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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actured Age

분열의 시대


The Fractured Age
    | Neil Shearing
ǻ | John Murray Business
    | $29.99
| 202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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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세계경제
- 불확실성은 이제 금리가 아니라 지도에서 온다

한때 세계경제의 기본값은 연결이었다. 더 싸게 만들고 더 멀리 팔수록 모두가 이익을 본다는 믿음이 강했고, 공급망은 효율을 향해 길게 뻗어 나갔다. 지정학은 배경음처럼 낮게 깔렸고, 기업은 그 소리를 가끔 키워 듣더라도 결국 비용과 속도의 계산으로 결정을 내렸다. 연결이 곧 성장이라는 상식이 작동하던 시절에는, 위험이 터져도 세계는 대체로 원래의 흐름으로 되돌아가는 탄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본값은 연결이 아니라 분할이다. 효율은 리스크가 되고, 최적화는 취약성이 되며, 무역은 안보의 언어로 번역된다. 예전에는 분쟁이 생기면 무역이 줄어드는 결과가 따라왔지만, 이제는 무역을 줄이는 행위 자체가 분쟁의 수단이 된다. 흔들림이 사건이 아니라 구조로 굳어지면, 경제의 중심 질문도 바뀐다. 얼마나 싸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가 된다.

분열의 메커니즘
분열은 감정이 아니라 제도에서 시작된다. 관세는 단지 가격을 올리는 조치가 아니라 거래 상대를 재분류하는 신호가 된다. 수출통제는 특정 기술의 흐름을 막는 동시에, 어느 편의 생태계에 속할 것인지 선택을 강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제재는 처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금융과 보험과 운송이라는 연결의 관문을 조정해, 네트워크 전체를 재배치하는 작업에 가깝다.

이때 진짜 변화는 정책의 언어가 바뀐다는 점이다. 성장과 물가의 언어가 안보와 회복력의 언어로 이동하면, 손익계산의 기준도 함께 이동한다. 단가가 조금 더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조달하자는 명분이 커지고, 최적화 대신 여유분을 두는 설계가 확산된다. 그러면서 세계화는 끝나지 않되, 하나의 단일 시장이 아니라 여러 개의 권역으로 나뉜 시장이 된다. 연결의 방향이 바뀌고, 연결의 조건이 까다로워진다.

기업이 겪는 현실은 더 날카롭다. 생산지를 옮긴다고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인력과 품질, 인증과 규제 준수, 노무와 세무, 데이터 이전과 보안 같은 비용이 한꺼번에 따라온다. 거래선을 바꾸면 새 공급망을 시험하는 시간과 실패 비용이 붙고, 그 사이 납기 지연이 매출을 흔든다. 결국 장부에 찍히는 비용보다 더 큰 비용은 불확실성 자체다. 어느 날 규칙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투자 결정을 늦추고, 늦어진 투자는 기술과 생산성의 속도를 떨어뜨린다.

친구와 적이 아니라 규칙과 예외의 싸움
분열을 진영 대결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더 본질적인 전장은 규칙과 예외의 전장이다. 어떤 국가에는 허용되던 기술이 다른 국가에는 금지되고, 같은 품목도 용도에 따라 통제 강도가 달라진다. 어떤 기업은 예외를 얻고 어떤 기업은 막히며, 민간 거래가 정부의 허가와 심사에 걸려 멈춘다. 규제의 문턱이 높아질수록 경쟁의 주무대는 가격에서 승인으로 이동한다.

이 구조는 시장의 투명성을 갉아먹는다. 기업은 생산 혁신보다 규제 대응에 더 많은 역량을 쏟게 되고, 법무와 컴플라이언스와 로비가 전략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경쟁의 룰이 바뀌면 승자의 얼굴도 바뀐다. 생산을 잘하는 기업보다 규칙을 잘 읽는 기업이, 기술을 앞선 기업보다 제재를 피해 설계를 잘하는 기업이 유리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장의 속도는 느려진다. 느려진 속도는 곧 비용이고, 비용은 다시 정치적 반발을 부른다. 분열은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순환과도 맞물린다.

또 하나의 분열은 기술 생태계에서 나타난다. 반도체와 AI 같은 핵심 기술은 단순한 산업재가 아니라 국가 역량의 압축판이 된다. 여기서 통제가 강화되면 기업은 기술 스택 자체를 권역별로 나누는 결정을 해야 한다. 한 제품이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돌아가던 시대가 끝나고, 규제에 맞춘 변형 제품이 늘어난다. 규모의 경제가 약해지면 단가가 오르고, 단가가 오르면 다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다. 지정학은 결국 일상 물가로 번역된다.

분열은 금융에서도 진행된다. 결제와 달러 유동성, 제재 위험, 공급망 보험과 운송의 재보험 같은 영역은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 번 균열이 생기면 거래 전체를 멈추게 만든다. 그래서 기업은 단순히 공장을 옮기는 문제를 넘어, 결제 경로와 통화 리스크, 거래 상대의 제재 노출을 함께 설계한다. 이때부터 세계경제는 하나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여러 개의 항로를 동시에 계산해야 하는 선단이 된다. 항로가 늘면 안전은 커질 수 있지만, 속도는 떨어진다.

분열이 낳는 새로운 기회
그렇다면 이 흐름은 비극만 남길까. 꼭 그렇지는 않다. 분열은 비용이지만 동시에 재편이다. 한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된 생산이 분산되는 순간, 중간 허브가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조립만 하던 지역이 부품과 소재로 올라갈 수도 있고, 주변부로 취급되던 나라가 특정 권역의 핵심 공급자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기존의 질서가 고정해 두었던 자리를 흔들어 놓는다.

다만 기회는 자동으로 오지 않는다. 산업정책이 없으면 기회는 금융상품처럼 잠깐 스쳐 지나간다. 인력과 인프라가 없으면 생산은 들어오지 않고 일부 공정만 남는다. 분열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값싼 노동이 아니라, 안정적인 제도와 빠른 인허가, 숙련된 기술인력, 그리고 갈등이 커져도 계약이 지켜진다는 신뢰다. 이 신뢰가 쌓이면 공급망은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린다. 뿌리를 내린 공급망은 다시 투자와 일자리를 불러온다.

그래서 이 흐름을 읽는 재미는 예언보다 지도에 가깝다. 어디가 끊기고 어디가 이어질지, 어떤 기술이 막히고 어떤 기술이 우회로를 만들지, 어느 나라가 제조의 귀환을 말로만 할지 실제로 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장기 성장률에 어떻게 찍힐지까지 한 화면에 올려놓는다. 이 지도는 맞힐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할수록 가치가 커진다. 준비란 결국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핵심 품목을 정의하고, 리스크를 수치화하고, 위기 때 돌아갈 경로를 미리 마련하는 일이다.

남는 인상과 아쉬움
가장 큰 장점은 전통적인 경기 설명만으로는 잡히지 않는 변동을 하나의 렌즈로 묶어 준다는 데 있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성장률의 흔들림 뒤에서 실제로 무엇이 구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감각을 주고, 개별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이동하는 판 자체를 보게 만든다. 그래서 현실의 뉴스가 단편으로만 쌓이지 않고, 한 방향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다만 분열을 너무 결정론으로 그리면, 모든 정책 실패가 지정학 탓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는 국가 내부의 정치, 규제의 비효율, 교육과 연구의 둔화 같은 내생 변수들이 함께 작동한다. 분열의 구조를 강조하되, 그 구조가 모든 것을 여는 만능 열쇠가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남는 문장 하나는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은 이제 금리만으로 오지 않는다. 지도에서 온다. 그리고 지도가 흔들리는 시대에는, 가장 비싼 비용이 가장 큰 실수가 아니라 가장 긴 지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