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위대한 철학자 34명의 지혜를 엿보는 하루 3분!
혼자 끙끙대지 말고 철학에게 물어라!
저자인 오시로 신야는 꼭 알아두어야 할 ‘위대한 철학자’ 34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이들의 핵심 사상을 한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명료하게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철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기존의 해설서와 비슷하지만, 저자는 각 철학자들의 ‘캐리커처’와 핵심 사상을 알기 쉽게 보여주는 ‘그림’을 더함으로써 다른 책들과 차별점을 두었다.
철학자들의 캐리커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현재와 너무 멀어서 ‘현실감’을 갖기 힘든 기원전 철학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자명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양한 색상과 표정의 캐리커처들은 철학 책이 딱딱하다는 편견을 없애준다. 또한 각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단한 그림으로 정리해주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핵심 요약 노트’도 제공해준다. 이 ‘핵심 요약 노트’만 알고 있어도 도대체 이 철학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게 된다.
■ 저자 오시로 신야
195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릿쿄 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각슈인 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 기독교학회, 일본 영국철학회 회원이다. 현재 오키나와 현에 거주하며 류큐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펴낸 책으로는 『도해 잡학 구조주의』 『줄거리와 해설로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책』 등이 있다.
■ 역자 박현미
고려대 일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려대 교양 일본어 강사와 한국해양연구소, 세종연구소 등에서 번역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옮긴 책으로는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청춘의 문』 『행복하게 일하는 연습』 등이 있다.
■ 감수 오가와 히토시
1970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교토 대학 법학부와 나고야 시립대학 대학원 박사 후기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쿠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토 대학 졸업 후 종합상사에 입사했지만 퇴사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나고야 시청에 들어갔다. 시청에 근무하면서도 인문과학에 관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색적인 철학자다.
지금까지 펴낸 책으로는 『철학자의 뇌를 훔쳐라』 『심야 라디오』 『청춘을 위한 철학 에세이』 『철학 용어 사전』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왜 문과생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가? 피타고라스
진정한 자신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어떤 사랑의 형태가 가장 행복한가? 플라톤
영화나 만화에 푹 빠지는 이유는 뭘까? 아리스토텔레스
‘시각을 전환하라’ 제1장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한 철학자: 기인 디오게네스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인생
출세하면 좋은가? 에피쿠로스
인생에 목적이란 게 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모르는 사람이나 사물을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의 규칙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회사가 중요한가, 사원이 중요한가? 윌리엄 오컴
‘시각을 전환하라’ 제2장
이름을 남기지 못한 철학자: 중세의 여성 신비주의자들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부담감은 왜 느끼지? 마르틴 루터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가? 프랜시스 베이컨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토머스 홉스
의심하는 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르네 데카르트
왜 일을 해야만 하나? 존 로크
부자만이 이득을 보지는 않는다? 장 자크 루소
제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가? 이마누엘 칸트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건 옳지 않은가? 제러미 벤담
왜 관심이 여기저기로 분산되는가? 프리드리히 헤겔
술을 마시건 담배를 피우건 내 맘이야 존 스튜어트 밀
‘시각을 전환하라’ 제3장
표면에 드러난 것만 중요한가?: 성별로 생각하는 정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윤리
자신답다는 건 무엇인가? 변화는 좋은 것인가? 찰스 다윈
유혹에 굴복당하는 이유는? 쇠렌 키르케고르
우리가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카를 마르크스
멋진 인생,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있는 걸까? 프리드리히 니체
왜 가족에게 얽매이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낯선 사람과 있으면 불안해지는 이유는 뭘까? 마르틴 하이데거
미신에 잘 속는 이유는? 카를 포퍼
계획대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장 폴 사르트르
남자와 여자는 왜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에마뉘엘 레비나스
다수의 사람들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걸까? 존 롤스
발상의 전환은 과연 가능한가? 토머스 쿤
자신답다는 건 과연 존재하는가? 미셸 푸코
마음을 몰라준다는 말은 투정인가? 위르겐 하버마스
‘시각을 전환하라’ 제4장
철학과 역사의 주인공은 서양인가?: 서양과 동양의 구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해야 하는가?
한눈에 알 수 있는 철학 연표
선하게 산다는 건?: 맺음말을 대신하며
3분 철학
출세하면 좋은가? 에피쿠로스
일로 성공했다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출세하고 싶다, 능력을 발휘해서 인정받고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맡고 싶다, 괴로울 때도 있겠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일을 잘해서 칭찬을 받으면 오히려 귀찮기만 하지 좋을 것 하나도 없다, 출세를 하거나 부자가 돼서 일과 돈에 매몰되기보다는 개인적인 행복을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 것 같나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한 철학자가 에피쿠로스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행복해지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필요 없다, 당신을 칭찬하는 사람은 앞에서는 찬사를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신을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으니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삶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의미까지 포함해 은둔해서 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다시 말해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휘둘린 인생을 살지 말라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서 일하고 타인에게 좌지우지되는 것보다는 자기 개인의 평온함이 중요하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현대인들이라면 충분히 공감이 갈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시의 시대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독립된 도시 국가였는데, 정치에 관여하고 폴리스를 발전시키는 것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폴리스는 독립성을 잃었고, 사람들은 고국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여하기가 힘들어졌고, 개인의 삶이 철학의 새로운 주제가 됐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그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현대는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고국은 있지만 폴리스처럼 크기가 아담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현대 국가는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한 개인이 영향을 끼치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특출한 영웅이 아닌 한 국가를 위해 산다는 감각을 느끼기가 힘든데, 바로 이 점이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헬레니즘 시대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정치나 사회 정세보다 자기 개인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행복이란 타인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평온한 것이라고 말하면 상당히 안이한 생각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에피쿠로스는 타인을 전부 거부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개최한 아카데미 안에서 마음이 맞는 제자나 친구들과 즐겁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 쓴 나머지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르고 실현을 장담할 수 없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 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줍니다.
인생에 목적이란 게 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람은 운명에 거스르지 않으며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 집안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났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왜 남자(혹은 여자)일까? 처한 시대와 지역이 달랐다면…… 이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운명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혹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요? 만약 운명이란 게 무의미하다면 당신은 허무함을 느끼나요? 아니면 그 말에 납득이 가나요?
에피쿠로스라면 이런 문제에 골머리를 썩는 것보다 현실을 사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편이 현명하다고 말하겠지요. 에피쿠로스는 인생에 의미 따위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 속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대를 사는 것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피쿠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토아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 대답은 정반대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숨어서 살라고 하고, 공직에 취임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철저하게 개인적인 삶을 살기를 권장했습니다. 그에 반해서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폴리스가 붕괴된 이후의 시대를 살았지만 우주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보고 모든 사람들을 동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도우면서 각자 주어진 운명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고 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생각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됩니다.
삶의 목적을 세계의 의미와 일치시키면 고뇌와 번민도 사라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의 마지막 시대를 산 철학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로마 황제였습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지만 그런 위치 때문에 고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주어진 운명에 견디고 버텨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서술돼 있습니다.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 세계가 존재하는 데에는 우리가 모르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감정은 각양각색이어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그건 우리가 이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야 하는 목적을 세계의 의미와 일치시킨다면 설령 지금 당장 괴롭더라도 그건 필요한 고통이라고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세계의 의미와 일치하는 부분이란 이성을 가리킵니다. 인생의 목적이란 이성에 따라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려면 변덕 부리는 감정에 좌우돼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서 이성 이외의 불순물을 퇴치하면 삶에 동반된 온갖 괴로움과 번뇌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 하나하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는 에피쿠로스와 비슷하지만 교리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당신은 이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회사가 중요한가, 사원이 중요한가? 윌리엄 오컴
진정으로 실재하는 건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사원이 다섯 명인 회사가 있다고 칩시다. 우리 눈에 비친 건 다섯 명의 사원들이지만 다른 회사와 거래하고 계약하는 건 개개의 사원이 아니라 회사입니다. 평범한 손님의 경우 사원 다섯 명 중 누군가로부터 상품을 샀어도 그 사원 개인한테서 산 것이 아니라 회사한테서 샀다고 생각하겠죠. 그럼 회사라는 건 실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실재하는 건 다섯 명의 사원뿐일까요?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둑이나 누렁이를 보고 우리는 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둑이나 누렁이가 아닌 그냥 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바둑이나 누렁이를 보고 "이건 개다"라고 말하는 건 단순한 약속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개 자체가 사실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걸까요? 다시 말해 진정한 실재란 무엇이냐는 얘기입니다.
중세유럽에서는 이런 문제에 관해 왕성한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이걸 보편논쟁이라고 합니다. 바둑이나 누렁이가 아닌 개 그 자체를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런 보편이 실재하느냐, 아니면 실재하는 건 각각의 개뿐이냐는 논의입니다. 모든 사물은 신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당시의 상식이어서 사람들은 바둑이나 누렁이뿐만 아니라 설계도와 같은 개 자체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건 개개의 물건일 뿐이고, 보편 따위는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컴입니다. 하지만 오컴은 신이 없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오컴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신앙)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데, 종교적 교리를 이성적으로 알고자 노력했던 당시 학문의 시각에서 보면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존재한다는 말이 가지는 애매함
보편논쟁은 근대의 과학적 사고를 만든 출발점 중 하나가 됐습니다. 근대 이후의 과학에서는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진정한 실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회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회적 습관은 과학적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회사에 있다고 했을 때의 이 있다(존재한다)의 의미도 애매합니다. 우리는 사무실이나 건물을 보고 회사가 있다고들 말하는데 건물이 회사는 아닙니다. 사원이 회사를 그만둬도 그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원 모두가 회사를 그만두면 그 회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오컴의 생각은 이런 있다(존재한다)고 하는 개념의 까다로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존엄성을 가진 인간보다 회사를 더 중요시하는 건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무심코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애매한 회사나 조직과 분명히 실재하는 사원을 비교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을 기준으로 선악을 따지기 전에 확실히 실재한다는 점에서 개개의 인간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토머스 홉스
우리가 세금을 내야 하는 건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왜 내 돈을 세금으로 걷어가는 거야! 이런 불만을 품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금을 뜯긴다고도 표현을 하는데, 올바르게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어쩐지 세금을 걷는 쪽에서 징세를 정당화하고, 걷히는 쪽에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것 같아서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왜 세금을 뜯겨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징세는 국가의 기본입니다. 세금을 걷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국가는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걸까요? 일본의 왕실도 그렇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기원을 국가를 다스리는 신들의 이야기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신화를 만들어 국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작업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한 철학자가 홉스였습니다. 그렇다면 홉스는 어떤 식으로 생각했을까요?
맨 처음엔 사람들이 흩어져서 살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아직 국가가 없으니 그 사람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닙니다. 세금도 걷을 수 없습니다. 법률도 없고 사람들은 모두 완전하게 자유롭습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산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홉스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라는 건 누가 어떤 일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자유니 서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늘 싸울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것이 국가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홉스는 말합니다.
국가가 없는 세계와 국가가 있는 세계 중 어느 쪽이 좋을까?
홉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봅시다. 사람들이 늘 투쟁하는 상태라면 아무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속을 해서 자신들의 자유를 누군가에게 위탁합니다. 그 결과 위탁받은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됐고, 사람들은 타인의 폭력에 노출될 위험성이 적어졌습니다. 이것이 왕의 시초고, 동시에 왕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집단, 즉 국가의 시작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룰을 깨뜨린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왕과 함께 룰을 깨뜨린 사람에게 제재를 가하겠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내놓은 대신에 안전을 손에 쥐게 됐습니다. 이런 생각은 역사적 사실을 추측하거나 검증해서 나온 건 아닙니다. 국가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신화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징적인 건 신화의 주인공이 왕이나 신들이 아니고 국가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을 때는 세금을 안 내도 여전히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금이 없으면 경찰이 활동하지 않아 범죄가 들끓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싸워야 하는 세상에 비하면 세금으로 안전을 사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 세계에 살고 싶습니까?
왜 일을 해야만 하나? 존 로크
소유라는 키워드에 착안한 로크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할까요? 동물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일한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일하는 것과 노는 건 어떻게 다를까요? 일반적으로 노동에는 돈을 버는 것, 사회에 공헌하는 것, 사회 속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만드는 것 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와 개인을 노동이라는 형태로 연결하는 이유는 뭘까요?
사람들이 약속을 통해 국가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사회계약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맨 처음 제시한 철학자는 홉스였습니다. 홉스의 생각에서는 애초에 사회가 없었기에 사회를 만들 이유가 필요했고, 홉스가 사회를 만든 이유는 서로의 폭력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사회계약론을 계승하면서 생각을 다르게 전개한 철학자가 로크입니다. 로크가 주목한 건 소유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소유란 누가 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가진다는 건 사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동물도 나뭇가지나 돌을 사용하지만 지금 사용하지 않는 나뭇가지나 돌을 누군가의 소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설령 지금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라도 그 땅의 소유자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땅은 그 소유자의 물건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어째서 이런 얘기가 통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설령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그 물건은 누군가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로크는 이런 생각의 근거가 뭔지 물었습니다.
일한다는 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물건을 소유하는 것
여기서 문제는 바로 일을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는 도움이 안 되는 물건도 있습니다. 이것이 소유를 생각할 때의 포인트입니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돌을 추로 이용할 때 돌은 당연히 도움이 되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내가 사용한 후에는 다른 사람도 그 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황무지로 예를 들면, 척박한 땅을 경작해서 밭을 일구면 그 밭은 경작한 사람이 당장 이용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로크는 노동이 소유의 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로크의 관심은 홉스와는 다른 사회계약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홉스가 말한 상호 폭력이 없더라도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누군가가 노동을 통해서 변형시킨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소유권을 인정하면 사회질서가 만들어지니 사회질서를 지켜서 아무도 약탈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약속해서 사회를 만들었다고 역설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경우 자기 돈으로 산 물건은 비록 당장 쓰지 않아도 자기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 돈은 자신의 돈이어야 하고, 돈이 자신의 돈인 이유는 스스로 일해서 번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크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물건을 소유합니다. 다시 말해 일한다는 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물건을 가진다는 의미가 되고, 이 생각은 현대 사회질서의 기본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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