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관계의 심리를 파헤쳐 좋은 관계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힌트를 인상, 시선, 비교,상황, 뇌동, 착각, 감정, 표시, 소통, 공평, 수용, 가치관 등 12개 테마로 나누어 살펴본다.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다양한 요인을 소개한다. 인간관계를 움직이는 심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관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왜 우리가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만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각 장마다 흥미로운 심리 테스트를 제시한다. 나의 심리건강도는 얼마인지, 내가 남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는지, 나는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나의 사교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테스트할 수 있다.
■ 저자 이철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졸업하고 광고와 디자인 전문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교에서 브랜드지향에 관한 연구로 사회심리학 석사학위를, 인간의가치관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소비자의식에 관한 연구를 주로 담당하다가 지금은 주식이라는존재에 흥미를 느껴 전업투자자 생활을 하면서 주식심리를 연구한다. 2008년 현재 사회심리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저술 작업을 하는 한편, 칼럼과블로그(http://umentia.com&>)를 통해 사회심리학을일반인에게 소개한다. 지은 책으로는 『인간관계가 행복해지는 나를 위한 심리학』 외에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심리의 법칙』『세상을 움직이는 착각의법칙』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Theme 1 인상
관계는 첫인상부터시작된다
목소리가 관계를 결정한다
인상은 어떻게 형성될까?
심리테스트: 나의 심리건강도는?
Theme 2 시선
부부간에 운전교습은어렵다
남자들이 성인비디오를 빌릴 때
자기의식을 조절해야 한다
심리테스트: 나는 남의 시선을 얼마나의식할까?
Theme 3 비교
비교만큼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은없다
비교만 안 해도 참 행복하다
시선과 비교를 동시에 느낄 때
심리테스트: 나의 샤이네스는?
Theme 4 상황
우리는 권위에 대단히약하다
역할이 사람을 바꾼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안 도와준다
사람이 많으면 원조행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심리테스트: 나는단조로운 삶이 싫다
Theme 5 뇌동
내키지 않아도 다수를따른다
믿었던 누구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다
Monkey see, monkey do
심리테스트: 나는 튀고 싶어 하는사람일까?
Theme 6 착각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운도 컨트롤할 수 있다
자존심은 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다
심리테스트: 나는 모라토리엄 인간일까?
Theme 7 감정
화를 내지 않고 살 수는없다
혐오는 혐오로 되돌아온다
기분만큼 관계를 좌우하는 것도 없다
심리테스트: 나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일까?
Theme 8 표시
할 말 안 하는 것이 관계를망친다
선물은 관계의 윤활유이다
억지로라도 웃어라
심리테스트: 나의 사교성은?
Theme 9 소통
갈등처리에는 소통만한 것이없다
사이 나쁜 부부일수록 자주 쳐다본다
거짓말은 몸을 보면 알 수 있다
심리테스트: 지금 고독하십니까?
Theme 10 공평
불공평감을 해소시켜야 관계가회복된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늘 인기가 높다
공평을 바라지만 남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심리테스트: 윗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한편일까?
Theme 11 수용
불행한 관계에 휘둘려 위축되지말라
결점을 받아들여라
누구의 애정도 영원하지 않다
누구라도 배신당할 수 있다
심리테스트: 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받아들일 수 있을까 ?
Theme 12 가치관
가치관이 없으면 관계는비틀거린다
가치관이 달라서 이혼하지는 않는다
가면을 벗어 던져라
심리테스트: 나는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있을까?
에필로그
관계의 심리학
Theme 1 인상
관계는 첫인상부터 시작된다
우리 모든 관계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만남 없는 관계란 있을 수 없고, 설사 있더라도 극히 드물다. 만남은 직접 얼굴을 마주한 대면적인 만남이 주류이지만 전화나 메일을 통한 만남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만남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첫 만남일 것이다. 첫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보통 첫 만남에서 형성된 인상을 좀체 바꾸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첫인상을 형성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쓸 수 있는 정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의 외모, 목소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럼에도 사람들은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 무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은 첫인상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얼굴 모습과 체격, 그리고 신장 등의 겉모습과 제스처, 말투라는 극히 제한된 정보로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판단해 버린다.
뚱뚱한 사람을 보면 낙천적이고 성격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먹는 것 하나 못 참는 절제 없는 사람으로 여겨 버리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른 사람을 보곤 지적이고 샤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얼마나 성질이 못됐으면 저 나이에 살도 제대로 찌지 못했냐면서 속 좁은 사람으로 쳐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란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잣대로 제멋대로 다른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한번 형성된 첫인상은 잘 바뀌지를 않고 계속 꼬리를 끌어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첫인상은 왜 바뀌기 어려운 것일까? 극히 제한된 정보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첫인상을 사람들은 왜 바꾸려 들지 않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첫인상이 바뀌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가설 검증 바이어스란 편견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군가의 첫인상을 형성하고 난 다음에는 자신이 내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내린 판단에 들어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받아들이더라도 쉽게 잊어버린다. 뚱뚱한 사람들은 절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뚱뚱한 사람들의 행동 가운데에서 자기의 생각에 부합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아예 무시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듭해 가면서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제멋대로 확신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심리학에서는 가설 검증 바이어스라 부른다.
이러한 가설 검증 바이어스는 첫인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에 차이가 있다는 혈액형 성격학이 들어맞는 듯이 여겨지는 주된 이유 역시 가설 검증 바이어스 때문이다. 혈액형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성격이나 행동만 의도적으로 수집되고, 또 그것들이 축적된 결과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믿게 된다. 가령 A형의 경우 내성적이고 소심하다는 것을 입증시켜 줄 수 있는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A형의 사람이 대범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행동뿐이다 보니 혈액형 성격학이 맞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의 성격 특성을 나타내는 5백 55개의 단어를 정리한 적이 있다. 5백 55개라는 숫자가 말해주듯이 사람의 성격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사람의 성격이란 때와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직장에서는 자상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집에서는 엄하디 엄한 아버지로 군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수줍어 말도 잘 못하던 친구가 친한 친구들끼리만 모였을 때는, 전혀 다른 대범함을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사람의 성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선입관에 의해 형성된 첫인상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는 상대의 성격을 극히 제한된 정보를 자기의 잣대로 재단하여 자기 마음대로 형성한 것이 첫인상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가설 검증 바이어스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결국 우리가 가설 검증 바이어스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첫인상에 쓸데없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교
비교만 안 해도 참 행복하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비교를 당하면 어느 한쪽은 상처를 입는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라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졌다. 생활이 팍팍하다 보니 외벌이로는 생활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맞벌이 부부가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결코 아닌 모양이다. 전업주부 가정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맞벌이 부부 가정에서는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맞벌이 부부들의 상당수가 부부간의 수입차이로 인해 불만이나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것은 전업주부 가정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13일 인크루트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맞벌이 직장인 5백 15명 중 부부간 수입차가 나는 4백 94명에게 “수입의 차이로 인한 불만이나 스트레스를 느낀 적이 있는가?”라고 질문해 보았다. 그 결과 전체의 15.4%가 ‘스트레스를 느낀 적이 있었다’라고 응답했다. 예상대로 남편의 수입이 시원찮은 경우가 문제가 되는 듯했다. 부인의 수입이 더 좋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응답한 남성은 24.3%로 전체의 4분의 1 수준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의 경우 자신이 남편보다 수입이 많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40.9%나 차지해, 남성보다도 오히려 더 높았다.
우리는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을 일부 속 좁은 남성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맞벌이 부부가 수입 차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 부부인 후지타 요시나가와 코이케 마리코의 케이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간이라도 양자가 비교가 되어 우열이 판명될 때,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나오키 상은 소설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단히 권위 있는 상이다. 1995년 후지타 부부는 이 상의 후보로 동시에 지명되었다. 엄정한 심사의 결과, 상은 부인인 코이케에게 돌아갔다. 코이케의 고백에 따르면 그 후 두 사람의 가정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고 한다. 누가 뭐라 하지는 않았더라도 자존심이 상처받을 대로 받아 자괴감에 빠진 남편, 먼저 상을 받았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부인, 이 둘이 꾸려가는 가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고통에 겨운 나머지 코이케는 별거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둘의 지옥 같았던 생활은 후지타가 2001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남편의 수상소식을 들은 코이케는 만세를 부르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고통에 겨운 생활을 보냈던 것은 남편인 후지타의 속이 좁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도 더더욱 아니다. 가령 후지타가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그는 부인의 수상을 진심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코이케 역시 자신의 수상을 남편에게 마음 놓고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가 소설가였고 나오키상 수상에 대단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긍정적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싶어 하고, 또 그 평가를 높이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이러한 자기평가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아 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면 자기평가는 높아지지만 반대의 경우는 낮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자기와 관여도가 높고 또 중요하다고 여기는 영역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 자신이 열등하다는 판단이 들면 자괴감과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 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월급의 차이를 능력의 차이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서로가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월급에서 차이 나는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과 늘 비교하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하다 보면 만족할 수가 없다. 만족하지 못하다 보면 행복감을 느낄 겨를이 없다.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금물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만 하지 않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진다.
상황
역할이 사람을 바꾼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평소 별볼 일 없었던 사람도 출세하면 확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대개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자리에 맞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받아들여 종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역할의 내면화가 이루어져 그 자리에 맞게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은 보는 쪽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기는 하다.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사전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보는 것이 얼마든지 재구성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출세한 자리가 주는 후광 때문에 사람 자체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출세하면 달라 보이는 것은 보는 쪽보다는 아무래도 자리에 앉은 당사자가 변했다는 데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할은 사람을 바꾼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짐바도(Zimbardo, P.)의 모의감옥 실험은 얼마 전 <익스페리먼트(Experiment)>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실험은 윤리적인 문제로 중도에 포기해야 할 만큼 쇼킹한 결과를 보여주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1년 실시된 실험의 정식 명칭은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짐바도가 당시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실험의 대상은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 온 일반인들이다. 하루 15달러의 보수를 받기로 하고 실험 참가를 희망한 75명의 일반인들은 우선 철저한 예비조사를 받아야 했다. 본인이나 가족이 반사회적 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는가,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는가 등이 면밀히 체크되었다. 실험이 실험인 만큼 평소 공격적이거나 굴종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예비조사였다.
조사 결과 심신이 안정되고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판단된 21명이 선발되었다. 이 21명을 제비뽑기로 분류하여 10명은 죄수, 11명은 교도관의 역할을 맡게 하였다. 성격에 따라 분류한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이 할당되었다. 분류가 끝난 후 피험자들에게는 연구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준비된 계약서에 서명을 한 후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죄수역을 맡은 피험자들은 경찰에 의해 정식으로 연행되었다. 물론 경찰은 사전 협조를 받았다. 집 근처에서 체포된 이들에게는 수갑이 채워졌다. 그리고 경찰서로 연행되어 일반 피의자들과 똑같은 취조를 받았다. 지문이 채취되고 나서 눈이 가려진 채로 대학 내의 모의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죄수복을 입어야 했다. 등과 가슴에는 죄수번호가 적혀 있었다. 한 방에 3명씩 수감된 채 24시간을 감방 안에서 지내야 했다. 특별히 주어진 일은 없었다. 감방에서 24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어찌 보면 상당히 편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한편, 교도관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하루 8시간씩 근무를 하게 되었다. 지휘는 짐바도 형무소장과 교도소장을 맡은 학부 학생들이 맡았다. 1일 3교대의 근무체제가 시행되었다. 교도관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각자 귀가하여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 되었다. 교도관들에게는 이러한 역할은 제비뽑기로 결정되었을 뿐이며 그들이 교도관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철저하게 주지되었다. 자신들이 교도관에 적합하기 때문에 교도관 역을 맡게 되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체벌이나 폭력은 철저히 금지되었지만 그 이외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은 주어지지 않았다. 죄수를 감시하는 역할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교도관들은 경찰봉과 호루라기를 지녔고 복장은 카키색의 교도관복을 착용했다. 죄수는 앞에서 말했듯이 등과 가슴에 번호가 새겨진 줄무늬 죄수복을 입었다. 그리고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죄수들에 대한 호칭은 이름이 아니라 101호, 103호라는 식의 번호가 대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와 교도관의 행동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역할의 내면화가 시작된 것이다. 우선 말투에 차이가 드러났다. 교도관들에게는 명령조의 말이 입에 배었다. 반면 죄수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어투가 되었다. 또한 교도관들은 금지된 체벌 대신 말로 죄수를 모욕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반항적인 태도는 물론 일상적인 질문이나 농담 따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곧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죄수들은 그저 그냥 있는 게 상책이라는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교도관들의 행동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공격적으로 변해 갔다. 식사를 제공하는 그들의 의무조차도 무슨 선심이나 쓰는 듯이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교도관들은 그들이 맡은 역할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교대시간에 늦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교대하는 팀에서 가장 공격적인 사람이 리더의 역할을 맡는 것이 관찰되었다.
실험 이틀째가 되자 죄수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10명 가운데 5명이 흐느껴 울거나 분노를 폭발시켰다. 우울증 등의 병적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도 나왔다. 증세가 심각한 5명은 이틀째에 석방시켰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은 치료를 요할 정도의 심인성 발진 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이 실험은 6일째에 중지되었다. 피험자들의 역할내면화가 예상외로 심각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죄수들의 아이덴티티 상실이다. 죄수들은 번호로만 불렸다.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갖고 있는 이름 = 아이덴티티’라는 등식이 완전히 깨짐으로써 죄수들은 무기력해졌던 것이다. 두 번째로 교도관들의 무제한적인 권력행사이다. 교도관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식사나 세면 등 자기들의 일조차도 큰 권력이라도 되는 양 착각했다. 가령 식사를 주는 것조차도 죄수들이 얌전하게 있었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세 번째로는 복종과 무기력이다. 이처럼 교도관들의 무제한적인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죄수는 복종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학습성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학습성 무력감이란 자신의 힘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전혀 해결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설사 해결을 시도하더라도 그 반응 속도가 지극히 늦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상태에 빠지면 감정적 균형이 무너져 위기에 대처하려는 의욕도 없고 불안과 우울이 감정을 지배한다.
이처럼 역할은 사람을 바꾼다. 어찌 보면 역할에 따라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도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가정에서는 아빠나 엄마의 역할, 본가에 가면 아들이나 딸의 역할, 친구 사이에는 친한 동년배로서의 역할, 회사에서는 성실한 직장인의 역할, 학교에 가면 열성 있는 학부모의 역할……. 우리는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아무런 문제 없이 수행해내고 있다.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가 미리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썼던 가면을 말한다. 우리는 역할에 따라 변하는 것을 능숙하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역할에 따라 변하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동료나 주위 사람이 출세한 모습을 보면, “출세하더니 사람 달라졌는데”하며 빈정댄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아냥거릴 일이 전혀 아니다. 당신도 출세하면 마찬가지 모습을 보여줄 터이니까 말이다. 역할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만 알아두어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상당량을 줄일 수 있다. 역할 때문에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면 종전과는 다른 관계로 업그레이드하기도 쉬울 것이다.
표시
할 말 안 하는 것이 관계를 망친다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 회사 그만두어야지.”라는 말이 입에 밴 사람이 있다. “이제는 죽어도 같이 못 살아. 이혼해야지.”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죽어도 사표 못 쓰고 이혼 못 한다. 입으로는 불평불만이지만 나름대로 직장생활, 결혼생활 잘해 나가는 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사표를 내거나 이혼하겠다는 말을 해도 “또 시작이군.”이라고 생각하며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무서운 것은 평소에는 아무런 불평불만이 없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거나 이혼하자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앞서 말한 사람들과는 달리 한번 말을 뱉으면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혼한다. 이런 사람들이 사표를 내거나 이혼하자는 말을 하면, 당하는 상사나 배우자는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아무런 불만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 맡은 바를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상사나 배우자는 이런 사람들의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왔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의외의 돌연한 사표, 이혼이라는 사태를 마주하게 되면 우선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돌연한 사직이나 이혼을 감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자기표출적(非自己表出的, non-assertive) 타입이 많다. 이 타입의 사람들은 보통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고 묵묵히 지낸다. 불만이 있어도 참고, 좋은 일이 있어도 별다른 표시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이런 타입의 사람들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더구나 이 타입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들어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요구를 하면 무리해서라도 거기에 응하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생겨나기 마련인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란 간사한 구석이 있어, 좋은 사람을 존중해주고 아끼기보다는 이용해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잘해주면 우습게 보려 드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탓에 비자기표출적 인간에게 사람들은 요구나 부탁을 많이 한다. 상사는 일도 자주, 그리고 많이 시킨다. 상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사건건 토를 다는 부하직원보다는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 주는 이러한 타입의 부하직원이 일을 시키기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자기표출적 직원에게 일이 많이 몰리고, 그만큼 야근을 할 경우도 많아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우가 거듭되면 볼멘소리를 하기 마련이지만 이 타입의 직원들은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해낸다.
비자기표출적인 배우자를 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결혼생활을 해 가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제멋대로 하는 방식이 통용되는 경우는 없다. 비자기표출적 타입의 인간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표출되지 않는 불만은 가슴속에 쌓이고 있다. 이것이 어느 날 갑자기 무엇인가를 계기로 폭발할 때가 온다. 당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것이 폭발하는 순간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인 것이다.
물론 비자기표출적 사람들이 불만을 전혀 표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표시하는 방식이 간접적인 경우가 많아 주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가벼운 농담이나 푸념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아 주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듣는 입장의 사람들과는 달리 가벼운 농담이나 푸념으로 자기의 불만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돌려서 불만을 이야기했을 뿐 자기의 불만을 다 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만을 상대방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사람 가운데에는 이러한 타입과는 정반대인 공격적 타입이 있다. 다른 사람의 요구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만을 강요하는 인간형이다. 또한 제3의 타입으로 자기표출적(assertive) 타입이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이나 요구도 중요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그것들도 중요시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많지는 않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정에는 공격적 타입과 비자기표출적 타입으로 넘쳐난다. 이것이 우리나라 이혼율 급증에 일조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공격적 타입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한마디
나도 중요하지만 상대방 역시 중요하다. 상대방이 당신의 욕구를 들어주는 것은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의견을 지금같이 무시하고 내 요구만을 강조하다 보면 늘그막에 험한 꼴 본다.
- 비자기표출적 타입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한마디
상대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상대방에게 지금보다 덜 신경 써 주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잘해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조금 덜 해주는 만큼 자기에게도 신경을 쓰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자기의 의견이나 불만을 의식적으로라도 자주 표현하는 습관을 들여 자기표출적 인간으로 변신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식의 불만표시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공평
불공평감을 해소시켜야 관계가 회복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정하다”라든지 “공정하지 않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 재판은 공정하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의 채점방식은 공정했다”, “그 거래는 공정하다”라는 식으로 사회적인 사건이나 행동을 평가할 때, 공정하다는 말이 특히 자주 사용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공정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나 관계에서 공정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예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가 공정하다고 판단되면 안도하고 만족한다. 반대로 무엇인가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분노하고 좌절한다. 어찌 보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먼 사회적인 사건에조차 이러한 식의 반응을 보여주는 우리들이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고, 자기의 금전적?심리적 이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관계의 공정성에 우리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관계에서 공정성은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관계를 헝클어뜨리는 부정적인 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말은 관계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공정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그 관계가 더 밀접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모두가 공정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나 불만을 느끼게 되고 심한 경우는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이 결과, 관계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불공정함을 해소하려 한다. 불공평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많아질수록 이들의 불만은 종래까지 관계를 끌어온 룰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트러블의 씨앗이 되어 관계가 파탄 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사실, 관계에서는 공정이라는 말보다는 공평이란 말이 더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것은, 관계에는 주고받는다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고받는다는 것이 금전적이나 물질적인 것에 한하지는 않는다. 관계에서는 호의, 애정과 같은 감정을 주고받는 식의 심리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에서는 우리가 상대에게 쏟는 노력이나 정성, 성의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 없이는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통 투입량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투입을 하면서 상대에 대해 자기의 투입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거나 보여주기를 바라기 마련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식으로 상대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산출량이라고 한다. 양자의 관계에서 나의 투입량은 상대의 산출량이 되고, 나의 산출량은 상대의 투입량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나의 산출량을 투입량으로 나눈 것이 다른 사람들의 산출량을 그 사람의 투입량으로 나눈 것과 비슷할 때 공평감을 느낀다. 여기에 차이가 있을 때, 어느 쪽은 불공평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그 관계에 금이 가기 쉽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불공평감을 느끼고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하려 한다. 우선 자기가 투입량을 줄인다. 가령 회사라면 일을 덜한다든지 정시에 퇴근을 해버리는 식으로 회사에 대한 기여도를 낮추어 버리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에서라면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덜하는 식으로 불공평감을 해소하려 든다. 만나는 횟수를 줄인다든지 전화나 이메일과 같은 소통의 횟수를 줄이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불공평감이 해소된다면 관계는 그런대로 유지되어 간다. 문제는 불공평감이 해소되지 않을 때이다. 보통 관계에서는 이쪽에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시해주지 않는 한, 상대가 사소한 변화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눈치 없이 굴다 관계가 파국 단계에 이르러서야 돌연한 관계의 청산이니 이별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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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서 누군가가 불공평감을 느낀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불공평감을 상대가 이야기할 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기가 쉽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에서 공평감을 가장 중요시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관계가 공평해야 한다는 것을 관계를 이루어가기 위한 최저의 룰로 생각한다. 공평함이란 제대로 된 관계의 최저 마지노선이다. 이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하면서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해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보상받는 것이 통용되는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먼저 양보하고 상대를 배려해갈 때,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된다. 양보는 양보를 부르고, 배려는 배려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