션 거품"의 시기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1998년 말에 그린스펀이 저금리 정책(달러의 평가절하)을 구사하여 주식 가격의 거품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그럴듯한 논리로 보이지만 그때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 증거와 맞지 않는 면이 있다(연준의 정책 금리 인하는 자산 가치를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오히려 연준은 디플레이션 문제를 통화 공급 기제로 풀려고 했다. 통화 수축이 서서히 미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경제 성장 둔화를 불러오면서 2000년 3월의 주가가 과도하게 평가되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린스펀이 이룬 성과는 들쑥날쑥한 측면이 있고 사실 금본위제 하에서 이룩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열등한 성과를 냈던 것만은 분명하다. 브레턴우즈 체제 하의 윌리엄 마틴이 오히려 더 좋은 성과를 냈다. 그린스펀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실수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큰 실수였다고 해도 적어도 그러한 실수의 여파가 다른 국가에까지 크게 미치지는 않았다. 그린스펀은 미국이 1971년에 변동환율제 통화 체제를 선언한 이후로 등장한 네 명의 연준 의장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의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린스펀이 의장직을 맡아준다는 부분에 안도하고 있었다. 악마도 모르는 놈보다는 차라리 아는 놈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제3부 세계의 통화 위기
다시 경화의 시대로 - 좋은 화폐야말로 좋은 정부의 초석이다
경화체제로 복귀했을 때의 장점을 들라면 한도 끝도 없다. 경화로의 복귀는 십억에 달하는 선진국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개발도상국의 50억 국민에게도 득이 되는 해법이다. 일단 한 국가가 혹은 전 세계가 경화를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유형의 경화체제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항상 그렇듯이 되도록 오랫동안 통화 가치의 안정성을 가장 잘 보장해줄 수 있는 체제 이상 가는 것은 없다. 또한 시행하기도 쉽고 도입에 따른 혼란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 관한 한 금본위제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
금본위제는 지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본원통화의 공급량을 조정하는 기제를 통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25센트짜리 동전과 10센트짜리 동전을 지폐와 바꾸려 할 때 이 동전들이 각각 몇 개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동전들의 가치가 정해져 있듯이 금 대비 통화의 가치도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
새롭게 실시되는 금본위제에는 태환성에 관한 조항도 포함되어야 한다. 태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내건 통화적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엄격히 말해 이는 기술적인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 속한다. 정부는 태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항상 일정 수준의 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지만 금 보유고가 항상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새로운 금본위제에는 거래 대역에 관한 조항도 포함되어야 한다. 평가에서 대역이 상하 2% 정도면 적정 수준일 것이다. 평가가 금 1온스당 350달러로 정해지고 대역은 2%인 경우 정부는 온스당 343달러에 달러화를 매도(혹은 금을 매수)하고 온스당 357달러에 달러화를 매수(혹은 금을 매도)하게 된다. 이 두 가지 모두 불태환 거래로서 본원통화의 공급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통화가 이 수준에 이르기 전에 정부는 정부 채권을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방법으로 본원통화의 공급량을 조정한다.
금본위제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공급을 통해 자국 통화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한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중국, 에스토니아, 홍콩 등에서 이미 이러한 실험을 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금본위제를 채택한다면 아마도 5년 안에 일본과 유럽도 미국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사실 일본과 유럽은 아주 오래전부터 미국보다 더 통화 안정성과 고정 환율제를 선호하던 국가였다. 이미 타국의 유력 통화를 기축 통화로 한 통화 페그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다수 개발도상국 역시 2~3년 내에 금본위제의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가 몰락한 후 요즘 다시 세계무대에 우뚝 서기 시작한 중국과 러시아가 만약 먼저 금본위제를 채택한다면 세계 최대 강국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중국과 러시아가 독자적 노선을 걷기로 결정한 후 각국의 온갖 비난과 트집 잡기에도 굴하지 않고 또 높은 세율로 자국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악수를 두지 않은 채 한 10여 년 정도만 잘 버텨 준다면 유럽과 일본,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경화체제 대열에 합류하든가 아니면 새롭게 부활한 동구 열강(중-러)에 한참 뒤처져 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경화체제로 복귀하면 행동의 지표 역할을 하는 가격 정보에 대한 왜곡 현상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통화 가치의 변칙적 변화가 아니라 시장 경제의 상대적 장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는 세상이 다시 도래할 것이다. 자본은 좀 더 정확히 분배될 것이고 생산성은 증대될 것이다.
경화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경력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경제학자들은 너도나도 경화체제를 지지하고 나설 것이다. 또한 정치적 흐름이 연화에서 경화 쪽으로 바뀌면 경제계의 지식층도 이러한 변화의 징후를 인식하고 경화체제의 우월성을 부르짖는 쪽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갈 것이다. 좋은 화폐야말로 좋은 정부의 초석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