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소설 사임당

   
이순원
ǻ
노란잠수함
   
16000
2017�� 01��



■ 책 소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본연’의 사임당을 그리다

 

강원도의 대표 작가이자 동인문학상부터 최근의 동리문학상까지 다수의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이순원이 문헌을 뒤지고 강릉 산천을 직접 걸으며 밝혀낸 사실들로 사임당의 삶을 재조명한다.

 

《정본 소설 사임당》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증언이며 동시에 사임당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아내, 어머니, 며느리이기 이전에 자신을 귀하게 여긴 현명한 여인이자 예인으로 남은 주체적인 여성, 사임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모양처, 교육의 어머니, 군국의 어머니 등 시대의 요구에 따라 500년이 넘게 왜곡되어 온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언급되는 여성은 흔치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과연, 얼마만큼 진실인가? 소설가 이순원이 가장 정확하고 바르게 사임당을 되살린다.

 

■ 저자 이순원
저자 이순원은 1957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가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낮달」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 《은비령》으로 현대문학상, 《그대 정동진에 가면》으로 한무숙문학상, 「아비의 잠」으로 이효석문학상, 《얘들아 단오가자》로 허균문학작가상, 「푸른 모래의 시간」으로 남촌문학상, 《나무》로 녹색문학상, 《삿포로의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밖에도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말을 찾아서》 《순수》 《19세》 《첫사랑》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첫눈》 《워낭》 《고래바위》 등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으로 양심과 영혼을 일깨워 온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로 많은 작품들이 초․중․고 전과정 교과서에 실려 있다.

 

■ 차례
작가의 말: 정사를 바탕으로 이야기할수록
점점 더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가는 사임당 이야기

 

삼가 말씀드립니다
오죽헌의 주인들
선비들의 무고한 죽음
이 사람 이행
신명화와 오죽헌의 큰 어른
그림 속에서 만난 스승
벼슬을 마다하는 아버지
하늘을 감동시킨 어머니의 기도
제 당호는 사임당입니다
아버지는 길 위에서 돌아가시고
놋쟁반에 포도를 그린 뜻은
당신이 공부하지 않으면 저는 중이 됩니다
셋째 아들 율곡이 태어나다
이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율곡에 대한 외할머니의 믿음
대관령을 넘으며
개고기 주서 이팽수, 개고기 독사 진복창
화석정과 경포대에 소년이 남긴 시와 부
진사시험에 장원한 소년
우리가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어머니의 그림을 보는 두 가지 눈길
《동계만록》속의 어머니와 서모 이야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다

 

부록: 소설 속의 사임당과 율곡 관련 연표




사임당


삼가 말씀드립니다

시생의 이름은 우.


본관은 덕수, 자는 계헌, 호는 옥산이며 아버지 사헌부 감찰 이원수 공과 어머니 사임당의 막내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형님 세 분과 누님 세 분이 계십니다. 이 분들 가운데 저와 큰형님을 빼곤 모두 강릉 북평촌 검은 대숲집에서 나고, 저는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났습니다.


자식 가운데 다섯째인 율곡 형님은 이미 당대에 중국에까지,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다음 후대에 세상의 어머니로 이름을 얻으셨지만 내 학문과 삶은 위의 두 형님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빼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큰형님과 둘째 형님은 과거 시험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과장에 나갔지만 아직 생원진사과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10년 후 제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입니다. 그때 큰형님은 서른여덟, 둘째 형님은 서른하나, 셋째 형님은 스물여섯 살이었지만, 이제 막 약관의 나이가 된 저까지 네 아들 가운데 어느 자식도 공부만 할 뿐 아직 관직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만 셋째 형님이 스물한 살 때 진사과 복시에 장원을 했으며, 스물세 살 때 한양에서 치른 별시에 또 한 번 장원을 했습니다.


이렇듯 셋째 형님 말고는 형제들 모두 부모님 살아 계실적에 자식으로 학문으로나 벼슬길의 관직으로나 무얼 하나 이루어 보여 드린 게 없는 것이 특히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도 우리 자식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로부터 어머니의 생애와 저희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죽헌의 주인들

강릉 북평촌 바로 앞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게 바다가 아닌가 여길 만큼 커다란 호수가 동쪽으로 바다와 둑 하나 사이로 붙어 있었다. 강릉으로 걸음하는 시인 묵객들이 일부러라도 꼭 한 번 들러 자신의 정취를 남기고 떠나는 경포호수였다.


호수 서쪽에 있는 참판댁은 북평촌에서 가장 큰 집으로 강릉대호부 전체로 보아도 손에 꼽을만한 집 가운데 하나였다.


검은 대숲에 둘러싸여 있는 이 집을 처음 지은 사람은 최치운이었다. 조선 건국 후 과거에 급제해 세종 때 집현전 학사를 거쳐 이조 참판과 세자(문종)의 학문을 가르치는 우빈객을 지냈다.


최치운이 이곳 북평촌에 집을 지은 것은 언젠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였다. 그러나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소망처럼 이곳에 와 살지 못했다. 평소 술을 좋아해 임금까지 친서를 내려 그의 술을 경계했던 최치운은 오십이 되던 해 이조참판으로 재직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술탈이 나듯 세상을 떠났다. 본가를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북평촌에 새로 지은 이 집을 둘째 아들 최응현에게 물려주었다.


이 집의 세 번째 주인이 된 이사온은 이 집과 집 앞의 호수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66명을 뽑는 생원시에 3등으로 입격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과거 시험에도 벼슬길에도 나가지 않고 강릉 북평촌으로 와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집에서 살았다. 후일 여러 기록에 용인이씨로 불리는 사임당의 어머니가 바로 생운 이사온의 외동딸이었다.



그림 속에서 만난 스승

서울에서 세 차례나 대사헌을 지내고 삼조의 참판을 지낸 외증조할아버지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가져온 많은 서책과 서화집이 뒷사랑 서고에 있었다. 그 서고는 북평촌 검은 대숲집의 어린 딸들에게는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보물 창고이자 꿈의 궁전과 같은 것이었다. 해가 바뀌어 인선은 다섯 살이 되자 세 살 위의 언니와 함께 매일 사랑에 나가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공부에 새로 재미를 붙인 인선은 오후가 되면 서고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안견과 안견의 모사 화첩을 펼쳐 놓고 처음부터 습자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집안의 커다란 유기 쟁반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그림 공부를 했다.


인선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여덟 살이 된 다음 눈 녹은 봄에 서울에서 아버지 신명화가 왔다.


거의 일 년 만에 서울에서 내려와 사랑방에 마주 앉은 장인 이사온이 보여 준 어린 딸의 그림을 보고 신명화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외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누군가의 그림을 모범 삼아 따라 그렸다 하더라도 누가 보든 그것은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의 그림이 아니었다.


아이의 재주에 대해서는 장인뿐 아니라 부인 이씨의 말도 그랬다.


"책으로 공부를 할 때도 그렇지만, 그냥 무슨 물건 하나를 봐도 그걸 아주 골똘히 살펴봐요. 그리고는 사랑에 계시는 외할아버지가 난을 치는 그림과는 다르게 봉숭아도 그리고 맨드라미도 그리고, 거기에 날아드는 벌, 나비만이 아니라 메뚜기며 반딧불이 같은 풀벌레도 즐겨 그리곤 한답니다. 그중에 포도 그림은 아버님까지 놀랄 정도로 그려내는 걸요."



제 당호는 사임당입니다

신명화는 그동안 아버지로서 늘 엄한 모습을 보였어도 어느 딸보다 둘째 인선의 총명함과 재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혼자 하루에도 몇 번 이런저런 사정을 짐작해보는 신명화의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 나타났다. 신랑감의 이름은 이난수(이원수의 처음 이름).


사주가 오가고 길일을 잡아 유월 스무날 혼례 날이 정해졌다. 혼인을 위해 파주에서 길라잡이와 기러기아범을 앞세운 신랑 일행이 강릉도호부 바로 위의 첫 역인 구산역에 와서 짐을 풀었다는 기별이 왔다. 그날 밤 북평촌의 검은 대숲집 사랑에 신명화와 둘째 딸 인선이 마주 앉았다.


"소녀가 이제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혼례를 앞두고 앞으로 쓸 당호(堂號)를 지었사옵니다."

"그래. 어른이 되면 여자도 자가 필요하고 호가 필요하지. 당호라 하면 네가 혼인하여 거처하는 곳의 이름이기도 하고,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네가 받들고 세울 삶의 어떤 뜻이기도 할 텐데, 그래 그 당호를 어떻게 지었느냐?"

"사임당이라 하였사옵니다."

"사임이라. 어떤 뜻을 가진 말이냐."

"저는 이제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배필을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면 곧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나라를 창건하고 기틀을 닦으신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제 마음속에 스승으로 여겨 받들고자 합니다."


인선은 자리에 일어나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놋쟁반에 포도를 그린 뜻은

사임당이 탄 가마가 서울 시댁 대문 앞에 도착하자 신랑 집 하님들이 가마를 잠시 멈추게 하고 대문 양옆에 짚불을 피우고 가마가 그 위를 넘어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제까지 오는 길에 만나거나 따라왔을지 모를 잡귀를 쫓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서울 집에는 또 한 차례 잔치가 벌어졌다. 강릉에서 새색시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이원수의 친구들이 사랑 가득 모여들었다.


그날 사랑에 모인 친구들 모두 이원수의 부인이 그냥 언문 정도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 따로 학문을 했다는 말에 놀랐다. 《명심보감》이나 《내훈》을 읽는 것도 당시 어느 집안의 여자로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한문으로 쓰여진 《내훈》과 《삼강행실도》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을까 고심 끝에 언해본을 간행하고 있었다. 지금 임금 대에 들어와서도 나라에서 《삼강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 편을 언해본으로 무려 3천 질이나 간행하여 전국에 배포했지만, 어느 집도 여자들은 따로 글공부를 하지 않아 누가 옆에서 말로 그림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언해본을 읽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어디 자네 처 솜씨 한 번 구경하세. 우리가 부인을 이 자리로 불러 모실 수 없으니 학문이야 따로 확인할 재간이 없는 거고, 신행 온 부인의 그림 한 점 이 방으로 넣어 달라고 하게."


한 사람이 제안하자 여러 사람이 부추기듯 동의하고 나섰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원수로서도 참 난감한 일이었다. 자신이 먼저 꺼낸 말도 아니고, 또 일부러 자랑하기 위해 한 말도 아니지만, 결국엔 자랑처럼 되어버리고 말아 좀 무례한 부분이 있어도 친구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먹을 갈며 사임당은 강릉 북평촌 서고에서 화선지 대신 놋쟁반 위에 산수화와 수묵 포도화를 연습하던 때를 떠올렸다.


잠시 후 시댁 종이 놋쟁반을 들고 왔다. 그래, 서방님 친구들에게 내가 가진 부족한 재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처럼 무언가 아쉽고 모자란 마음으로 그리자. 사임당은 붓을 들어 먹을 듬뿍 찍은 다음 익숙한 솜씨로 쟁반 위에 덩굴째 익어 가는 포도를 그려 나갔다.


남편이 내준 화선지에 그리지 않고 놋쟁반에 그린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면 황망 간에 잘 그리지도 못한 그림을 누군가 분명 가져갈 것이고(가져가 아무개 부인이 그린 거라고 소문을 낼 것이고), 당장 지금 사랑에 모인 남편 친구들 모두 남편에게 자신에게도 한 장 그려 줄 것을 부탁할 것이다. 사람 좋은 남편은 또 그게 무슨 자랑이나 되듯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할 게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일이었다.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의 그림 솜씨에 놀라면서도 희색이 만면한데 정작 사임당 본인은 남편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한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려 내보내기는 했지만, 남편을 위해 잘했다는 생각보다는 마음 한구석에 왠지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당신이 공부하지 않으면 저는 중이 됩니다

사임당은 서울로 신행을 가던 해 가을에 큰아들 선을 낳고 이태가 지나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남편과 함께 다시 강릉 북평촌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강릉에 온 다음 남편은 더구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여기 강릉 향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내키지 않으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 어머님 옆으로 가십시오. 서울에 가셔서 예전에 공부하시던 곳을 찾아가 다시 공부하십시오. 부디 서방님이 그러길 어머님도 기다리고 계시고,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약속하고 며칠 후 이원수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메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날 밤, 이원수는 가던 길 중간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임당으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미 돌아온 남편을 어쩔 수 없었다.


며칠 후 다시 타일러 길을 떠나보냈지만, 이번에도 다음 날 돌아오고 말았다. 발길을 돌린 것도 지난번에서 조금 더 간 대관령 산 미 아래 가마골의 길손 집에서였다.


"나는 도저히 당신 곁을 떠나 있지 못하겠소. 이렇게 억지로 서울로 간다 한들 가서 공부도 안 될 것 같고, 당신이 보고 싶어 금방 돌아오고 말 것 같소. 그래서 서울에 가서 돌아오느니 가던 길에 다시 돌아온 것이오."


사임당은 윗목 자수틀 옆에 놓인 반짇고리를 옆으로 당겨 놓고, 쪽을 진 머리를 풀어 어깨 앞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저는 예전에 아버님이 서방님을 제 배필로 정해주실 때 서방님의 너그럽고 유하신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너그럽고 유함이 어느 결에 서방님의 나약함으로 변했습니다."

"이런 서방님을 아이와 제가 어찌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런 서방님을 모시고 어찌 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저는 이제 이것으로 머리를 자르고 산으로 가서 중이 되겠습니다."

"내가 잘못했소. 내 다시 날이 밝으면 떠나겠소. 떠나서 학문으로 꼭 성공한 다음 돌아오겠소."


이원수는 날이 밝기 전 다시 서울로 공부 길을 떠났다.



셋째 아들 율곡이 태어나다

사임당은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남편을 위해 북평촌 친정에서 나와 대관령 너머 봉평 백옥포리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사임당이 봉평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는 동안 거기에 또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원수와 사임당 사이에 아들 둘 딸 둘을 낳고, 다섯 번째 자식으로 율곡을 낳기 바로 전의 일이었다.


서울에 올라가 공부를 하던 이원수는 어느 날 문득 아내가 보고 싶었다. 이원수는 공부를 하다말고 무엇엔가 이끌리듯 급히 괴나리봇짐을 꾸려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봉평으로 길을 떠났다.


한편으로 그때 사임당 역시 봉평 백옥포리 집에 있다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강릉 북평촌으로 어머니를 보러 갔다. 친정에 머물러 있던 어느 날 사임당은 잠을 뒤채이던 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 사임당은 북평촌 집에서 나와 호수를 지나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속에서 한 선녀가 물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선녀의 가슴 앞에 백옥같이 흰 옥동자가 안겨 있는 것이었다.


사임당은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그 아기를 저에게 줄 수 없는지요? 하고 선녀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천사가 물 위로 고요하고도 사뿐히 걸어 나와 품에 안은 아이를 사임당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 주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사임당은 데리고 온 아이들을 그대로 친정에 둔 채 늘 함께 다니는 몸종 하나만 데리고 새벽에 길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부지런히 걸어 저녁 때 백옥포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꿈인 듯 생시인 듯 누군가 마당에 들어와 문고리를 흔들었다.


"뉘시오니까?"

"나요, 부인."


그렇게 두 사람은 백옥포리의 깊은 밤, 14년 전 강릉 북평촌에서 혼례를 치르던 첫날처럼 반가이 만났다.


그리고 그해 섣달 스물엿샛날 이원수의 부인 사임당이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후일 이 나라의 대현으로 불리는 율곡 이이였다.



이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에 이름을 떨친 훌륭한 인물들은 어려서부터 늘 남다른 데가 있다. 그렇게 태어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져 기록되기도 한다.


현룡이 세 살 되던 해 가을의 일이다.


외할머니 용인이씨가 뒤뜰에 잘 익은 석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 같으냐고 물었다.


현룡은 자신이 어른들로부터 들은 시의 한 구절로 대답했다.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


세 살이라고 하지만, 생일이 섣달 스무엿새여서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아기였다.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익히는 아기 입에서 누군가 들려준 고시 구절이 그대로 나온 것이었다. 놀랄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진사시험에 장원한 소년

스물다섯 살의 큰아들과 열여덟 살의 둘째 아들, 그리고 열세 살의 셋째 아들이 진사시험 초시를 보러 가는 아침이었다.


초시를 치르고 이듬해 봄에 복시를 치르는데 이렇게 하여 전국에 진사 100명, 생원 100명을 뽑는다. 여기에 입격하면 군역이 면제되고(이것은 정말 대단한 특혜와 기득권이다)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저녁이 되어 사임당은 여러 차례 대문까지 나갔다가 들어왔다. 세 아들은 인경이 울린 다음에도 한참 뒤에 돌아왔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예조와 성균관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 그리고 대과의 초시 입격자 방이 붙었다. 위에 두 아들은 생원시와 진사시 초시에 모두 떨어지고, 열세 살의 셋째 아들이 서울에서 백 명을 뽑는 진사시 초시에 장원을 한 것이었다.


어려도 셋째 아들의 재주가 이미 위에 두 형님을 뛰어넘는 것 같은데도 사임당은 이 세상에 형만한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늘 말했다. 막내아들 우의 기억으로도 그가 말을 배울 때부터 어머니는 어느 자리에서나 자녀들에게 늘 부의모자 형우제공(父義母慈 兄友弟恭,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비로우며,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공경한다)을 말해 왔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이제 남은 이야기는 사임당 어머니의 막내아들, 저 이우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는 막내인 저를 앉혀 놓고 이렇게 말씀하곤 하였지요.


"형제는 부모의 몸을 함께 받은 한 몸 같은 사람들이니 형제를 대할 때는 너와 나의 간격이 없어야 한다. 가령 형은 굶주리는데 아우는 배부르고, 아우는 추운데 형은 따뜻하다면 이것은 한 몸 가운데 한쪽 손은 건강해도 다른 한쪽 손이 아프고 병든 것과 같은데 어찌 몸과 마음이 한쪽만 편할 수 있겠느냐?"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는 쇠고기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처음 시작은 율곡 형님이 쇠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소가 끌고 왔는데, 그때 여러 날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오며 소의 수고를 본 다음 형님이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소가 논밭에서도 힘들게 일하고, 또 저렇게 무거운 짐을 끌면서 사람 일을 대신 해주는데 나중에 저 소를 잡아 고기를 먹는다는 건 너무 몰인정한 일입니다. 저는 이제 쇠고기를 먹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형님은 그 뒤로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그런 아들의 뜻을 중하게 여겨 함께 쇠고기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의 말에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어진 생각을 보았던 것입니다. 꼭 율곡 형님뿐 아니라 어머니는 어느 자식이든 자식의 생각을 늘 존중하고 그것이 바른 생각이면 뜻을 함께 해왔습니다.



어머니의 그림을 보는 두 가지 눈길

어머니는 참 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어머니의 글씨로 후대에 전하는 것은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넷째 이모에게 써 준 초서 휘호 여섯 점과 우리가 공부하는 방에 늘 붙여 주었던, 공부에 대한 어머니의 좌우명과 같은 해서체 휘호 한 점이 전부입니다.


거기에 비해 그림은 후대에까지 전하는 것이 글씨보다는 조금 더 많습니다. 어머니가 그린 그림들에 붙인 시와 발문도 많습니다.


어머니의 그림에 대해 세상 사람이 말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가 누구의 아내며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지 않고 당대의 여류 화가로 오직 어머니의 그림에 대해서만 얘기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백 년이 지난 다음 똑같은 그림을 놓고 이야기하면서도 여류화가의 자취는 지워버리고 오직 동방의 대현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 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들입니다.


어숙권은 어머니의 그림이 여자 화가로서가 아니라 당대 선비들이 그린 그림 전체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패관잡기》2권에 실린 내용이고, 4권에서는 또 어머니의 그림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산수화를 잘 그리는 사람으로 지금 동양 신씨가 있는데,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화와 산수화는 아주 절묘하여 그림을 평하는 사람들마다 안견 다음간다고 하였다. 아, 어찌 부녀자의 필치라고 해서 가벼이 여길 수 있으며, 또 어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어머니의 포도 그림은 잘 익은 열매와 아직 영글지 않은 열매가 함께 어우러져 덩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손바닥처럼 큼지막한 이파리가 금방 불어온 바람에 나부끼며 포도송이를 가릴 듯 드러낼 듯 그 안에 포도향기 같은 생기가 흘러넘칩니다.


흔히 예술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 당대의 평가보다 후대의 평가가 더 깊고 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서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자식인 제가 봐도 그림 그 자체보다는 또 다른 목적성을 띄는, 거기에 어떤 이데올로기적 혐의들이 짙게 배어 있는 평가들이었습니다.


송시열은 나의 아버지, 아니 우리 칠 남매의 아버지 증좌 찬성 이공의 묘표도 짓고, 묘비명도 손수 짓고, 내가 죽은 다음 70년 후 나의 증손 이동명이 나의 흩어진 시편들을 모아 간행한 《옥산시고》에 과찬의 서문도 쓰고, 비슷한 시기에 내 무덤 앞에 세운 묘갈의 묘갈문을 썼던 사람입니다. 율곡 형님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글과 자취와 떠받듬을 남긴 사람인가요. 그러나 유독 어머니의 그림에 대해서만은, 더구나 그것이 세상 밖으로 나가 두루 살펴보아야만 그릴 수 있는 산수화에 대해서는 후부인의 예를 들어 조금도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율곡 형님은 정호/정이처럼 한 나라 유학의 기틀을 이루는 대 유학자이고, 어머니는 그들의 어머니 후부인과 꼭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세상에서는 부녀자의 문장이나 필찰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매우 옳지 않게 생각하는 후부인과 같은 여성이 필요한 것이지 오서육경에 통달하여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누구 하나 서당에 보내지 않고도 어머니가 교육시키고, 안견 다음으로 정묘하게 산수화를 그리는 사임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단히 현숙하지 못한, 아니 남자들만의 세계를 넘보는 오히려 위험하고 불온하기 짝이 없는 여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송시열과 이후의 유학자들이 어떻게 말하든 어머니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으로부터 백 년 전 이미 그 시대에 신씨 혹은 동양 때로는 동양신씨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친 화가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열여섯 살의 율곡 형님이 소년의 시선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쓴 것처럼 이미 그 시기에 어머니는 어머니의 그림을 모범으로 따라 그린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많이 나올 만큼 가족 중 누구의 도움 없이도 백 년 전의 스승 안견 다음가는 자리의 당당하고 고아했던 화가 사임당 신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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