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값의 비밀

   
양정무
ǻ
매일경제신문사
   
20000
2013�� 03��



■ 책 소개
그림과 돈의 상관관계, 그림값에 대한궁금증을 풀어주는 책! 

어떤 면에서그림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가장 고고하고 심미안적 예술인 동시에 현대의 강력한 세속적이며 절대적 수단인 ‘돈’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주의사회 속에서 미술이 차지하는 역할, 다시 말해미술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무기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화가와 컬렉터를 연결해 주는 그림 상인, 즉 아트 딜러의 원초적 본능을 잡아내면서그림값이 결정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그리고 아트 페어의 역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작업에 몰두해야 했던 미켈란젤로, 개인 파산과거듭되는 가혹한 불행 속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던 렘브란트 등 화가와 그림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 저자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서양 미술사와 미술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서양 미술의 발전을 상업주의와 연결시킨 연구를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미술과 사회의 접점을 흥미롭게 풀어낸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저서로는 『상인과 미술』『시간이 정지된 박물관,피렌체』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신미술사』『그리스 미술』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그림은 두 번 태어난다 &
01 예술의 자본화, 혹은 자본의 예술화 
02 미술과 소비의 탄생 
03미술 시장의 탄생, 미술품 거래가의 역사 
04 딜러(Dealer)의 시대 
05 슈퍼 딜러에서 나카마까지, 아트 딜러의 세계
06 중세 아트 딜러의 손익계산표 
07 아트 페어, 미술에 장터가 처음 열린 날 
08 중세 기업인의 미술 사랑, 조토의‘아레나 예배당’ 
09 미술을 살린 돈, 미술을 죽인 돈 
10 중세 사업가의 자린고비 미술 사랑 
11 피렌체, 상인들이만든 미의 제국 
12 그림 속으로 들어가 출세한 돈 이야기 
13 현대 미술의 설계자 코지모 데 메디치 
14 머니의 예술적환생, 게티 vs. 메디치 
15 미술 후원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두 개의 메디치 도서관 
16 현대 미술의 작품 가격 생성 원리
17 황금을 이긴 화가의 필력 
* 그림 면적과 그림 가격, 한국 미술 시장의 중세성 
18 기적의 서양 미술 
19기업가형 예술가 또는 예술가형 기업가 
20 방황하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21 몰락한 집안의 가장, 미켈란젤로 
22‘하우스 푸어’ 렘브란트의 인생유전 
23 셀프 마케팅의 귀재 루벤스 
24 그림값을 결정하는 요소 
25 좋은 작가 감별법

참고문헌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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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값의 비밀


예술의 자본화, 혹은 자본의 예술화

부자가 되는 꿈을 그려 볼 때 돈 다발 가득 들어간 그림이 당신 앞에 놓여 있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앤디 워홀이 그린 <1달러 지폐 200장> 같은 그림이 앞에 놓여 있으면 꿈이 더 잘 이뤄지진 않을까?


고작 1달러짜리 소액권으로는 큰 부자가 되는 영감을 얻기에 약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그림의 실제 판매가는 4,300만 달러, 한화 약 480억 원이다.


어떻게 1달러 지폐 그림이 이렇게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될 수 있었을까? 정확하게 말하면 이는 화가가 직접 그린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1달러 지폐를 그림으로 그린 후 전문 판화가에게 의뢰해 찍어낸 것에 불과하니 작가가 그다지 공력을 들인 것도 아니다. 혹자는 주식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의 진정한 꽃은 미술이라고 본다.


단순히 돈만 그려 냈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설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워홀의 돈 다발 그림은 시장경제 체계에서 미술의 본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줬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술을 통해 삶의 일상을 초월하는 무엇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워홀은 예술도 여전히 삶의 그것처럼 자본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이 선언한 미술의 자본화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위력이 점점 더 가속화되는 것 같다. 미술계의 시장 종속화는 날로 심해지면서 예술성은 오직 화폐가치로만 판단되는 실정이다. 좋은 그림은 언젠가는 제값을 받을 것이라는 오래된 신념은 점차 힘을 잃고, 대신 ‘비싸게 팔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본말전도가 일상화되고 있다.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작가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작가들은 점점 더 조급하게 시장만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시장경제가 도래한 이후 자본이 미술에 끼치는 막대한 영향을 고려한다면 워홀의 돈 그림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의 주장대로 근대 역사에서 미술이 자본을 떠나 고귀하게 존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워홀의 직설적인 주장과는 달리 미술과 돈의 관계도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접점을 갖고 다채롭게 변화했다.



미술 시장의 탄생, 미술품 거래가의 역사

세상에서 제일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 현재(2012년 2월)까지는 파블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이다. 이 그림은 2010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640만 달러, 한화 약 1,200억 원에 낙찰되었다. 비공식적인 개인 거래에는 이보다 두 배 이상의 작품도 있다고 하지만, 세계 미술 경매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거래된 작품 중 이 가격을 넘어서는 예는 아직 없다.


미국 뉴욕대학교의 지안핑 메이와 마이클 모제스 교수는 1955년부터 2006년까지 50년간 미국 내 미술 경매에서 반복적으로 거래된 미술품의 가격 변동을 지수로 정리해 발표한 바 있다. 메이와 모제스 교수가 만든 표를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은 가격만으로 따진다면 대단한 호황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메이-모제스 미술지수를 보고 있노라니 “역사상 미술 가격이 이처럼 상승 곡선을 그렸을 때가 언제였을까?” 하는 질문도 든다. 일반적으로 미술사학자들은 17세기 네덜란드를 미술 시장의 역사적 호황기라고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는 다르다. 실상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미술 가격 상승기가 있었다. 14세기 중반이 바로 그 시기다. 이때 가격 상승과 양적 팽창이 동시에 일어나는 미술 거래의 현대적 패턴이 최초로 발생한 시기였던 것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미술 가격 급상승은 사실 경제 호황이 아니라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벌어졌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염병으로 일컬어지는 흑사병이 그 원인이었다. 1348년 흑사병이 온 유럽에 창궐하면서 불어닥친 위기 속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살되자, 사람들은 더 절박하게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불황과 혼란 속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구매해 교회에 자기 이름으로 기증하려 했다. 이에 따라 미술 시장 수요가 갑작스럽게 몰린다. 당연히 미술 가격도 급상승하게 되었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오르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지만 중세 미술 가격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다시 안정을 찾아 나간다. 이제 값싼 미술품의 유통이 시작된 것이다. 흑사병 이후 미술품 수요자가 사회 각 계층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대대적으로 값싼 그림이 유행했다. 결과적으로 가격이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즉, 흑사병 시대에 들어서면 중소상인이나 노동자, 농부, 가난한 과부조차도 미술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기념을 기획한 것이다. 이들은 저렴한 가격의 소품을 구매했다. 바야흐로 위기 상황 속에서 미술품의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술 시장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4세기 미술 가격의 변화 그래프는 오늘날의 미술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실 이 시기의 미술 구매는 오늘날처럼 특정 스타작가로 몰리지 않았다. 미술 가격은 철저히 재료비와 노동력을 기준으로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조정되었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의 법칙을 보다 잘 따른 순수의 시대였다 평할 수 있다.



딜러(Dealer)의 시대

미술 작품을 살 때 딜러에게 돌아가는 몫은 얼마일까? 법으로 명시된 바는 없지만 관례적으로 5 대 5의 비율이 유지된다. 100을 팔면 50은 작가에게, 나머지 50은 딜러에게 간다는 논리다. 시가 1,000만 원짜리 작품을 팔면 500만 원, 1억 원짜리 작품을 팔면 5,000만 원이 딜러의 몫이다. 간혹 6 대 4, 또는 4 대 6으로 배분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 대 딜러의 수익분배 원칙은 전 세계적으로 5 대 5가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딜러의 역할을 빼놓고 현대 미술을 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구 미술 시장에서 작품의 질은 판매자의 판단과 신용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누구에게서 사는가의 문제가 누구의 작품을 사는 것만큼 중요해지고 있다.


같은 피카소의 작품도 브랜드가 확실한 딜러에게서 산 작품이 훗날 더 좋은 가격으로 재판매될 수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딜러에게서 작품을 사면 그 가격이 보장될 수 있다는 오래된 업계의 신뢰가 미술 시장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다. 일단 시장에서 신뢰를 얻은 딜러들에게 막대한 수요가 몰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미술 시장에서 신뢰받는 업자가 곧 좋은 딜러다. 그러나 그 자격 조건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작가들을 자신의 수하에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 소위 그 딜러만을 통해야 살 수 있는 이른바 킬러 상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유명한 작가는 돈으로 유혹해서라도 경쟁업체에서 빼앗아야 하고, 젊은 작가들도 꾸준히 만나면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황금의 눈과 덧붙여 마음에 드는 작가나 작품은 입도선매할 수 있는 무적의 황금 지갑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겠다. 또 고급 고객들과 오랫동안 정서적 교감을 지속시킬 정도의 신용과 매너,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내려 준 축복까지 갖춰야 비로소 현대 미술 시장 속에서 신묘한 마술을 부릴 수 있는 아트 딜러로 탄생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누가 세계 미술 시장의 전형적인 아트 딜러가 될 수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중년의 호남형 백인 남성’을 일단 성공한 아트 딜러의 근사치로 잡아 볼 수 있다. 사실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아트 딜러로 손꼽히는 래리 가고시안이 바로 그 같은 카테고리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경우다.


가고시안은 1945년생으로 아직 60대 중반이다. 그는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으로 캘리포니아주 LA에서 성장했다. 물론 시작부터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월세 70달러를 내고 15달러짜리 포스터를 파는 영세 미술 상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에 11개의 지점을 두고, 77명의 유명작가를 거느리면서 연간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세계 최고의 아트 딜러다.


가고시안은 탈세 혐의와 냉혈한 사업 수완으로 명성만큼 비난도 받는다. 쏟아지는 질투와 비난을 잠재울 만한 그의 강점이라면 일단 자기가 판매한 작품의 가격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업계의 신뢰 덕분에 그의 손을 거치면 작품의 가격은 수직 상승하기 마련이다. 1∼2만 달러 정도 하던 작품도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나면 곧장 수백 배 오르는 것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술을 살린 돈, 미술을 죽인 돈

미술에 대한 엽기적 사랑을 말할 때 일본인 백만장자 사이토 료에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태어나 1996년 눈을 감았는데, 그의 마지막 삶은 여러모로 세계 미술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이토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 다이쇼와제지의 회장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는 1990년 5월 뉴욕에서 연이어 열린 미술 경매에서 돈키호테 같은 미술품 구매로 순식간에 해외 뉴스를 독점했다. 당시 그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구매한다. 이 가격은 추정가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기록적인 낙찰가로 당시 세계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앞서 고흐 작품의 최고 경매가는 1987년 소더비 경매에서 <아이리스>가 기록한 5,890만 달러였는데, 사이토는 종전 기록을 크게 눌러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이토는 이틀 후에 열린 소더비 경매장에서도 또다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소더비 경매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갖기 위해 무려 7,810만 달러를 불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댕의 청동 조각 <칼레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429만 달러라는 거금을 썼다. 미술품 서너 점 사자고 단 이틀 만에 1억 6,5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린 것이다. 그가 이때 보여 준 화끈한 미술 쇼핑은 오늘날까지도 미술계의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엄청난 재력으로 세계 미술 시장을 뒤흔들었던 사이토는 이듬해인 1991년에 또다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경악이나 분노라는 말이 더 정확할 성 싶다. ‘고흐와 르누아르의 두 그림을 자기가 죽거든 관에 넣어 함께 화장하고 싶다’는 그의 유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사이토의 이 같은 엽기적인 발언은 세계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자신과 고흐의 작품을 함께 화장시키겠다’는 사이토의 망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전 세계에서 물 끓듯 끓어 올랐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그 작품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서둘러 해명했다.


사이토의 사망 이후 경영난에 빠진 그의 회사는 결국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각각 4,400만 달러, 5,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급히 매각한다. 고흐의 경우 원금 대비 절반, 르누아르는 2/3밖에 건지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사이토의 망언 덕분에 전 세계인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유명 그림이 되어 버렸다.


사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매각된 후에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행여나 이 그림이 사이토와 함께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게 아닌가 하며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아마도 이 그림이 세상에 다시 나온다면 상당한 뉴스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황금을 이긴 화가의 필력

오늘날에는 작가의 명성이나 능력을 과도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미술의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작가 개인의 가치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림 가격을 매길 때 그림에 들어간 금은보화 장식 같은 호화로운 재료의 가치가 화가의 노고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때가 분명 오랫동안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그림 가격의 기준이 재료비나 인건비 같은 제작비가 먼저였고, 작가의 명성을 돈으로 쳐주는 ‘제작비+α’ 개념이 미술품 가격에 들어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부터 그림 가격을 매길 때 화가의 능력을 재료비보다 더 쳐 주게 되었을까? 미술사학자들은 이 흥미로운 질문의 실마리를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다. 15세기 초에만 해도 그림 가격의 상당 부분을 재료비가 차지했다. 금박으로 호화롭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황금이 소요되었고, 청금석으로 만든 파란색 안료인 울트라마린 같은 고가의 안료에도 많은 돈이 투여되었다.


총액 대비 대략 40% 이상의 높은 비용이 황금과 고급 안료를 마련하는 데 쓰였다. 당시 그림들 대부분은 나무판 위에 그려졌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에 알맞은 나무와 크기, 나무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수들이 해야 할 일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호화로운 프레임도 필수였다. 따라서 목공 작업에도 상당한 돈이 들어갔다.

결국 중세 이래로 화가에게 돌아가는 몫은 대략 그림 가격에서 20∼30% 정도에 불과했다. 그림 가격에서 화가의 몫이 적었을 뿐 아니라 화가의 가치가 오늘날의 일당 개념처럼 일한 날짜로 정확하게 계산되거나, 그림의 크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화가의 보수는 냉정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5세기가 끝나갈 무렵 상황은 달라진다. 화가에게 돌아가는 몫이 더 커지는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화가들이 고객들하고 체결한 ‘계약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계약서를 보면 분명 화가의 몫이 비약적으로 커진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계약서에 제작 과정에서 반드시 화가 스스로가 그려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강조된다. 조수를 시키면서 감독만 하지 말고 재능을 가진 화가가 직접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구가 커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경에 금박을 입히지 말고 풍경을 그려 달라는 주문도 나온다. 이제 황금이나 보석으로 치장한 그림은 점점 더 촌스럽게 되고, 화가의 필력이 살아난 그림이 가치를 인정받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사실 ‘개성의 시대’가 서구 근대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서구사회는 개인의 차별화된 능력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림 가격을 매길 때에도 화가의 재능을 강조하는데, 이와 동시에 화가들 사이에서 기량을 나누고 봉급도 차등해서 지불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화가의 능력을 중요시하면서 화가들의 능력을 구별 짓는 새로운 경쟁 구조가 함께 싹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미술의 세계가 화려함과 경쟁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역사의 무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몰락한 집안의 가장,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제대로 한 번이라도 보고 나면 미술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미술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곳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 그림은 스케일에서부터 남다르다. 폭 14미터, 길이는 자그마치 41미터에 달한다. 천장 벽면만 따져도 500평방미터고, 주변부까지 합치면 1,000평방미터 규모다.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초대형 화폭인 셈이다.


이렇게 엄청난 미술을 탄생시킬 때 미켈란젤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작업대에 올랐을까? 일견 그림만 놓고 보면 미켈란젤로는 일상적 삶에서도 대단히 고상한 정신을 가진 학자풍 인물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막상 그의 개인사를 추적하다 보면 대단히 당혹스럽고 모순되는 개성을 만나게 된다.


사실 미켈란젤로의 미학을 말할 때 ‘공포감을 줄 정도의 극한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테리빌리타(terribilita)’라는 용어를 자주 쓰게 된다. 이 말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지칭하는 데에도 아주 꼭 맞아떨어진다. 그야말로 그는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다혈질적 성격은 시스티나 성당 작업 때도 수시로 폭발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에게 돈이 들어갈 일은 별로 없었지만 식구들의 돈 문제로 항상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사실 5형제 중에서 유일한 소득원은 미켈란젤로뿐이었다. 미켈란젤로가 평생토록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금전적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면 애처롭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 왜 그렇게 미켈란젤로가 돈 문제로 고객들과 수시로 다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 금전 문제에서도 열정적이었고, 그 만큼 돈 계산을 할 때에는 아주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작품을 거래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특히 약속한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짐을 싸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돈 때문에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린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교황의 예배당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화가로서 얼마나 큰 영광이자 기회인지, 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분명 이 시기 가족들과의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금전적인 이유도 그가 작업대에 오르게 된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집안 문제로 골머리를 썩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고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코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것이 보다 진실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닐까? 다만 예술가들은 부채를 자산으로 만들 듯 이러한 일상적 번민을 예술로 한 단계 승화시키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 주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셀프 마케팅의 귀재 루벤스

누군가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뽑아 보라면 아마도 사람들마다 의견이 갈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미술가를 선정하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한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다. 1577년 태어난 그는 1640년 유명을 달리하는데, 일생 부와 명성을 쥔 명실상부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라 할 수 있다.


루벤스는 위대한 미술가 명단에도 당당히 이름을 내밀 만한 재능 넘치는 작가였지만, 그의 이름은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한 미술가 명단 속에서 더 환하게 빛을 발할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루벤스는 이미 미술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현세의 부와 명예를 호화롭게 누렸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상업주의 미술의 작동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예견한다.


루벤스는 화가면서도 자기 매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섬유, 건축, 파티 인테리어 등 자기의 재능이 발휘될 만한 장이라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참여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던 판화뿐 아니라 책의 표지 디자인 같은 일급 화가가 맡아서 하기에는 다소 허접해 보이는 일거리조차도 서슴없이 받아 처리했다. 판화나 책 디자인을 통해 자기의 이름을 세상 방방곡곡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루벤스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벤스가 화가로서 성공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의 효율적인 작업방식에 있었다. 그는 여러 화가들을 고용해 각각 자신의 기량에 맞는 부분을 그리도록 했다. 자신이 스케치를 그리면 그것을 옮기는 작가, 얼굴만 그리는 작가, 옷을 그리는 작가, 장신구를 그리는 작가, 배경만을 그려넣는 작가 등 각각의 단계를 달리해 그림을 체계적으로 그려 나갔다.


그림을 그릴 때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이미 중세 때부터 일반화되었지만, 루벤스의 경우 이러한 중세 도제식 공방 운영을 공장식으로 확대시켜 적용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그는 작업의 단계를 보다 세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재능을 파악해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그림을 단계별로 수준 높게 완성시켜 나간 것이다. 물론 마지막 단계에서 루벤스가 자신의 서명을 멋들어지게 집어넣으면 이렇게 완성된 그림도 모두 그의 지휘·감독 하에 나온 루벤스의 작품이 되었다.


한편 유럽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자그마한 그림을 발견하면 반드시 발길을 멈춰야 한다. 휘갈겨 놓은 듯한 작은 소품의 그림이지만 바로 여기에 루벤스의 대가적 숨결을 비로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벤스의 화가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스케치를 통해 나타난다. 스케치만큼은 루벤스 자신이 직접 그렸는데, 손바닥 만한 밑바탕용 그림이지만 꿈틀거리는 필력이 넘쳐흐른다.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그의 강렬한 필력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그의 타고난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루벤스의 진정한 장점은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인 명예와 부로 정확히 거래해 낼 줄 아는 비즈니스적 능력을 함께 갖췄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 재능과 경영 능력을 결합시킬 줄 알았던 영리한 작가라는 점에서 그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예술가의 성공의 법칙을 앞당겨 실현시킨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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