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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숫자로 세상을 다시 보는 법
- 우연과 위험, 무지와 운 사이에서 길을 찾는 사고의 기술
‘확실해 보이는 말’이 넘쳐나는 세계
요즘 세상은 이상할 만큼 확신에 차 있다. 경제·부동산 전망, 선거 결과, 인공지능의 미래까지, 화면 앞에 선 사람들은 종종 주저함 없이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팬데믹, 전쟁, 기후 재난, 금융 불안처럼 어느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이 우리의 삶을 크게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확실한 답’을 원하지만, 세계는 그 욕구에 맞춰 단순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 위험, 무지, 운이 얽혀 있는 거대한 장에 가깝다.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일들, 대략적인 범위만 짐작할 수 있는 일들, 무엇을 모르는지도 잘 모르는 영역이 서로 뒤섞인다. 불확실성의 문제는 결국 이런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덜 속고, 덜 겁먹고, 덜 자만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연으로 짜인 한 인간의 계보
통계 공식보다 먼저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을 가로지르는 사건들의 연쇄다.
1918년 1월 29일, 서부전선 이프르 지역의 104여단 가스 장교로 근무하던 서른다섯 살 남자가 평소처럼 참호와 거점을 점검하러 나간다. 그가 지나야 하는 길은 이미 독일 포병의 조준을 가득 받은 곳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돌아오는 길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운 좋게 제시간에 빠져나왔다” 같은 기록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날, 결국 한 발의 포탄이 그 근처에 떨어지고, 그는 자신이 “폭발에 휘말렸다”고 적는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고 부상 판정을 받아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후송된다. 그가 속해 있던 부대는 이후 ‘비교적 조용하다’고 여겨졌던 소므 전선으로 이동했다가, 1918년 봄 독일군의 대공세 한가운데를 통과한다. 만약 그가 계속 전선에 남아 있었다면, 이후의 일생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포탄이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떨어졌다면 그 후손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어서 부모 세대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해상에서의 피란, 전쟁 중 비행 사고와 병으로 인한 위기, 그 모든 것을 간신히 비켜나온 연속된 우연. 마지막에는 1950년대 혹한의 어느 날,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돌집에서 일찍 잠자리에 든 부모가 “그냥 그렇게” 아이를 갖게 된 장면이 있다. 한 가계의 역사를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각자의 존재가 “수많은 작은 우연이 이어진 결과”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이런 연쇄 사건을 ‘미시적인 우연들의 연속’, 일종의 ‘미시-우연들’로 부를 수 있다. 각각은 사소해 보이지만, 조금만 달라졌어도 지금의 나와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는 사건들이다. 이 우연의 사슬을 이해하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과연 어떤 힘이 있는가?” 어떤 이는 운명, 섭리, 카르마처럼 방향을 가진 힘을 떠올리고, 또 다른 이는 무질서한 우연의 흐름으로 이해한다. 해석은 달라도, 삶 전체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 위에 서 있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불확실성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
오래된 한 문장은 이 감각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경주는 빠른 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싸움도 강한 자의 몫이 아니다… 모든 것은 때와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이 구절은 단지 수사적 장식이 아니라 인간 조건을 설명하는 말에 가깝다. 군인·이민자·환자였던 가족들의 생애, 산업화 이전 평균 수명이 20여 년에 불과했던 시대, 점점 거대해지는 기후·전쟁·팬데믹 위험을 함께 떠올려 보면, 안정과 확실은 오히려 짧은 ‘틈새의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세대는 늘 자신의 시대를 “특별히 위험하고 불확실한 시대”라고 불러왔다. 핵전쟁의 공포가 짙게 드리웠던 1950년대, 대공황과 전체주의가 동시에 밀려오던 1930년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기후 재난·정치적 양극화·초불확실성의 경제 환경까지.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항상 “이번에는 정말 다르다”고 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졌고, 각 세대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 불확실성을 견디고 길들였다.
숫자로 번역되는 불확실성
이런 철학적·역사적 논의와 나란히 다루어야 할 것은 ‘숫자의 세계’다.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그것을 숫자로 번역해 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는 먼저 “불확실성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같은 위험을 놓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같은 확률도 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이어서 불확실성을 숫자로 표현하는 법, 확률로 우연을 길들이는 방법이 등장한다. 더 나아가 놀라운 우연과 일치, ‘운’의 역할, 베이즈 추론, 과학과 불확실성, 기후와 재난, 의학과 예측까지 다양한 장면이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를 보자. 뉴스에서 “어떤 약이 심근경색 위험을 50퍼센트 줄인다”는 기사가 종종 등장한다. 이 문장을 그대로 들으면 위험이 절반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의미는 “1,000명 중 4명에게 일어나던 일이 2명에게 일어나게 줄어든 것”일 수 있다. 둘 다 같은 데이터를 표현하지만, 듣는 사람이 받는 인상과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예시는 상대적인 비율만으로 위험을 말할 때 얼마나 쉽게 공포가 과장되는지 보여준다. 간단한 산수, 표, “1,000명 중 몇 명”과 같은 표현을 활용하면 숫자가 사람들의 감정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하나씩 짚어 볼 수 있다. 통계는 추상적인 수학 이론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세계를 말로 설명할 때 생기는 왜곡을 줄이는 기술”에 가깝다.
분석으로서의 위험, 감정으로서의 위험
위험을 이해할 때 중요한 구분은 ‘분석으로서의 위험’과 ‘감정으로서의 위험’이다. 전자는 확률, 기댓값, 신뢰구간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는 세계이고, 후자는 불안, 두려움, 분노, 안도감 같은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다.
비행기를 예로 들어보자. 통계적으로 비행기는 매우 안전한 교통수단이다. 그럼에도 큰 사고가 보도될 때마다 사람들은 비행기를 비정상적으로 두려워한다. 반대로 일상적인 운전이나 집 안의 낙상 사고는 훨씬 큰 위험임에도 “원래 그런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사건이 일어날 확률”보다 “그 일이 실제로 겪게 될 경험의 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위험을 다루는 데에는 숫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위험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표현이 과장된 공포를 낳는지, 어떤 시각화가 더 정직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스코어링 규칙, 베이즈 추론, 기후 모델, 팬데믹 예측 같은 주제도 결국 “이 숫자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예측의 시대에 필요한 태도
정치·경제·기술 영역에서 예측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보고서에는 “가능성이 높다”, “거의 확실하다” 같은 표현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같은 표현에 서로 다른 확률 범위를 붙여 쓰는 관행은 생각보다 흔하다. 어떤 곳에서 “likely”는 60~75퍼센트를, 다른 곳에서는 66~90퍼센트를 가리킬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해법이 아니다. 말을 아끼고, 숫자와 언어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매우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이 대략 어느 정도의 확률을 의미하는지 사전에 합의해 두는 것. 예측이 빗나갔을 때는 어떤 가정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했는지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
이런 태도는 중앙은행, 기후 패널, 방역 당국 같은 기관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투자 결정을 내리는 개인, 진로를 선택하는 청년, 건강검진 결과를 해석해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불확실성을 향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손을 놓지도, “나는 확실히 안다”고 과장하지도 않는 중간 지점이야말로, 현대 시민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겹쳐지는 풍경들
불확실성을 다루는 이런 관점은 한국 사회의 여러 장면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건강검진 결과표의 애매한 문장, 부동산·주식·코인 그래프 위에 덧입혀지는 자극적인 단어, 여론조사 수치를 둘러싼 정치적 해석 싸움, 기후·핵발전·재난 위험에 관한 상반된 주장들까지.
이 모든 장면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비슷하다.
- 숫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을 함께 보는 감각
- 눈에 띄는 ‘한 번의 사례’와 전체적인 ‘패턴’을 구분할 수 있는 눈
- 불확실성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민의 태도
불확실성에 대한 문해력은 단순한 수학 성적이 아니라, 이런 사고 습관과 직결된다. “더 똑똑한 예측”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더 정직한 불확실성의 표현”이다. 어느 정도는 알고, 어느 정도는 모른다는 사실을 명확히 말할 수 있을 때, 책임 있는 선택을 둘러싼 논의가 비로소 시작된다.
불확실성과 함께 숨 쉬는 법
불확실성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통계학을 수학의 한 분과로만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통계는 미래를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 학문이다. 가족사와 전쟁, 스포츠 리그, 복권, 기후 모델, 의료 데이터, 거대 재난을 함께 살펴보면, 인간은 사소한 우연과 거대한 위험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불확실성을 다루는 예술은, 틀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미루지 않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간의 숙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우연과 실력, 노력과 운이 뒤섞인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지워주는 비법”을 찾는 일이 아니다. 숫자와 이야기를 함께 다루면서, 조금 더 덜 속고, 덜 겁먹고, 덜 자만하게 만드는 감각을 기르는 일이다.
결국 불확실성의 문제는 “확실한 답을 찾는가”보다 “어떤 질문을 품고 사는가”에 가깝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에, 어떻게 불확실성과 함께 숨 쉴 것인지 고민하는 태도 자체가,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 된다.