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근존의 미국대통령 이야기 2

   
송근존
ǻ
글통
   
15000
2019�� 07��



■ 책 소개


왜 미국 대통령사를 읽는데 대한민국이 자꾸 보이지?


 <송근존의 미국대통령이야기1>에 뒤이은 후속작이다. 2권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 플랭클린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로널드 레이건. 이렇게 5명의 미국 대통령을 다루었다. 미국 정치사는 단순히 다른 나라의 역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 정치사는 우리의 현재를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신묘한 매력이 있다. 미국 대통령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에 얽힌 미국 정치사의 요점을 간추리다 보면 세계사의 흐름은 물론 오늘날 한국정치의 익숙한 풍경들 까지 눈에 들어온다.


■ 저자 송근존
Adobe Korea에서 사내변호사로 일하며 수년전부터 블로그에 미국사를 연재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오늘 벌어지는 무엇인가를 보면서 왜 이렇게 되었지? 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과거를 캐는 나쁜 버릇이 있다. 사회과학, 신학, 법을 공부하고 미국 로펌과 한국 로펌에서 일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Adobe Korea에서 일하고 있다.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Communications Management 전공. 서울대학교, 경기고등학교 졸업. 지은 책으로는 <송근존의 미국대통령이야기1> 이 있다.


■ 차례

1. 시어도어 루즈벨트
북부출신 아버지와 남부출신 어머니
그랜드 투어로 세상을 배우다
왜소한 하버드 대학생
아버지와의 이별
일곱 달 만의 청혼
스물 세 살, 뉴욕주의원
Manners maketh man
아내와 어머니를 한 번에 잃다
성장하는 개혁 정치인
목장 경영으로 시련을 달래다
서부를 차지하는 방법
열정이 적을 만들다
태프트와의 만남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꿈
법대로 합시다
전사가 되다
타협하는 법을 배우다
뉴욕에 부는 변화의 바람
부통령은 하기 싫어요
굴러 떨어진 대통령 자리
트러스트와의 전쟁
탄광 파업을 중재하다
공격은 강렬하게
상공부의 시작
공정거래(Square Deal)를 제창하다
파나마 운하
일본에 조선을 허하다
포츠머스 회담
언론으로 여론을 얻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 대응
후계자, 태프트
진보정치의 첫 단추를 끼운 사람


2. 우드로 윌슨
공화당의 분열과 민주당의 승리
우체국장을 임명하라
윌슨도 포기한 논공행상
정의로운 정부의 이상
민족자결주의의 뿌리
소득세를 도입하다
연방준비은행의 기초
세계대전과 아내의 죽음
엘렌은 나 때문에 죽었다
중간선거와 윌슨의 우울증
비공식 특사의 시작
백악관에서 시작된 연애 밀당
사랑과 전쟁
절실한 구애
마침내 전쟁의 길로
판초를 잡아라
매파와 비둘기파
민주주의를 위해 세상은 안전해야 합니다
민주당, 진보로 기울다
총 대신 펜으로 싸운다
우리는 자유의 위탁자
전쟁 이후를 기획하다
모든 전쟁을 끝낼, 최종 전쟁
전쟁의 참혹함
흑인, 전쟁에 참여하다
승전 그리고 패배
예언이 된 오보
외교전쟁의 서막
최고의 인기, 윌슨
거의 모든 수치가 짐작일 뿐
정상들의 감정 충돌
베르사이유 조약
묻혀버린 윌슨의 예언
윌슨, 연방정부를 확대하다


3.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공황, 공화당을 덮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뿐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은행
뉴딜의 시작
실업 문제에 직접 개입하다
사람을 좋아한 루즈벨트
막을 수 있었던 2차대전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다
소련을 인정하다
“살림살이 나아지셨나요?”
급진주의, 미국을 후려치다
케인즈의 총수요 이론을 활용하다
루즈벨트, 케인즈의 탈을 쓰다
“간단하게 준비하세요. 이해하기 쉽도록”
사회안전망의 도입
자본가들이 날 공격한다
연방대법원을 공격하다
루즈벨트 경기침체
나아지지 않는 경제
뉴딜은 과연 성공했는가?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기 전략
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
처칠에게 다가온 운명의 시간
야당을 내각에 끌어들이다
영국, 재정 지원을 호소하다
모두 군대 갑시다
일본에 견제구를 날리다
여론의 반걸음만 앞서 간다
민주주의의 무기고
플랜 독 (Plan Dog)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전쟁으로 가는 길
미국과 일본의 속내
진주만 공습과 작전권이양
싸우겠다는 의지
제2전선을 열어라
전세 역전
오버로드(OVERLORD) 작전
루즈벨트의 건강 악화
드골을 인정하기 싫었던 루즈벨트
지옥에나 가라
전쟁의 끝
얄타에서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다
대통령의 죽음
미국 리버럴의 아버지


4. 트루먼
루즈벨트의 사망 2시간 24분 후
미군, 소련군을 만나다
고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맨해튼 프로젝트
철의 장막이 시작되다
미국의 전후 보수화
일본 상륙작전
포츠담에서 원자탄을 고민하다
의회와의 전쟁
250번의 거부권 행사
노조와 트루먼의 대립
실수는 트루먼이다
냉전의 시작
마샬 국무장관
트루먼 독트린
미국을 괴롭힌 인종문제
냉전의 격화
공평한 딜(Square Deal)
반공정서의 확대
핵 경쟁의 심화
맥카시 열풍
김일성의 야망과 스탈린의 필요
중공군의 개입
맥아더를 해고 합시다
떠오르는 별, 아이젠하워
냉전의 고착
백악관을 탈환하라
트루먼, 냉전을 이끌다


5. 레이건
소련의 미인계
낙천적 소년
레이건, B급 영화를 찍다
텔레비전 덕분에 잘 된 남자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연설로 시작된 정치인생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다
닉슨 이후를 노리다
1980년 대선
보수의 시대
레이거노믹스
총 맞을 만 했네요
소련을 거칠게 다루다
롤백
다시 미국에 아침이 찾아왔다
따뜻한 보수주의자
고르바초프를 만나다
이란-콘트라 사건
냉전의 종결
대통령의 진정한 임무, 소통




송근존의 미국대통령 이야기 2


시어도어 루즈벨트

북부출신 아버지와 남부출신 어머니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Theodore Roosevelt, Jr.)는 1858년 10월 27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어도어 루즈벨트 시니어(Theodore Roosevelt, Sr.)는 뉴욕의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선조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루즈벨트 가문은 200년 동안 맨허튼에 거주했고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해 시어도어가 태어날 때는 뉴욕의 손꼽히는 부호였고 어머니 미티(Mittie Roosevelt) 역시 남부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시어도어는 이 집안의 둘째이자 첫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티디(Teedi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아버지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자선 사업을 중시했다. 그는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돌보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티디는 덩치도 크고 건장했던 아버지를 우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티디를 포함, 이 집안의 자녀들은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았다. 큰딸에게는 정신 질환이 있었고 티디 역시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특히, 천식이 심했다.


티디의 부모는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곤란에 처했다. 아버지는 북부출신, 어머니는 남부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시어도어는 공화당 지지자로 연방의 유지를 위해 연방 군대 입대를 원했지만, 처제들과 총칼을 겨누어야 하는 현실에 포기했다. 그는 대신 링컨 정부의 군인복지지원 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했다. 반면, 어머니 미티는 시어도어를 생각하여 드러내놓고 연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남편 몰래 연맹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집에서 만들어 보냈다.


왜소한 하버드 대학생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티디는 여전히 안경을 낀 왜소하고 불안한 모습의 청년이었고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노력으로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미루지 않고 미리 끝냈다. 루즈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태프는 “나는 어떤 일이든지 그처럼 일찍 끝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티디는 공부뿐만 아니라 체력 단련도 똑같은 열정으로 임했다. 그의 몸은 점점 강해졌고 어느 모임에서든 지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티디는 어느새 하버드에서 인기 있는 학생으로 바뀌었다.


Manners maketh man

1882년 1월 2일,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최연소 주의원으로 뉴욕주 의회에 등원했다. 루즈벨트는 처음 한동안은 침묵을 지키며 의회의 일상을 지켜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적수였던 민주당을 탐색하기 바빴다. 루즈벨트는 등원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정치인으로서 첫 시험대에 올랐다. 부패한 주 대법원 판사 웨스트부르크의 비리를 폭로하며 탄핵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자 반대파 의원들은 각종 핑계를 대며 조사위 구성을 막으려 했다. 결국 루즈벨트는 의회에서의 첫 대결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뉴욕 정치의 샛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즈벨트의 명성은 순식간에 뉴욕에 퍼져나갔다. 이듬해 11월 재선거에서 루즈벨트는 더 많은 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1883년 1월, 뉴욕 주의회가 구성되었을 때, 공화당 의원은 그를 최연소 원내 대표로 선출했다. 이 시절 그의 연설은 독설로 가득했고 너무나 독선적인 자세로 의원들에게 명망을 잃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료 의원들은 그를 멀리했고 그는 점점 고독해졌다. 나중에 루즈벨트는 교만에 찼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현실감을 잃었다. 동료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뭔가 주고받음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뉴욕에 부는 변화의 바람

1899년 1월 2일. 루즈벨트의 주지사 취임식이 있었다. 언론은 “주지사 취임식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인 적은 처음이다.”라며 뉴욕 주민들이 루즈벨트에게 거는 기대를 표현했다. 루즈벨트는 이전 주지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300~400통의 편지를 읽고 필요한 서신에 대해서는 답신을 준비했다. 그의 사무실은 10시에 열렸는데, 이후부터는 거의 분단위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의 사무실은 5시에 문을 닫았지만, 그는 저녁 7시까지 남아 각종 업무를 처리했다.


뉴욕주에서는 기업이 철도, 전화, 전선 사업 등을 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런 사업권은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주정부는 이러한 영업권 부여에 상응하는 세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정치 보스들이 기업에 영업권을 부여해주는 대신 기업이 알아서 정치 보스가 지원하는 후보에게 정치 자금을 기부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배경을 알지 못했던 루즈벨트는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얻어가면서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민주당의 존 포드(John Ford)의원이 제출한 프랜차이즈 세금 징수 법안을 지지하기로 했다. 루즈벨트가 포드 법안을 지지한다는 소식에 플랫 등 뉴욕의 정치 보스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포드 법안을 지지했고 법안은 주의회를 통과했다.


루즈벨트는 포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뜻이 전혀 없음을 명확히 했지만, 정치 보스의 협력 없이는 세법이 통과되기 어렵다는 현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세율의 결정을 주정부가 아닌 지역단위 정부에서 정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하는 등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결국 보스들은 루즈벨트의 타협안을 받아들여 포드 법안은 통과되었다.


굴러 떨어진 대통령 자리

갑자기 대통령 자리에 오른 루즈벨트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과연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지, 그의 지나친 개혁적 성향이 미국을 다시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지는 않을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는 충격에 빠진 국민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선을 그가 매킨리 정부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킨리가 임명했던 장관들에게도 사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취임 후, 그의 열정과 현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주변의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대화하는 중에 그에게 빠져들었고 군중은 그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루즈벨트는 백악관에서도 늘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관료회의가 없는 날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그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정오가 지나면 사무실은 일반인들에게 열렸다. 루즈벨트에게 매료되었던 수많은 국민들이 그를 직접 보기 위해 백악관을 찾아왔다. 그는 사무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고충과 의견을 들었다.


공정거래(Square Deal)를 제창하다

1903년 4월 1일. 루즈벨트는 기차로 미국 횡단에 나섰다. 뉴욕의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보통 사람과의 호흡이 편했던 루즈벨트는 22,000km가 넘는 긴 장정을 통해 미국 구석구석에 있는 국민을 만났다. 루즈벨트는 이 여정 중에 자신의 국내 정치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공정거래(Square Deal)라는 구호를 시험해 보았다.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 구호는 금세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루즈벨트는 이 여정을 통해 옐로스톤, 오세미티 및 그랜드캐년 등 서부의 웅장한 자연을 접하기도 했다. 그랜드캐년에 이른 루즈벨트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광경에 감명 받았고, 그랜드캐년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902년에 통과된 개간법(The Reclamation Act)으로 서부 곳곳에 새 농지의 개간을 위한 수로 건설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이렇게 농지가 마련되면 미국인들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개간에 나설 수 있었다.


진보정치의 첫 단추를 끼운 사람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총명한 아이였지만, 건강이 부실하여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운동으로 철인이 되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와 첫 아내를 거듭 잃었지만,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일에 매진하며 슬픔을 극복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공화당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는 이후 윌슨과 프랭클린 루즈벨트로 이어지는 진보 대통령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금수저였지만,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언론과 여론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여론을 조성하는 데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특히 이 당시 미국의 진보적 인사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독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스마르크의 개혁으로 약진하는 독일의 모습을 보며 루즈벨트는 이를 그의 정치 철학을 받아들여 “위대한 미국”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이런 면에서는 그는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렇듯,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맡게 된 미국 대통령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끊임없는 독서와 연구로 스스로 모든 정책의 전문가가 되었고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도 군대의 용감한 장교처럼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그는 이후 20세기의 미국 정치를 좌파로 기울게 한 진보정치의 첫 단추를 끼우기도 했다.


트루먼

미군, 소련군을 만나다

1945년 4월 12일.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날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미국 제9군이 베를린에서 80km 정도 떨어진 엘베강에 이르렀다. 반면, 소련군대는 비엔나를 포위하고 동쪽으로부터 베를린으로 향했다. 1945년 4월 25일. 엘베 강 유역에 있는 토르가우 시에서 드디어 미군과 소련군이 조우했다. 5일 후,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고 일주일 후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힘든 전쟁을 마친 두 나라 군대는 전우애를 다지며 서로 축하해주기보다는 마치 외계인을 조우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미국과 소련은 닮은꼴이었다. 두 국가 모두 혁명을 통해 탄생했다. 두 국가 모두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이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국가의 역사와 이념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은 150년 전에 혁명과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 이렇게 탄생한 국가는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고 정부의 개입이 적을수록 개인과 국가의 삶이 윤택해진다고 생각했다. 반면, 소련은 불과 25년 전 자본주의로 인한 계급 갈등을 없애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세워졌다. 소련은 미국과 반대로 정부의 계획과 분배를 통한 과도기적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공산주의 국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 두 국가와 전쟁을 벌였고 약 3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 본토는 주요 전쟁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민간과 국토의 파괴는 거의 없었다. 반면, 소련은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련 인구 2천 7백만이 사망했다.

노조와 트루먼의 대립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노동 운동의 변화는 크게 구조적인 원인과 정치적인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한동안 급격하게 성장했던 중공업 분야는 점차 성장 속도가 떨어졌다. 전후 미국의 경제는 서비스 업종이 급증했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산업에 분산되어 공장 노동자와 같은 조직화가 쉽지 않았다. 또한, 전후 기업의 입김이 거세지고 사회적으로 반공 열기가 심해지면서 노동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기 어려웠다.


트루먼은 민주당의 진보적인 인사로 과거 정치 활동에서도 주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1946년 노동 시위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트루먼 정부와 노조 지도자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특히 3월에는 석탄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가 전국적인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에 트루먼은 더 화가 났다. 트루먼은 광부의 파업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철도 파업은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했다. 철도 사업은 미국 물류의 핵심으로 철도 파업은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루먼은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노조 지도부에 협상안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 그러니 이들은 트루먼의 설득에도 파업에 돌입했다. 화가 난 트루먼은 자신이 당장 연방 의사당을 찾아가 노조 시위 가담자를 가제로 징집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했다. 이어 트루먼은 노동 시위를 단죄하는 연설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지는 노조 시위에 피로감이 쌓인 의원들도 대통령의 요청에 박수를 보냈다. 이때 트루먼의 노동 정책 참모로부터 노조가 협상안을 받아들였다는 전보가 전해졌다. 트루먼은 즉시 의원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트루먼은 노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미국을 괴롭힌 인종문제

1947년 11월, 클리포드, 제임스 로우 등 트루먼의 핵심 참모들은 1948년 재선 전략을 담은 43쪽 분량의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트루먼이 민주당의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다면 1948년 선거에서 과거 루즈벨트와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핵심지지층은 블루칼라 노동자, 흑인, 유대인 및 기타 소수 인종, 농민 및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특히 민주당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흑인과 유대인 지지층의 동원이 중요하다고 했다.


트루먼 정부 당시만 해도 아직 민주당 내의 흑인의 영향력은 미비했지만, 트루먼 정부는 최초로 흑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정부였다. 보고서는 흑인을 위한 고용 평등, 린칭의 불법화 및 연방정부의 흑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트루먼 정부는 인권을 위한 과감한 법안을 제시했지만, 그렇다고 트루먼이 당장 행동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대에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대통령령을 선포하겠다고 했고 이어 법안을 상정하겠다고 했지만, 법안은 이전과 같이 상원의 필리버스터로 통과가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에 포기했고 대통령령도 선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 문제는 미국 사회는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계속 갈등이 이어졌던 문제였다. 트루먼은 흑인 문제뿐만 아니라 유대인 문제로도 갈등을 겪었다. 미국의 유대인은 흑인보다 훨씬 적은 5백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촘촘한 사회안전망과 부를 가지고 있어 선거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핵 경쟁의 심화

트루먼 정부는 소련 문제로도 다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1949년 8월 말, 중국의 공산화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련의 핵 개발과 중국의 공산화로 트루먼 정부가 전 세계 공산화를 막기 위해 단순히 경제적 지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한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미국 내 반공 세력은 트루먼 정부가 전 세계의 공산화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비판했다.


소련의 핵 개발은 그 자체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소련은 이미 핵 개발을 위한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반공 여론은 소련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만 핵무기를 개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미국 정부 안에 있는 소련의 스파이가 핵 개발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몰래 빼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강한 반공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 정부는 1950년 초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핵무기보다 훨씬 강력한 수소 폭탄 개발은 핵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과학자 사이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핵 개발에 참여했던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 대학 총장도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했다. 그는 도덕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며 수소폭탄은 그 정도를 훨씬 넘는 무기이고 미국이 이미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수소폭탄까지 개발할 필요는 없다고 비난했다. 반면, 미국의 유엔 대표로 지명되었던 엘러노어 루즈벨트는 수소폭탄 개발에 찬성했다. 이렇게 국론 분열 상태에서 트루먼은 1월 31일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트루먼, 냉전을 이끌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국가 자리에 올랐다. 미국은 전례 없는 제국이 되었지만, 그 규모만큼이나 독특한 제국이었다. 오래된 역사, 문화와 혈통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가치와 이념을 기반으로 한 국가로 이제 또 다른 이념으로 세워진 소련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나섰다. 트루먼은 루즈벨트 정부의 정책 방향을 이어가려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점차 보수적으로 변해갔다. 국민들은 대공황 당시와 같이 연방정부의 각종 실험에 더 이상 호응하지 않았고 소련과의 냉전으로 사회분위기도 안보와 안정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루즈벨트의 등장과 함께 미국의 신주류가 된 아이비리그 출신 리버럴들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루즈벨트가 이루지 못한 진보 정책을 이루겠다는 리버럴의 의지는 더 강해졌다. 트루먼 이후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출신으로 드디어 백악관을 탈환했지만, 그는 중도 성향으로 루즈벨트 정보의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


레이건

낙천적 소년

레이건은 어린 시절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존 에드워드 레이건(John Edward Reagan)은 1883년에 태어났다. 아일랜드 가톨릭 출신으로 원래 이름이 오레이건(ORegan)이었는데,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차별을 받던 시절이어서 성을 레이건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들에게도 재능을 물려준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는데, 술을 좋아하여 매일 술을 마셨다. 어머니 넬 클라이드 윌슨 레이건(Nelle Clyde Wilson Reagan)은 스코들랜드 장로교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도 가지 못했고 1908년에 결혼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형 니일(Neil)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잭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일 술에 취해 살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레이건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 넬의 신앙심 때문이었다. 넬은 매주 자녀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고 자녀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레이건은 성장기에 문학과 연극을 즐겼다. 그는 책과 연극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고 살면서 자신의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을 극복했다. 무엇보다 레이건은 형 니일과 달리 낙천적인 인물이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레이건은 어린 시절에 대해 긍정적인 추억만 간직했다.


레이건, B급 영화를 찍다

레이건은 대학을 졸업한 후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다. 그의 묵직하고 편안한 목소리는 라디오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그는 라디오에서 스포츠 중계를 했었는데, 4년 동안 시카고 컵스 경기를 중계했다. 라디오 중계는 괜찮은 벌이였지만, 레이건은 배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 라디오 방송국에서 함께 근무했던 조이 호지(Joy Hodges)가 할리우드로 진출했을 때였고, 조이는 레이건을 자신의 매니저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레이건은 워너브러더스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1937년부터 워너브러더스의 영화에 출연했다.


레이건은 워너브라더스에서 15년간 일하며 41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는 A급 영화배우는 못 되었지만, B급 영화에는 자주 출연했다. 레이건은 2차 세계 대전 때, 잭 워너가 지휘했던 육군의 연예부대에서 일했다. 1945년 9월 제대 후 레이건은 할리우드에 복귀했지만, 인기는 예전만 못했다.


텔레비전 덕분에 잘 된 남자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새로 시작된 텔레비전 시대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54년 GE사가 텔레비전 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했다. 레이건은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출연도 했다.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레이건은 반공주의 리버럴이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마친 1962년에는 완전히 보수주의자로 바뀌어있었다.


레이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뿐만 아니라, 전국의 GE 직원을 만나며 기업 홍보를 했다. 그는 1년에 12주간 전국의 GE사를 다녔는데, 이 과정을 통해 정치 연습을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배웠고 연설과 토론을 준비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갔다.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다

1964년의 인상 깊은 연설로 레이건은 일약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노려보기로 했다. 레이건은 아직 출마를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기회가 있을 대마다 자신의 정치 철학을 말했다. 이런 레이건을 보며 에반스와 노박(Rowland Evans and Robert Novak)과 같은 보수주의 지식인들이 레이건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어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도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1966년이 되자, 레이건은 출마할 여건이 충분히 성숙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유권자들의 출마 요구에 부응하는 답변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다니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그의 연설은 많은 사람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 결국 레이건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다른 유력 후보를 크게 따돌리고 승리했다.


보수의 시대

레이건의 당선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백악관을 주도했던 민주당 리버럴 시대가 막을 내렸다. 막강했던 리버럴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데에는 이들과 대항한 보수의 역할이 컸다. 미국의 보수 운동은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이에크와 같은 오스트리아 학파는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리버럴의 정부 주도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분야에서도 보수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보수주의를 소개하며 이를 기반으로 미국의 보수주의 이론을 정립해나갔다. 여기에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는 내셔널 리뷰라는 보수 잡지를 만들어 보수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따뜻한 보수주의자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하자 워싱턴 사람들은 그의 성공 비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민들은 레이건이 실수를 하더라도 결코 그에게 악의는 없다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제1기에 이은 경제 개혁을 계속하며 소득세 개혁을 단행했다. 1986년 개정 세법으로 14개나 되었던 소득 구간을 3개로 줄였고 최상위 소득세율을 개인은 28%, 법인은 34%로 줄였다. 레인건은 소득세율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6백만 명의 저소득층이 아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도록 했고 근로소득공제를 확대했다. 레이건은 1986년에 이민법에 서명하여 3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합법화했다. 레이건은 보수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레이건이 이렇듯 다양한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유의 설득력 때문이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국민과 의회를 설득했고, 다양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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