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2008년 세상에 처음 등장한 9장의 글과 그림
비트코인의 배경과 원리 및 추세를 다루고, 화폐와 금융의 원리를 우화를 통해 풀어낸 책. "디지털 화폐의 꿈, 짓밟히다", "실크로드 사건이 암시하는 비트코인과 지하경제", "중국의 역습, 통화주권을 사수하라", "금융은 네트워크다", "정부에게 돈을 맡길까 참새에게 방앗간을 맡길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폐현상은 전공자들조차 어려워하는 반직관적인 개념이다. 그럼에도 비트코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수많은 새로운 화폐가 등장하고 쇠하기를 반복했다. 또한 신용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개별적이지만 모아놓으면 하나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우화는 금융의 역사를 전형적인 패턴으로 단순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우화 중간 중간에 화폐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소개하여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 저자 오태민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온미디어㈜, 모바일 벤처기업 무이테크㈜ 대표, 국회보좌관을 거쳐 지식번역가로서 비전공자들의 평생학습을 돕는 강의 개발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경제학적 상상력(2013)』『인문학적 상상력(2012)』『여백의 질서(공저, 1994)』 등이 있다.
■ 그림 이평기
평택에서 시와 그림과 향기로운 커피가 있는 곳 ‘커피하우스 러디빈’ 운영. 커피 볶고 내리는 일과 책 읽는 일, 커피봉투에 그림 그리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내.
■ 차례
Part I 비트코인은 강했다
디지털 화폐의 꿈, 짓밟히다 | 사토시 나카모토, E-Gold에 답하다 | 실크로드 사건이 암시하는 비트코인과 지하경제 | 골드만삭스, 대문자 B와 소문자 b를 구별하라 | 마운트곡스 파산을 견뎌내다 | 돈 되는 소셜네트워크 | 중국의 역습, 통화주권을 사수하라 | 한국인과 비트코인 | 비트코인 이데올로기 | 비트코인 연대기
Part 2 화폐적 상상력과 비트코인의 미래
화폐는 허구다 | 코스타리카 박쥐들의 피교환 게임 | 금융에 취하다 | 뱅크런(Bank run) | 고정가격이라는 허구 | 좌판업자의 등장 | 정부가 필요해 | 금융은 네트워크다 | 피를 미래로 보내려면 | 정부에게 돈을 맡길까 참새에게 방앗간을 맡길까 | 박쥐이야기 에필로그 : 종말 이후 | 끝맺음(비트코인의 미래 : 두 가지 경로)
화폐원론 1. 화폐는 빚의 기록이다
화폐원론 2. 세뇨리지seigniorage(화폐발행자들의 이익)
화폐원론 3. 돈은 정부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화폐원론 4. 닉슨 대통령의 달러 금태환 금지 선언
화폐원론 5. 지불준비금제도와 신용창출과정
화폐원론 6. 오스트리아 학파와 신용창출
화폐원론 7. 여행과 은행업의 태동
화폐원론 8. 금융은 미래와 현재를 중재한다
화폐원론 9. 공개시장조작open market operation
화폐원론 10. 정부가 디플레이션 화폐를 싫어하는 이유
화폐원론 11. 화폐라는 본능과 국가의 악연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은 강했다
사토시 나카모토, E-Gold에 답하다
법무부가 잭슨의 유죄판결을 위해 마지막 땀을 흘리고 있었을 2008년 8월, bitcoin.org라는 도메인이 등록되었다. 10월에는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비트코인 P2P전자결제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라는 논문이 올라왔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전자결제가 풀어야 할 숙제에 대한 기존의 해법은 제3자의 개입으로 압축된다고 설명한다. 가장 큰 문제는 중복결제(Double Spending)다. 현실이라면 한번 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줄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지만 파일을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인터넷에서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다. E-Gold에서는 이 문제를 중앙의 서버로 해결한다. 은행의 중앙서버가 통제하므로 중복 지불이 불가능하다.
P2P에서라면 내 소유권을 갑돌에게 주고 나서 소유권을 복사해 두었다가 을순에게 줄 수 있다. 내가 갑돌에게 a라는 금에 대해서 소유권을 이전했다. 이 사실을 공개하면 을순도 병돌도 정순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제임스에게 이전하려고 하면 제임스는 속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이 빛의 속도로 처리되는 인터넷에서 신의의 제3자인 제임스의 손실을 방지할 방법이 있다. 즉 을순, 병돌, 정순이 승인하는 거래만 진행되도록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외로운 채굴이 시작되고도 한동안은 이 논문이 의미하는 바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난 해커들이 시스템의 허점을 찾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패하고는 하나둘씩 비트코인 지지자로 돌변했다. 급기야 타임을 비롯한 주요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비트코인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운트곡스 파산을 견뎌내다
비트코인을 달러나 다른 국가의 통화로 바꾸는 거래소 중 가장 규모가 큰 마운트곡스(Mt. Gox)가 해킹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안전성에 있어서 명성을 얻고 있는 비트코인을 해킹했다는 사실 자체도 영광이지만 금광과도 같은 거래소를 해킹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으니 거래소는 해커들의 공인된 타깃이었던 것이다. 2013년 4월에 발표한 한 연구에 의하면 40개 거래소 중 18개, 45%가 해킹이나 사업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마운트곡스 사건은 비트코인 시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비트코인에 대한 충성스런 추종세력이 총 거래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정적인 재앙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대중들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운트곡스 사건은 비트코인이 지향하는 P2P 시스템의 안정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기존의 인터넷 기반이 비트코인의 기술적·정신적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보안문제나 정부 규제를 피하려면 중앙서버에서 거래하는 방식에서 P2P로 거래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제3자의 거래 보증 같은 신뢰장치가 기술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한국인과 비트코인
비트코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다. 그러나 비트코인이나 디지털 암호화 화폐에 대한 수요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인터넷 쇼핑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다가 조금씩 두려움이 생기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이티보급률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이유 중의 하나로 국민들의 미약한 권리의식을 꼽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으면 하루도 생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인터넷은 생활의 중심이지만 그에 걸맞은 보안 의식이 성숙하지는 못했다.
고객의 개인정보를 누군가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비트코인으로 거래를 할 경우 판매자는 물론이거니와 금융기관이 고객의 정보를 보유할 필요가 없다. 비트코인은 원래 개인 간 거래 수단으로 창안되었기 때문에 소액결제에 있어서 그 위력이 대단하다. 신용카드 수수료가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한국인들이 비트코인을 애용하게 된다면 그건 해외송금수수료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자녀들을 외국에 보내놓고 송금할 경우 환전료와 송금료를 합쳐 10% 가까이 손해를 본다. 비트코인으로 환전하면 금융기관들이 달러를 매입하는 고시된 환율로 달러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이데올로기
비트코인은 빚에 기초한 법화(종이돈)에 대한 반작용에서 각광받고 있다. 그런 비트코인이 달러를 대체하는 결제시스템이 된다면 비트코인 역시 디플레이션 화폐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비트코인 진영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소리다. 인플레이션이나 정부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이 비트코인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번 주고 나면 받는 쪽이 스스로 돌려주기 전에는 되찾기 어렵다는 비트코인의 속성이 확산의 장애요소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신뢰받는 제3자가 개입하는 거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결국 비트코인도 신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비트코인이 제공하는 유사익명성(pseudo-anonymity) 덕택에 신용카드 넘버를 인터넷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 비트코인은 익명성이 없다. 모든 거래를 공개하고 모든 거래가 기록된다. 조직적인 범죄집단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메일을 피하듯이 비트코인을 피할 것이다. 비트코인은 경제시스템을 바꿀 것이다. 경제시스템 또한 비트코인을 바꿀 것이다. 금융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비트코인은 하나의 종속 변수이자 독립변수다.
화폐적 상상력과 비트코인의 미래
화폐는 허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드의 다발이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이 어색하기 때문에 비트코인은 돈 같지 않다. 화폐를 돈 되게 하는 것의 본질은 종이가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익숙하지만 조상들은 정부가 찍어내는 종이돈에 대해 저항감을 가졌다. 금이나 은처럼 보증되는 실체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인도에서 금은 쇳덩어리보다도 가치가 없다. 화폐는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교환대상이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비트코인도 허구고 종이돈도 허구고 금도 허구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금과 같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비트코인에 대한 의심 하나를 추적하다 보면 화폐의 실체라는 말은 뱀의 꼬리처럼 종적을 감춘다. 정부가 보증하는 건 돈의 가치가 아니다. 세금이나 벌금을 내는 수단, 공무원들의 급여, 정부수용 자산에 대한 지불수단의 지위를 보증한다. 대신 정부는 돈의 가치를 관리한다. 정부가 관리하는 돈이라는 말의 뒷면에는 관리를 잘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교환수단,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은 화폐가 가져야 할 3대 속성이다. 그런데 화폐가 어떤 경로를 거쳐 이런 속성을 갖게 되었을까? 당연해서 잊어버리고 있던 화폐의 태생에 얽힌 이야기가 비트코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코스타리카 박쥐들의 피교환 게임
코스타리카의 박쥐는 사회적 동물이다. 박쥐는 거대한 포유류의 피를 뽑아먹으며 살아가는데 흡혈은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 그러나 60시간 동안 일정한 양의 피를 먹지 못하면 박쥐는 굶어 죽는다. 흡혈에 성공하면 아주 많은 피를 얻는다. 실패하면 하나도 얻지 못한다. 이런 불안정과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박쥐들은 일종의 게임을 한다. 피가 남는 박쥐가 피를 게워내면 사냥에 실패한 박쥐가 이를 받아먹는다. 피를 받아먹었던 박쥐는 이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갚는다.
코스타리카 박쥐들이 인간처럼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들도 인간처럼 화폐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갑돌이 며칠 동안 피를 먹지 못했다. 갑돌은 요새 사냥으로 잘나가는 을돌을 찾는다. 그러나 을돌은 얼마 전에도 갑돌에게 피를 주었다.
"오늘 너한테 피를 받으면 그 증서를 이 점토판에 써서 줄게. 언젠가 내게 피가 있을 때 누군가가 내게 그 증서를 요구하면 내가 피를 갚을 거야. 너는 굶게 되었을 때 피가 있는 녀석에게 이걸 주고 피를 받아. 나중에 나한테 받으라고 하면서 이 점토판을 주면 피를 얻어먹을 수 있어." 갑돌은 평소 연습한 필체로 점토판에다가 날짜를 적고 갑돌이 을돌에게 피 20cc를 받았다고 새겼다.
갑돌의 점토판은 일종의 환상이다. 피로 피를 갚는 환상이다. 피가 있으면서도 굶는 박쥐에게 피를 갚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받을 빚이 있는 박쥐에게 필요할 때 여분의 피가 있어 되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점토판만 있으면 언제고 피를 얻을 수 있었다. 갑돌이 집 앞에는 언제나 점토판이 필요한 박쥐들과 피가 부족한 박쥐들이 모여서 질서 있게 자신의 몫을 챙겨갔다.
금융에 취하다
갑돌이가 XXX에게 피를 받았다라고 쓰여 있는 점토판을 (갑돌이) 점토판이라 부른다. 갑돌이 갚아야 할 빚이다. △△△가 갑돌에게 피를 받았다라고 쓰여 있는 점토판은 (갑돌에게) 갚아야 할 점토판으로 부른다. 갑돌이 받아내야 할 채권이다. 두 종류의 점토판은 연결되어 있다. +와 -를 합치면 약간 차이가 생기는데 갑돌 자신이 스스로 소비한 피의 양만큼 부족하다. 점토판의 생리를 알아갈수록 갑돌이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라서 갑돌이가 점토판은 시중에 유통되면서 화폐로 쓰이는 데 반해 갑돌에게 점토판은 갑돌이 집에 보관하는 식으로 굳어졌다.
갑돌은 어느새 유명해졌다. 위대한 갑돌이는 고귀한 친구들로부터 애정과 존경과 부러움을 얻는 대가로 점토판을 주고 얻은 피를 낭비했다. 갑돌이가의 총량과 갑돌에게의 총량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다. 갑돌이가는 갑돌의 채무이고 갑돌에게는 갑돌의 채권이므로 채무가 채권보다 많아지면 언젠가는 부도에 몰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시스템은 피를 한꺼번에 찾으러 오지만 않는다면 부채 초과상태로도 유지할 수 있다.
뱅크런(Bank run)
사냥은 하지 않고 언제나 피를 빌려 먹기만 하던 늙은 박쥐들 몇이 죽어버렸다. 저 박쥐가 여태까지빌려 먹은 피는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날개를 단듯 동굴 안은 그 의문으로 떠들썩해졌다. 박쥐들은 집으로 뛰어가 점토판을 찾아 가지고 나왔다. 갑돌의 집까지 점토판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갑돌은 애초에 피가 없었다. 피를 내줄 수 있었던 건 언제나 피를 맡겨두고 점토판을 받으러 오는 박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굴 속은 완전히 평온을 잃어버렸다.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박쥐사회는 점토판이 발명되기 전보다도 못한 상황으로 추락했다. 박쥐들은 점토판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피만을 믿는다. 경제학자들이 뱅크런(bank run)이라고 부르는 사태다. 화폐의 본질은 신용이고 신용은 일종의 환상이기 때문에 그 환상이 깨지면 화폐 시스템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박쥐 하나가 갑돌의 실험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갑돌이 갑자기 몰락하자 이 박쥐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민첩하게 움직이도록 이 박쥐가 뒤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다. 공무원들이 갑돌이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정부가 새로 발행하는 점토판에는 20cc에서 cc가 빠지고 20이라는 숫자만 남았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피를 받았다는 말도 없다. 중앙점토판은 1, 5, 10, 100이란 점토판도 만들어서 내보냈다.
정작 중요한 변화는 동굴중앙점토판으로 새 단장한 갑돌이 집의 창고에서 다른 박쥐들 모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앙점토판은 채무에 해당하는 점토판과 쌍을 이루는 채권을 기록한 점토판을 보관하지 않았다. 중앙점토판은 채권을 나타내는 점토판을 창고에 보관하지도 않았으니 불균형이고 뭐고, 발생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박쥐들은 중앙점토판의 상환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좌판업자의 등장
은돌은 갑돌의 실험을 관찰했던 또 다른 박쥐이다. 점토판을 발행하지 않고서도 갑돌이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자개념이 없어서 갑돌이 실패했다는 것이 은돌의 결론이었다. 피를 주고 준 피만큼 받아먹으며 오랫동안 상부상조하여 살아온 이들에게 피를 꿔주고 보태서 받는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고 부당했다. 그러나 집에 점토판이 쌓여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박쥐들부터 하나둘씩 미심쩍어하면서도 은돌이 좌판으로 점토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성황을 이루자 은돌에게도 고민거리가 생겼다. 꾸어가는 점토판과 맡기는 점토판의 숫자 맞추기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은돌은 이자가 너무 많거나 적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 은돌은 자신의 좌판 앞에 그날의 이자율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박쥐들은 이자율을 보고 점토판을 맡길지 꿔갈지 결정했기 때문에 은돌이 생각대로 맡기는 점토판과 꿔주는 점토판 숫자가 맞지 않아 생기는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현명한 박쥐는 은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갑돌이 사건 이후로 정부 내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지금은 중앙점토판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점토판장이지만 모두가 그를 판장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은돌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 판장의 느낌이다. 은돌은 갑돌의 문제를 이자에서 찾았지만 판장은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부가 필요해
동굴 속 경제는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점토판의 숫자와 피의 양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포고 이후 40점토판을 가져가면 20cc의 피를 얻을 수 있었다. 가격은 미세하고 오르고 내렸으나 대체로 2:1의 비율을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새 물가는 전반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점토판의 가치가 내려갔다.
기간이 되기 전에 점토판을 회수하러 오는 박쥐가 예상외로 늘어나자 은돌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은돌은 더 이상 점토판을 빌려주지 않고 맡아놓기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점토판을 빌리러 오는 박쥐들을 돌려보내자 다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은돌이 좌판에 더 이상 점토판이 없다는 악성 루머였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대출창구의 폐쇄는 오히려 은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은돌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은돌의 좌판은 이자를 미끼로 박쥐들이 각자 지니고 있을 점토판까지 빨아들였고 은돌은 그 점토판을 다시 대출했다. 그렇게 풀려나간 점토판을 다시 빨아들이고 다시 대출하는 반복을 통해서 신용을 몇 배로 확장했다.
은돌은 판장에게 점토판을 빌려달라고 했다. 판장은 은돌이 필요할 때면 점토판을 내어주겠지만 그 대신 은돌은 판장의 말을 듣겠다는 서약서에 사인하라고 했다.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한 은돌로서는 마다할 여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관리 아래 들어가면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정부로부터 보증을 받는다는 뜻이니, 사업의 안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은근히 기대했다. 은돌은 판장이 내어준 점토판을 다 사용하지 않고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금융은 네트워크다
판장은 점토판 자체가 아니라 점토판으로 만들어지는 신용 전체가 통화량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판장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박쥐들에게 점토판을 내주면서 동굴 여기저기로 보냈다. 박쥐들이 잘 모이는 광장을 골라서 은돌과 같이 좌판을 놓고 예금을 받고 대출을 주는 사업을 하도록 했다. 점토판이 급하게 필요하게 될 경우 중앙점토판에 오면 점토판을 내주겠지만 예금으로 들어온 점토판 중 일부분은 중앙점토판에 의무적으로 맡겨두라고 지시했다.
정부의 보증을 받으면 경쟁자 없이 자기만 영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은돌의 기대는 어이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은돌의 사업에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 멀리 여행을 떠나는 박쥐들이 점토판을 맡기러 오는 일이 잦아졌다. 박쥐들이 자기 동네 좌판에 점토판을 맡기고 증서만 가져가면 다른 지역의 좌판에서도 점토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부에게 돈을 맡길까 참새에게 방앗간을 맡길까
경제가 성장하고 박쥐들이 더 부자가 될수록 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 늘었고 정부에 대한 요구는 정부규모의 증가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문제는 이 많은 일을 세금으로는 충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부는 채권 발행을 늘려서 늘어나는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
정부가 돈 갚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박쥐들은 지겨운 언쟁을 포기하고 스스로 행동하기로 했다. 국채를 더 이상 사려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것도 팔아치우려고 했다. 국채의 인기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정부는 채권의 이자를 올려서라도 점토판을 끌어내려 했는데 그런 와중에 시중의 점토판 금리가 올라갔다. 빚으로 사두었던 물건을 시장에 내놓자 물건 값이 떨어졌고 덕분에 이자 비중이 더 커졌다. 그러자 모험적으로 사업을 벌이던 박쥐들이 견디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이런 사업체에 점토판을 많이 빌려주었던 좌판업자들은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아야 했다.
점토판을 그냥 찍어서 업자들에게 내주자 업자들은 점토판을 찾으러 온 박쥐들에게 점토판을 줄 수 있었다. 그들은 금지된 장난을 즐기는 십대들처럼 허구한 날 점토판을 찍어냈다. 동굴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게 점토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야 박쥐들은 물건 값이 오르는 게 아니라 점토판이 흙덩이로 전락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길에 널린 게 점토판이다.
끝맺음(비트코인의 미래 : 두 가지 경로)
비트코인 실험이 성공한다면 인터넷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큰 기회의 창이 열린다. 우선 정부들의 무절제한 통화관리에 제동을 건다. 비트코인은 정부의 자의적 통제를 억제한다.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대응이 손쉽기 때문에 정부정책의 선택 폭이 줄어들어 통화관리가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비트코인은 정부의 통화관리를 더욱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
금융기관에게 비트코인은 파괴적인 기술이다. 별다른 보장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중간에서 받아 챙기는 각종 수수료는 비트코인의 부상과 함께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지적재산권이 폭넓게 보호받게 되므로 콘텐츠 사업이 인터넷 환경에서 크게 성장하고 산업화된다. 비트코인은 소액결제가 손쉽고 저렴하다. 금융서비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저개발국가의 시민들이 보편적인 기회를 제공받는 데 일조할 수 있다. 합리적인 이자를 물고 비트코인을 빌릴 수도 있으며 선진국 국민들과 동등한 혜택을 받으며 예금을 하고 뜯기는 일 없이 소득을 축적할 수 있다. 비트코인의 성공이 가져올 이런 긍정적인 변화의 목록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문제는 비트코인 생태계가 신용의 창출까지 나아갔을 때 생긴다. 금융기업의 회계구조상 일반 회사보다 더 취약하다. 비트코인 대부업체도 부도에 몰릴 수 있다. 피해자들이 패닉에 빠지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타고 불신과 공포가 빛의 속도로 확산될 것이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음지에 묶인 비트코인을 가장 애용하는 실질 수요자들로부터 온다. 실크로드와 같음 음지의 쇼핑몰이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환전업을 하는 지하조직들이다.
주류에 맞서본다는 신념을 유지하다 보면 정부나 공룡금융기관 같은 주류들에게 골칫거리를 선사하는 잔재미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그다지 새로운 행복과 해방을 선사하지는 못하고 하류문화로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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