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피트 웜비 (지은이), 임슬애 (옮긴이)
ǻ
윌북
   
18800
2025�� 07��



■ 책 소개


“월요일 아침, 직장 동료의 아침 인사에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결국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유머러스한 자기고백

늘 나를 빼고 설계된 세상에서 사는 끔찍한 느낌을 받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어 교사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일해온 저자 피트 웜비. 그는 서른네 살에 아주 우연히 자폐 스펙트럼과 ADHD 진단을 받은 후 너무도 힘들었던 지난날을 완전히 새로운 시점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그가 삶에서 맞닥뜨렸던 곤란했던 일들이 결코 즐거운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코미디 시트콤의 내레이션을 하듯 술술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나간다.

“월요일 아침 7시 45분. 주말을 잘보냈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동료에게 해야 뭐라고 답해야 할까? 바로 저기 계단이 있으니 그냥 후다닥 내려가서 문밖으로 나가 학교 진입로를 가로지르면 누군가가 눈치 채기 전에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전형적이고 무해한 월요일 오전의 질문을 받고 도망가는 것은 역시 무리. 대답을 해야 한다. 어떻게? “설령 끔찍한 주말을 보냈어도 어렴풋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아야만 한다(이유는 모르겠다).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금물이다.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저자는 누군가에겐 아주 보통의 일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도록, 무겁지 않은 영리한 서술 방식을 택했다. 자신의 일상을 트위터에 올려 사람들에게 공유했고, 큰 호응으로 이어져 결국 책 출간까지 성공시킨 저자의 이력을 증명하는 책이 됐다.

■ 저자 피트 웜비
영국의 작가이자 강연자. 2017년 34세의 나이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통인 일상이지만, 에너지와 인지 능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결국 무너져내렸던 지난날과 안
정적인 생활인이 되기 위해 써야만 했던 가면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그는 자폐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저서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
몰토크』는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세상 속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쓴 책이다.

■ 역자 임슬애
고려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영 번역을 공부하고 현재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두 번째 장소』, 『영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더 로스트 키친』, 『어른의 중력』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당신이 자폐인이거나 아니거나

1장 사회라는 그물
2장 자폐, 우정, 사랑
3장 신발 끈 묶기의 불쾌함에 관하여
4장 취미 이상의 무언가
5장 학교,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곳
6장 일자리, 그리고 또 다른 위험들
7장 휴식이 스트레스
8장 정의를 향한 열렬한 마음

마치며
감사의 말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사회라는 그물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안녕, 피트. 주말 잘 보냈어?"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충격에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냥 도망쳐버리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하겠지? 그러니까... 바로 저기 계단이 있으니 그냥 후다닥 내려가서 문밖으로 나가 학교 진입로를 가로지르면 누군가가 눈치채기 전에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체력이 좋지도 않고 커피가 든 거대한 머그잔과 시험지 한 뭉치를 들고 있긴 하지만, 상황이 심각한 만큼 어찌어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나는 사회의 규칙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행동은 극단적이라고 명명될 것이며 실제로 도망갔다가는 직장 동료들에게 경계 대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월요일 오전 7시 45분이고, 45분 뒤에는 수업 시작이니까 말이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전형적이고 무해한 월요일 오전의 질문을 받고 숲으로 도망가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 대신 그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물론 솔직한 대답은 안 된다. 맙소사, 솔직하게 대답했다가는 얼마나 끔찍한 사회적 결례가 되겠는가! 설령 끔찍한 주말을 보냈다 해도 어렴풋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아야만 한다(왜 그래야 하는지는 솔직히 말하면 서른아홉 살을 먹고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도 금물이다.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오늘 아침, 아직 커피 한 잔도 못 마신 이른 시간에, 나는 적절한 대꾸를 생각해내고 후속 질문을 처리해야 한다. 과거에 이런 상황에 잘못 대처했다가 불쾌한 결과를 맞닥뜨렸다. 나의 불안 증상(쿵쾅거리는 심장, 상승하는 혈압)은 우울할 정도로 친숙하다. 그그러나 지금은 월요일 아침이고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했으니, 엉뚱한 대답으로 대화를 망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간단하고 무심하게 "응, 고마워"라고 대꾸한 뒤 일과를 재개하는 것임을 깨우쳤다. 이것이 바로 '스몰토크', 정보 전달이 아닌 사회적 목적으로 가득한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적어도 신경 전형성의 세상, 존재하는 모든 규칙이 만들어지는 그 세상에서는. 언어학자들이 즐겨 명명하는 대로 이런 '의례적 의사소통'의 목적은 소통이 발생하며 조금씩 사회적 관계가 원활해지는 것,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이 차츰차츰 가만가만 돈독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자폐인에게는 정말이지 악몽이다.


게임을 새로 사면 처음에 필요한 정보가 전부 적힌 두꺼운 안내서가 함께 제공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안내서부터 자세히 살펴보고는 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자폐성 장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사회적 상호 작용'이라는 게임에 돌입하기 전부터, 규칙과 지침, 팁, 요령으로 가득한 완전하고 유용한 팸플릿 같은 것이 (어떤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반면 나와 자폐인 친구들은 평생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어떤 도움도 없이 '규칙'을 깨우치려고 노력해야 하며, 완전한 '삶' 경험으로부터 다소 비껴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실제로 자폐인은 비자폐인들이 자유롭게 손에 넣는 듯한 사회적 규칙 안내서 없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나는 이 비유를 필요에 따라 주기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신경 전형성을 지닌 또래를 관찰하며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무심코 이루어지는 반면 자폐인은 하나하나 배워가며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에게 가벼운 대화는 박수만큼 쉬워 보이지만, 자폐인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해의 장벽이 된다. 왜 그럴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스몰토크를 오랫동안 일상(주로 직장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자폐인은 이미 타인을 오해하고 타인에게 오해받은 경험을 많이 축적했을 것이다. 이는 자폐성 장애의 일반적인 특징이며 일상에 상당한 지장이 된다. 쉬이 이해받는다는 것은 비행기의 자동 조종 장치에 비유할 수 있다.


비자폐인에게 대화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규칙 안내서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기에, 안전한 자동 주행 시스템에 일을 맡기고 목적지를 향해 침착하게 전진하는 여객기처럼 부드럽고 고요하게 대화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똑같은 상호 작용이라 해도 자폐인 대다수에게 스몰토크는 자동 조종 장치도 없고 훈련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고층 건물로 가득 찬) 대도시를 통과하는 항공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종간을 움직일 때마다 기체가 온갖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휙휙 방향을 바꿔 항상(정말로, 늘, 항상) 재난이 임박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회가 인정하는 대화의 규칙은 적어도 내겐 처음에는 수수께끼였고, 규칙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느리고 힘겨웠다. 전형적인 대화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많다. 몸짓과 표정만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통의 상당 부분은 완전히 암묵적이고,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추측이 필요하다. 바로 이 암묵적인 것들이 자폐인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나는 영문학 전공자라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 생각에 '이론상으로는' 자폐인은 암묵적인 이야기라는 개념 을 이해하고 잘 받아들인다. 문제는 일상적인 발화의 속도와 복잡성이다. 비자폐인은 대화 속의 암시를 곧장 알아차리지만, 보통 우리는 인식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복사기 앞에 선 내게 동료 한 명이 다가와 주말 잘 보냈냐고 묻는 가상의 월요일 오전으로 돌아가자면, 기대되는 바는 명확하다. 선량한 동료는 "잘 보냈어, 고마워" 같은 대답을 기대할 것이다. 내가 기대를 충족해주면 그 사람은 대화가 성공한 듯해 만족할 테고 나는 정직하지도 신실하지도 않은 소통에 불만한 채로 상호 작용이 중단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불쾌했던 순간을 복기할 때  가장 마음이 쓰린 사실은 정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 보냈어, 고마워"라고 대답하면 거짓말을 두 개나 하는 셈이다. '잘 보냈어'라는 첫 번째 거짓말. 내 주말은 끔찍했고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그래서 엄청난 양의 커피를 준비한 것이다).


'고마워'라는 두 번째 거짓말. 나는 아무것도 고맙지 않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으련만 내 감정에 대해 거짓말하게 되지 않았나.


이 시점에서 내가 생각이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면, 나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겠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과한 생각은 자폐인의 특성, 진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큼 뚜렷한 특성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지금까지 몇 장이나 읽었는지, 내가 스몰토크라는 단 한 가지 상호 작용에 얼마나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지 알아보시라.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휘몰아친 폭풍 같은 활기와 격동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스몰토크가 드물기라도 했다면.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빈번하며, 내가 15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직원이 많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불만족스럽고 스트레스 심한 상호 작용이 하루에도 여러 번 발생하리라 예상할 수밖에 없다. 스몰토크에 어려움을 겪는 자폐인이라면 결국 엄청난 혼란의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내가 밤에 잠을 못 자는 것은 이런 순간들 때문이다. 불편함을 삼키고 대본에 맞게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위험하게 활강 코스를 벗어난 순간들. 심각한 경우에는 실제로 숲으로 도망쳐 키가 엄청나게 큰 다람쥐로서 새로운 삶을 꾀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스트레스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규칙을 잊어버리고 바보짓을 하곤 한다.



자폐, 우정, 사랑

외로움을 느낄 줄 안다

보통 자폐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내향적인 사람이라고들 생각한다. 사실상 은둔자라고, 외딴섬의 오두막에 살면서 평생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전적으로 만족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 우리 자폐인 중에는 이런 가정이 사실일 사람들도 있다. 내 꿈은 은퇴한 뒤 스코틀랜드의 섬에서 은둔자의 삶을 사는 것인데, 누가 뭐래도 이 꿈을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폐인의 내향성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폐인 중에는 여러 중요한 특성을 종합했을 때 상당한 외향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비자폐인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더라도 자폐인 역시 (휴식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단서가 있지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관심을 받으며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신경 전형인의 외향성과 똑같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폐인과 비자폐인에게서 똑같은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점은 자폐인이 반사회적이며 심지어 인간을 혐오한다는 오래되고 널리 퍼진 고정관념에는 굉장한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자폐인이 스스로 외향인으로 정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야기해본 상당수는 사회적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껴서, 혹은 자신의 성향을 '때려 눕혀 없애버린' 결과 때문에 타고난 외향성을 꽃피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 잘 살펴보자.


선천적으로 외향성을 타고난 자폐아를 상상해보라.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관심을 즐기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공감력이 뛰어나고 타인과 어울리며 잘 지낸다. 그러나 그들은 자폐가 있기에 신경 전형성을 지닌 동료들에 비해 사뭇 다른 의사소통 기술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는(주변 사람들은 '힘겹다'거나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문제로 발전한다.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고, 싸움이 일어나고, 따돌림이나 심지어 괴롭힘까지 당한다. 외향인 자폐아는 조금씩 끔찍한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은유적인 타격을 받아 움츠러들고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점점 줄이게 된다. 남은 생애 동안 그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을 조심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두려워하지만, 타고나길 외향적인 성향을 없앨 수는 없다. 대신에 그들은 일종의 비자발적인 내향성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수천 번은 반복되었을 이야기이며, 그 결과 우리 자폐인은 극도로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인간 접촉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자폐인 공동체 내부에는 트라우마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더 많은 상호 작용을 통해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프게도, 자폐인들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하고 안전한 세상에 도달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그러므로 지인 중에 자페인이 있다면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고 가정하지 않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자폐인도 외로움을 느낄 줄 안다.


현재로서는 자폐성 장애의 내향성에 관한 거짓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사교적인 자폐인들은 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줄곧 자기 자신일 수 없다. 학교에서 점심 시간과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이나 계단 밑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숨어 혼자 있는 자폐아는 걱정거리로 보이지 않는다. 교사는 '괜찮다'고, '저 애는 자폐아'라고 생각하리라. 그래서 자폐아는 조용히 탐지망을 피해 다니고, 그들의 강렬한 외로움은 결국 더 위험한 우울증으로 탈바꿈한다. 외로움이 반드시 우울증으로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폐성 장애에 관한 낡은 관념 때문에 놓치기 쉬운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다.


자폐인이 친구와 어울릴 때는 어떤 모습인지, 사교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싶다면, 신경 다양성을 지닌 학생들이 방과 후에 참석하는 자폐 친화적 동아리를 살펴보라.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동아리는(가령 뜨개질, 체스, 환경 및 동물복지, 모의 전쟁 게임 등 주제는 다양하다) 자폐인 학생을 포함해 여러 신경 다양인을 광범위하게 포용하며, 이런 모임에서는 자폐인이 사회적 접촉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취미의 세세한 사항에 관해 논쟁하고, 웃고, 농담하고, 친구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런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며, 나는 내가 경험한 가장 따뜻하고 즐거운 사회적 활동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자폐인이 함께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보다 가능성의 여부다. 사회적 연결을 추구하는 자폐인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악의적인 대우를 받을 염려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대부분의 삶의 영역에서 이것은 사실상 표준이지만) 이런 공간을 찾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심지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많은 자폐인이 친구를 구하고 있다. 상당수가 친구를 원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하고, 친구에 관해 잘 알고 싶어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친구 없이 꽤 행복하게 지내는 자폐인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표준이 아니라 예외라는 확신을 굳히고 있다. 다른 자폐인은 (충격적이고 두려운 사실이지만) 신경 전형성을 지닌 여러분과 비슷하다. 물론 우리가 우정이라는 구불구불한 장애물 코스를 헤쳐나가는 방식은 표준이라고 인식되는 것과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학교,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곳

장담하건대 독자 여러분은 학창 시절에 머물렀던 교실 중 기억나는 공간이 있으리라. 그리고 학교 과학 실험실의 냄새가 잠깐 코끝만 스쳐도 즉시 그 시절 화학 수업 시간의 한 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장소의 기억은 머릿속에 남고,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추억은 상대적으로 행복하고 아늑하기도 하다.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사로서 나는 과학이나 기술 교실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내 교실에 숨어 사실상 은둔자로 살았다. 하지만 몇 번 건물 반대편으로 걸어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익숙한 후각적 충격을 받았다. 두 교실 모두 강렬한 냄새를 풍겼다. 기술 교실에서는 톱밥과 접착제 냄새가 강렬했고, 과학 교실에서는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가 났다. 전국 어느 학교를 가든 과학 실험실은 원래 그렇다. 가스 밸브에서 새어나온 가스, 그을린 거즈, 화학 물질의 혼합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과학 교사에게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다. 나야 모르지만. 어쨌든 실험실 근처에 갈 때마다 어린 시절 동안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겁에 질린 채 수업을 듣던 때로.


'과학 실습'이란, 책상을 깨끗하게 치우고 과학적 노력을 위한 장치들을(분젠 버너, 플라스크, 전선, 퓨즈, 조각난 개구리 시체) 세심하게 배치한 수업을 의미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이 짓거리를 정말 좋아했다. 전기를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는 기회였고, 불장난은 그보다 끝내줬다. 진짜 불꽃은 아이들의 삶에서는 환상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열렬히 반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공포에 질린 채 옆에 앉아서 이 끔찍한 실용 과학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학교 일과가 뿌리째 뒤집혀 상상을 초월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항상 똑같았다. 다른 학생들은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한 채로 장비를 들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산했으나 나는 영문을 몰랐다.


왜 나는 상황 파악을 할 수 없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항상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주의 사항을 주의 깊게 적었고, 배우는 것을 전부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라는 대로 할 수 없었다. 내 머리는 잠재적인 실수와 사고를 추측하느라 대부분의 처리 능력을 소진했고, 해야 할 실험은 간단했음에도 전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내가 실습 수업의 주를 이루는 언어적 지시를 따르지 못했던 이유가 신경 다양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ADHD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지만, 자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언어 지시가 힘들다. 이 힘겨움이 지금은 어떻게 발현되는지 궁금하다면, 유튜브의 요가 동영상을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지켜보면 된다. 양방향으로 움직이며 다양한 몸동작과 자세를 지시하는 빠른 목소리를 듣다가 당황해서 비비 꼬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 테니까. 물론 1990년대 레스터셔의 작은 중학교에서는 내가 당황한 원인이 신경 다양성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고, 과학 선생님들은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나를 실패자로 낙인찍었다.


물론 나는 가면 쓰기에 나름대로 능숙했기에 같은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내면의 혼란을 잔뜩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대신 느리게 퍼지는 독을 삼키듯 다 삼켜버렸고, 시험관 속의 액체가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을 때 친구들이 한껏 들뜨자 공감하려고 애썼다. 얼굴에 가짜 미소를 박제했고, 부끄러운 심리 탈진을 겪지 않으려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실험의 중요한 부분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이런 실습 수업에서 가면 쓰는 기술과 호흡법을 연마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탐구해야 했던 다양한 실험 과정에 관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중에 위키피디아 페이지들을 마구잡이로 읽으며 배운 것이다.


자, 이것이 분명 보편적인 특성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자폐인이 과학 실습을 즐겨 이쪽으로 경력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 자주 발생하는 스트레스, 바로 일과가 파괴되어 생기는 스트레스의 예시를 제시한 것이다. 책을 이용한 평온한 공부에서 소음과 냄새 가득한 실습으로 전환하기란 분명 내 자폐성 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학습에 차질이 생겼다.


이것은 교사들이 수업을 준비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취향'의 수업에 자폐인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하고, 어떤 학생들에게 특정한 수업 형식은 너무나도 버거워서 아무것도 배우거나 이해할 수 없기에 사실상 수업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폐 학생의 교육을 보다 명확하고 신중하게 조정하는 작업은 흥미로운 사고 실험이 될 수 있음에도 실험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특정 유형의 학습 활동이(이런 현상은 성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라, 업무 기반 활동도 문제가 된다) 효과는 적고 피해만 많다면, 이런 활동을 고집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자폐 학생들에게 어떻게든 알아서 스트레스를 처리하라고 닦달하기보다는 활동을 관찰하도록 허락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실험하는 다른 학생들이나 교실 앞에서 지시하는 교사를 보고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분명 내가 줄곧 꿈꿔왔던 것이고, 몇 번 꿈이 실현됐을 때는 황홀감을 느꼈다. 불안으로 산만한 대신 실제로 진행되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2008년쯤 교육계에서 절대적 신성의 가치를 지니던 학습 방식이 있었는데, 바로 모둠을 짜서 공부하는 수업 방식이었다. 이는 학습의 토대이자 모든 수업 계획의 필수 요소로 간주되었다. 모둠 학습 없이 수업을 진행하려 들었다가는 지도교수가 학생들이 배울 기회를 놓쳐 학습 능력에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고 한탄하며 형편없는 성적을 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학창 시절에 모둠 활동을 완전히 혐오했다는 것이다. 모둠 활동이 강요될 때마다 (그 끔찍한 과학 실습 수업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지리 수업에서도) 나는 시련이 곧 끝나기를 바라면서 정신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입을 꾹 닫아버리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맡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모둠 활동을 강요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한 학위를 받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고, 수업에 모둠 활동을 최대한 많이 포함시키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자, 나는 다른 교사의 교육 방식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모둠 활동이 나쁘기만 하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분명 많은 학생에게 아주 잘 맞으리라. 다 함께 교실 책상에 둘러앉아 공부하기를 즐기는 자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이지 각양각색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모둠 활동을 달갑게 돌이킬 성인 자폐인이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일부 자폐 학생은 학교에서 아주 잘 지낸다. 나 같은 학생들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겹의 가면 뒤에 힘든 진실을 숨기고 산다. 가면 쓰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거나 애초에 가면을 쓸 줄 모르는 학생들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각자 각양각색의 체험을 한다. 그러나 '자폐성 장애 인식'의 시대에도 학교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인식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자폐인을 가르치는 교사는 전부 자폐성 장애에 관한 최신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교육은 일부분이나마 자폐인들이 직접 실시해야 한다. 거짓된 통념과 고정관념은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으며, 비교적 최근인 2010년에 모범 사례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절망적인 구닥다리로서 심각한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교사는 자폐인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정확히 파악해 자폐인을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이 낙서하는 이유가 정말로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책장에 끄적인 조그마한 그림들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잖아?


이 외에도 우리는 학교 문화를 개선해, 자폐성 장애가 더는 '금기'시되는 용어가 아니며 비자폐인 학생들도 자폐에 관한 실질적인 지식이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난독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자폐도 학교생활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포용하면 자폐 학생의 경험을 정상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자주 발생하는 '타자화' 역시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교사로 일하던 시절 내가 자폐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시간이 지나자 자폐 학생들도 똑같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 일반적으로 외부인에게 꽤 인색하기 마련인 '쿨한' 아이들 무리가 자폐인의 경험에 관심을 보인 덕에 나와 학생 몇몇이 설명해주었고, 우리는 자신의 특성과 행동이 포용의 대상이 된 듯 마음이 편안해진 놀라운 경험과 함께 조금은 가면을 벗어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아이들이 그립고, 이런 태도가 전국적으로 퍼진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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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